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9월이 다 가면 날 깨워줘. 9월의 언제였던지 아무튼 회사에서 보안 어쩌고 하면서 네이트 온을 못쓰게 하는 바람에 간만에 마음에 드는 대화명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마나한 소리가 되어 버렸다. 아무튼 내 대화명은 '9월이 다 가면 날 깨워줘'고, 물론 그린데이의 '웩 미 업 웬 셉템버 엔'을 번역한 문장이다. 9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내일이 오면 누군가 날 깨워줬으면 좋겠다.

내가 읽은 김연수의 소설들은 다음과 같다.

뿌넝숴(不能設)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거짓된 마음의 역사
달로 간 코미디언
뉴욕제과점

이건 모두 단편이다. 김연수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내게 <밤은 노래한다>나 <사랑이라니, 선영아> 같은 장편을 강권했다. 하지만 내가 잡은 책은 소설이 아닌 <청춘의 문장들>이다. 그리고 나는 하루만에 이 책을 다 읽었다. 29일 출근을 하면서 시작한 독서는 퇴근 후 잠자리에서 읽으면서, 그러니까 30일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에 끝이 났다. 그리고 9월의 마지막 날을 이 책을 덮으면서 시작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날 깨워줄 이는 내가 되는 것이 좋겠지만 김연수의 이 책이 조금은 도와줄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출근하는 지하철에 앉아서 읽다가 생각지도 못한 '기습'을 당했는데, 그것은 꽤 황망한 일이었다. 책을 읽다가 울어버린 것이다. 이덕무의 글을 빌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지금도 슬픈 생각에 고요히 귀기울이면'이라는 제목의 글에서였다.

그 얘기는 이쯤 해두고.

며칠 전인가 나는 <풋,>이라는 제목의, 문학동네에서 나오는 계간지를 통해 박민규의 단편 하나를 읽게 되었다. 제목하여 <마이 퍼니 발렌타인>. 어땠냐고? 묻지 마시라. 아무튼지간에 박민규와 김연수는 둘 다 요즘 '잘 나가는' 소설가들이다. 내가 문학의 스펙트럼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으나 둘이 비슷한 부류가 아니라는 정도는 알 것 같다. 박민규는 예나 지금이나 '삼류' 예찬론자고, 김연수는 프로 소설가로서 꽤 착실한 이미지다.(물론 박민규가 착실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착실하다. 김연수가 착실하다는 말은…내 부적절한 어휘선택을 자책하고 이쯤하는 편이 낫겠다.) 박민규의 문장 중에는 스타카토식으로 짧고 반복적인 문장들이 많고, 그는 이런 문장들이 자아내는 효과를 잘 알고 쓰는 것 같다. 김연수의 문장은 촘촘하다. 이 책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 외려 그의 문장에 조금은 실망한 부분도 있었지만 밀도는 과연 높았다. 흠, 이런 개도 웃고 갈 어줍잖은 평은 집어치우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박민규는 쌈마이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고, 김연수는 프로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다고나 할까. 일반 독자들에게는  더 분명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박민규의 소설은 '재미있고', 김연수의 소설들은 '진중하다.' 그러니까 박민규는 트렌드다. 박민규와 김연수가 내 바람 따위에 귀 기울일 가능성은 전혀 없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 개인적인 바람을 적어본다면 박민규는 문체의 변화를 시도했으면 좋겠고, 김연수는 전혀 다른 장르(이를테면 추리소설이나 환타지?)의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애니웨이.    

내가 이렇게 쓸데없이 길게 박민규를 들먹거린 것은 내게 배신감을 안겨주었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진중하다는 김연수의 소설과는 달리(꽤나 다작多作하는 작가인 김연수를 논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게 읽긴 했지만) 소설이 아니라 그랬는지 나는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눈물의 기습뿐 아니라 웃음의 기습도 꽤나 받았다. 그렇게 간간이 터지는 웃음은 프로 소설가의 가볍다면 가벼운,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 책의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울고 웃었던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쓰게 된 계기를 소개하면서 쉰 살이 가까워지더라도 삼단논법 정도는 구사할 줄 아는 여자친구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거나 관사관리병으로 근무하던 시절 사랑니를 뽑고 돌아와 대대장이 주는 캔맥주를 의사를 들먹이며 거부한 이병 김연수(아마도 군대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게 왜 웃긴지 짐작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정말 폭소를 터뜨렸는데, 처음으로 내가 군복무를 마쳤다는 것이, 그래서 이 상황에서 충분히 웃을 수 있었다는 것이 뿌듯했다.), 열일곱 살에 만난 여자아이가 즉석떡볶이를 만드는 모습을 보며, 같이 살면 요리를 잘 할까 하고 생각했다는 부분은 큰 웃음을 선사했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시를 읽을 줄 아는 그의 능력에 감탄도 하고, 내가 읽는 글을 거울 삼아 나를 비추어보기도 했지만 뭐니뭐니해도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책 여기저기에서 종종 등장하는 그의 멘토가 된 시인이다. 멘토가 있다는 사실. 자기 안에 있는 가능성을 직접 가리켜 말을 하고, 비꼬는 투로 '시나 써야겠다'고 말해도 외려 '그거 좋은 생각이다, 네가 어떤 시를 쓸지 궁금하다'고 말해주는 멘토.(후자의 상황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 김연수의 표현대로 정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존재를 만난 그가 사무치도록 부러웠다. 더불어 대학교 때 선생님이 생각났는데, 나는 그동안 그분의 말을 까먹고 살았다. 그 선생님은 그러셨다.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자신의 길을 가라고. 그러면 누군가 반드시 손을 내밀어 올 거라고. 반드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나는 그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기에 가슴 깊이 담아두고 있었으나, 너무 깊이 담아두었는지 찾을 수 없다가 김연수의 글을 읽고 다시 찾아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만큼 자신이 없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반드시 그렇게 살겠노라고 다짐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의 나는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았고, 다시 찾은 생각이라는 점에서 일견 희망적이기도 하다.

시인의 산문을 읽는 것이 조금은 낯뜨거울 수 있는 것처럼 소설가의 수필을 읽는 것 역시 그런 느낌이 없지는 않다. 이 책에 나온 예를 들면 음악다방의 DJ 역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뮤직박스에 앉아 있는 카리스마적 모습에서 각종 '인간적인' 모습이 연상되고, 그러면 DJ의 생명은 물론 열혈 청취자의 생명도 끝나게 된다,라는 것과 조금은 비슷하다고 할까? 게다가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면 김연수의 온갖 개인적인 일들을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 나는 더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 실린 글들은 김연수가 지금의 프로 소설가가 되기까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살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소설가이기 이전에 청춘이었고 지금도 청춘인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보여준다. 그러므로 음악다방의 DJ와는 달리 소설가로서의 생명은 물론 열혈 독자들의 생명도 꺼지기는커녕 더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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