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에 나는, <이 궁전은 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경내를 돌아보고 난 후 그러한 나의 생각을 수정했다. <이 건물을 세운 신들은 죽었다.> 그것이 가진 특성들을 살펴보고 난 후 나는 말했다. 「이것을 지은 신들은 미친 신들이다」



2.
그가 나를 쳐다보았는데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굴 입구 바닥에 엎드려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이 발육 부진의 혈거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내게는 너무도 거대한 안도의 기쁨이 몰려들었다(또는 너무도 거대하고 공포스러운 고독에 휩싸이고 말았다).



3.
나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도록 하기위해 원숭이들이 의도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게 에티오피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널리 퍼져 있는 사실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4.
불사의 존재가 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인간을 제외하고 모든 피조물들은 죽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불사의 존재들이다.



5.
그러한 판단은 아마 내가 시인들에게서 배웠던, 모든 것을 허위로 오염시키는 정황 묘사, 즉 어떤 절차에 대한 지나친 맹종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그러한 정황이란 현실에서는 풍요하게 존재할지 모르나 그것에 대한 기억에서는 그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 <죽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6.
어처구니없게도, 그에 대한 따바레스의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도록 만들었다. 아마 나는 사건들이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았었기를 바랐던 것이리라. 아주 오래전 그 늙은 다미안을 보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신화적인 운명의 주인공으로서 그를 연상했었다. 그런데 따바레스의 이야기가 그것을 산산조각 나도록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다미안이 왜 그렇게 과묵하고, 고집스레 고독을 지키며 살아갔었는지의 이유를 퍼뜩 깨닫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 했던 것은 겸손함 때문이 아니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나는 무조건 활기에 넘쳐 있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비겁한 행동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보다 미묘한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되풀이해 중얼거려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7.
보다 흥미로운 것은 울리케 폰 쿨만이 내세운 초자연적 추측이었다. 울리케가 말한 바에 다르면 뻬드로 다미안은 전투에서 죽었다. 그는 임종의 순간에 신에게 엔뜨레 리오스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다. 신은 그러한 은혜를 내려주기 전에 잠시동안 망설였다. 그 간청을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몇몇 사람들은 그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신은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과거에 대한 영상들은 바꿀 수가 있다. 신은 그의 죽어 있는 모습을 기절해 있는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고, 그 엔뜨레 리오스인의 그림자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는 돌아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림자인 그의 존재 조건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아내도, 친구들도 없이 고독 속에서 살았다.





-이상, <또 다른 죽음> 중에서





8.
비록 지옥이 우리가 거해야 하는 곳이라 할지라도 제발 천국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독일 진혼곡> 중에서





9.
첫째는, 만일 시의 목적이 읽는 자로 하여금 경이감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의 시간은 세기가 아닌 날이나 시간, 아니 아마 초로 측정되어야 할 거라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저명한 시인은 발명가라기보다는 발견자라는 것입니다. 이븐-샤라프 데 베르하를 칭송할 때 사람들은 오직 그만이 나무에서 잎사귀들이 떨어지듯 새벽의 별들이 천천히 진다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고 되풀이해 말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이미지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증명에 다름 아닐 겁니다. 단 한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미지라는 것은 그 누구의 마음도 움직일 수 없는 이미지임을 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베로에스의 추적> 중에서




10.
비야리는 기억 또는 기대 같은 것 없이 단순한 현재 속에서 살고자 했다.



-<기다림> 중에서





11.
내 눈이 보았던 것은 동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글로 옮기는 것은 연속적이다. 왜냐하면 언어의 성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알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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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혁명을 부정한 기득권 세력들은 혁명 세력의 미래에 대한 약속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도 변화를 통하여 민중에게 보다 나은 삶을 보장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등장된 것이 바로 '개혁(reform)'이라는 용어이다.
한마디로 개혁이란 용어는 보수 세력이 혁명 세력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안으로서 사용한 것이다.

2.
대한민국은 북한의 공산혁명 이론에 반대하여 수립된 국가이다. 때문에 자연히 공산혁명의 반대 세력인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정권의 핵심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즉 서구적인 분류로 보면 보수 세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3.
이처럼 정치적 갈등 속에서 상대 세력들을 비판하는 입장은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얽혀서 '수구반동' 혹은 '친북좌파'라는 무서운 정치적 낙인을 찍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보수와 진보의 합리적 갈등을 저해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즉, 경제에 있어서 성장을 강조하면 그 반대 세력에 의해 수구반동이라는 낙인찍히기 쉬운데, 이는 바로 군사 독재 체제가 대기업 육성을 통한 경제발전 정책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성장보다는 분배가 우선이라고 하면, 이는 좌파적 냄새가 난다고 하여 그 반대 세력에 의해 친북좌파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대북 정책에 있어서도 햇볕정책을 지지하면 친북좌파로, 이를 반대하고 상호주의를 강조하면 수구반동 혹은 친미종속주의자, 그리고 반통일분자로까지 매도되기도 한다. 과거의 정치적 갈등에서 빚어진 잘못된 공격적 발언에 양측 모두가 상처를 입고 있는 꼴이다. 세계화에 찬성하면 민족의 주체성을 상실한 반민족주의자 등으로 매도되기 쉬우며, 세계화를 반대하면 냉엄한 국제 질서와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자 혹은 맹목적 국수주의자 등으로 격하되어 온 측면이 적지 않았다.

4.
그리고 각 정당의 당원들은 정신분석적 입장에서 볼 때 집단의 퇴행성을 연구한 바이온(W.R. Bion)이 지적한 '종속적 집단(dependent group)'의 퇴행성을 보이고 말았다. 즉, 당원의 자아이상이 지도자와 연결됨으로써 당원의 꿈 자체가 이념이보다는 자기가 지지하는 지도자로 귀결되어 지도자에 대한 맹종만을 일삼았다. 더욱 심하게 말하면 다수의 정치인들은 지도자를 이상으로 삼은 척 하면서도 실제는 정당을 통해 지도자에게 잘 보여 자기의 정치적 출세를 도모하려는 사적 이해에만 골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의 정당 구조는 보수와 진보라는 두 개의 부류로 나뉠 수가 없었다.

5.
실제로 민주주의 제도가 앞선 서구에서도 정당 간의 차이는 매우 미비하게 되고 말았다. 프랑스 정치학자인 두베르제(Manrice Duverger)가 1964년 발표한 그의 저서 <정치의 관념(The Idea of Politics)>에서 소련이나 미국의 20년 후 국가 발전 청사진은 거의 비슷하다고 말함으로써 정치에 있어서 이념의 무의미성을 지적한 사실이 입증이라도 되듯이 현대 자유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정당 간의 이념적 구별은 어렵게 되고 더 나아가서 정책적 차별성마저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이처럼 이념과 정책의 차별성이 약화된 자리에는 감성의 정치가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중략)… 단적으로 말하면 현대 사회에 있어서 각 선거는 거의 유흥(entertainment)화 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6.
이러한 이유로 산업 사회에서 아버지의 역할 감소에 따른 어린이의 정신 발달 양상에 대한 변화의 의미가 서양 사회에서는 1950년대부터 다양하게 논의되었는데, 그 시발은 독일의 비판이론가들(혹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이었다. …(중략)…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는 산업 사회는 가정이 담당했던 교육을 위시한 여러 문제들을 국가가 대행함으로써 가족의 의미가 상실되고 아버지는 더 이상 어린이들에게 이상화(Idealization)의 대상이 되지 못하며 그 권위마저도 과학 기술 등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그는 산업 사회에 있어서 가정은 단순히 부부 간의 성적 관계를 이어주는 장소로 전락하였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들은 아버지를 이상화함으로써 그들 삶의 가치를 배우게 된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다. 즉, 아버지로부터 삶의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내향화(internalization)라고 하는데 이는 현실에 대한 비판능력을 길러준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호르크하이머는 산업 사회에서 아버지를 통한 내향화의 부재는 아버지의 권위 상실을 가져오고 결국은 권위에 저항할 줄 모르는 무기력을 길어준다고 확대 해석하고 있다.
아도르노(Theodore Adorno) 역시 호르크하이머처럼 산업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로 아버지의 권위 상실을 지적하고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들에게 좋은 의미의 자아(good ego)를 길러주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좋은 자아가 형성되지 못하면 어린아이들은 내부적으로 만족을 찾게 되는 자아도취적 현상을 일으키게 됨으로써 현실적 독립성을 잃게 되고 결국은 외부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파시즘이나 나치즘의 출현을 가능케 한 원인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비판이론가를 떠나서 정신분석학자들 사이에서도 산업 사회에서 가족 구조의 변화가 가져오는 어린아이들의 정서 변화는 다양하게 논의되어 오고 있다. 앞서 지적한 <아버지 없는 사회>를 저술한 미처리히는 산업 사회에 있어서 아버지의 권위 상실은 물론 어머니의 역할 감소까지를 논함으로써 어린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어떠한 상징적 현실의 의미를 배우지 못하고 익명의 기능(anonymous function)에 의하여 움직여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학자로 출발하여 정신분석 이론으로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크리스토퍼 래시(Christopher Lasch)는 1970년대 말 <자아도취적 문화(Culture of Narcissism)>라는 책을 써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의 아버지 권위의 상실에 대한 견해는 위의 비판이론가들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권위의 상실은 옳고 그름의 판단 의식까지를 앗아감으로써 사회 전체의 권위 상실까지를 초래하였다고 보고 있다. 사회적 권위가 상실되면 정부도 국민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국민들도 국가 혹은 사회적인 선이 무엇인가라는 고민보다는 그저 오늘 하루를 어떻게 하면 즐겁게 보낼 수 있는가에만 신경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래시는 현대 사회를 건전한 권위마저 사라진 자기도취주의적 사회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7. 
비판이론가들은 아버지의 권위는 어린아이들에게 비판 정신을 함양해 준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동양의 예를 보면 전통 사회에서 아버지의 엄격한 권위는 오히려 어린아이들에게 아버지의 권위에 절대 순종하는 행동을 배우게 하였고 오히려 비판 정신을 앗아가는 현상을 보인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권위가 비판 정신을 증진시킨다는 비판이론가들의 분석은 적어도 동양 사회에서는 적용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8.
따라서 서양철학에 있어서는 선의 의미가 완전히 개인적인 문제로 설명된다. 그런데 동양에서 선의 의미는 인간관계에서 형성된다. 유교의 최고 덕목인 삼강오륜도 따지고 보면 전부 자신과 남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도 '우리'를 강조한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마르크스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왜 공산혁명이 마르크스 예언대로 당시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된 미국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지 않고 동양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러시아에서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혁명이 동으로 이동하여 중국과 한국으로 번지게 되었는지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9.
더불어 다양한 시민단체들의 출현으로 인하여 정당의 역할이 감소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오히려 정당의 이념적 구별이 아닌 정당의 새로운 역할, 혹은 본질적으로 현대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정당 정치의 위기를 논하는 것이 보다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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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것은 좋은 이상일지는 모르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돈을 벌어야 한다”라든가, “싫어도 직업이기 때문에 별 도리가 없다”등등, 우리가 흔히 듣는 이와 같은 상투적인 말들은 “소득으로 이어지는 것만이 현실성이 있다”라는, 경제발전론의 발상이다.
…(중략)…
의학용어를 빌려 말하면, 경제발전론은 현대사회 속의 사고장해(思考障害)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사람의 사고력을 억압하는 힘을 갖고 있다.



2.
여기에 있는 건 1999년 9월 22일자 영자신문 <저팬타임스>입니다. 이 신문 4페이지에 유엔환경계획이 나이로비에서 회의를 열어서 <지구환경전망 2000>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850명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2년 반에 걸쳐 만들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보고서에는 현재의 지구환경이 어느 만큼 위기적 상황에 있는지가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선진공업국들의 자원 소비를 90% 감소시킬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10%를 줄여서 90%로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90%를 줄여야 한다는 제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래 세대는 큰 생명의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라는 것이 보고서의 결론입니다.
다음 페이지는 경제면. 바로 5페이지에 “일본경제는 불경기로부터 조금 부활하기 시작하였다.”라는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99년 8월의 기업체의 전력 소비량이 98년보다 2.6%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소식’으로서 기사화되어 있습니다. 좋다, 전력 소비량이 증가하고 있으니까 경제는 회복중이라는 것입니다.
4페이지에 나와있는 것과 같은 기사는 진부할 만큼 이미 모두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얘기라고 하더라도, 이 경제면에는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경제면을 읽는 사람들에게 바로 옆 국제면의 기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3.
선장 에이하브는 일찍이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흰 고래를 찾아 온 세계를 헤맵니다. 선장은 자신의 광기를 자각하고 있고, 일등항해사에게 그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방법은 모두 정상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이다. 목적만이 광적인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4.
일본사회에서는 도시나 마을에 핵무기를 투하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어떻든 비상식적인, 정상이 아니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게 좋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이상,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면 국가 원수가 되기에는 부적합한 것입니다.
몇 년인가 전에 제랄딘 페라로라는 여성이 미국 부통령 후보로 선거에 나왔는데, “만일 전쟁이 시작되면 여성으로서 핵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라고 기자회견에서 집요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할 수 있지요”라고 강한 목소리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답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라는 대답으로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5.
그러므로 경제발전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적 성질은 불투명하여 알아채기 매우 어렵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 혹은 객관적인 필요성이라는 식으로 경제발전을 생각해왔던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거꾸로 그만큼 이데올로기로서 성공했다, 사상으로서 패권을 쥐고 있었다는 실증이기도 합니다.



6.
물론 분류법이란 어느 것이나 나름대로 기준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나 좋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도움이 되는 분류와 도움이 되지 않는 분류가 있습니다. 하려고만 하면 세계 인구를 ‘나’와 ‘남’이라는 두 범주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나 이외의 세계 사람들에게는 모두 내가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의 정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분류방법입니다. 포유류를 모두 ‘토끼’와 ‘비(非)토끼’로 나누면 고래와 코끼리와 개가 한 범주에 들어갑니다.
이 방식은 유럽에서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실행해온 분류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와 이교도라는 분류방법이 그렇습니다. 기독교와 그 이외. 그 이외 속에서는 이슬람교도 불교도 힌두교도 샤머니즘도 전부 들어있습니다. 이들 각 ‘이교도’간에 무슨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리가 없는데도, 기독교에서 보면 모두 잘못돼 있기 때문에 같은 범주에 들어간다고 하는 식입니다.



7.
유럽인이 각지에서 식민지를 만들던 단계, 특히 제일 처음 단계에서는 임금노동을 하려고 하는 현지인들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돈을 줄 테니 여덟 시간 일하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들은 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혹은 하루 일하고, 하루분의 돈을 받고, 유럽인이 만든 가게에 가서 받은 돈으로 무엇인가를 사고, 그 다음날에는 더 이상 오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이미 돈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매일 여덟 시간이나 열 시간씩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8.
‘발전도상국’ 혹은 ‘미개발 국가’라는 말은 ‘광석’처럼 바깥으로부터 목적이 주어져 있습니다.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이야 어떻든 ‘목적’을 달성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불가사의한 말이 발전입니다.



9.
그리고 예를 들어 슬럼 사진을 본다거나 실제로 보러 가면 “이것은 아직 발전이 돼있지 않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실제로 ‘남(南)’의 국가의 슬럼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만, 그 대부분은 신축입니다. 슬럼에서는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있는 곳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매우 근대적인, ‘발전된’ 건축재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블록이라든가 플라스틱이라든가 베니어판 등, 주로 주워온 것이 많을지는 몰라도 첨단기술로 만든 건축재료가 많습니다. 슬럼이란 근대건축입니다. 슬럼은 현대건축으로, 옛날에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포스트모던 슬럼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여튼 슬럼이란 경제발전의 결과로서 나타난 건축 스타일입니다.
근대건축을 보려고 한다면, 거의 모든 ‘남’의 국가의 경우, 고층빌딩과 슬럼을 함께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슬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 대다수는 고층빌딩 안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청소부라든가 창문닦이라든가 부자의 하인이라든가, 모두 세계경제 시스템의 톱니바퀴 속에 완전히 들어가 있습니다.
경제발전이란 ‘슬럼세계’를 ‘고층빌딩의 세계’로 조금씩 변신시키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이자 속임수입니다. 경제발전의 과정에 따라 예전에 있었던 다양한 사회가 ‘고층빌딩과 슬럼의 세계’로 바뀐 것이 20세기의 역사적 사실입니다.
…(중략)…
제3세계 또는 ‘남’의 국가는 ‘발전되어’ 있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발전되어’ 그렇게 됐습니다. 발전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 아니라 발전되어 있기 때문에, 가난한 생활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옳습니다. 가난하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이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세계경제 시스템의 톱니바퀴에 완벽하게 물려있다, 그런 의미입니다.



10.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말 또한 생각해보면 불가사의한 말입니다. 그걸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어느 정도 강하냐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장이 마이너스라는 것은 괴상한 말입니다. 사람이 줄어드는 것을 “마이너스로 늘어나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지요. 달리 말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성장이라 말할 정도면 높아졌다는 의미일 것이 틀림없는데, “마이너스로 높아지다”라는 말은 오웰이 그려보인 <1984년>의 세계의 언어일 것입니다.



11.
빈부의 차이란 경제발전에 따라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는 정의(正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의 입장에서 보면, 빈부의 차이가 나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경제학의 용어가 아닙니다. 경제학 공부에서는 정의라는 말을 배우지 않습니다. 빈부의 차이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은커녕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12.
물론 이것은 실업자나 집이 없어 떠도는 사람, 빈민의 증가를 막는 노력을 포기하자는 게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 문제의 진짜 해법을 찾자는 뜻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경제적인 해결이 아니라 정치적인 해결입니다. 요컨대, 성장이 아니라 분배입니다.



13.
파이란 물론 파이 모양의 그래프에서 나온 비유입니다. 하지만 우연히 그것은 미국 사람들이 즐겨먹는 식품이기도 합니다. ‘남(南)’의 국가에서 미국의 파이를 먹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므로, 이 비유만으로도 누군가가 무시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떻든 그런 식으로 계속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파이 조각의 크기를 고르게 하는 게 아니라 파이 전체를 크게 만든다.



14.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사람은 겁을 먹거나 화를 냅니다. 그런 경험을 자주 겪습니다. 가난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인가, 이것은 새로운 금욕주의가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는 절제의 윤리라고 할까 절약의 윤리를 유지해온 문화의 예는 꽤 있습니다. 경제발전 이전의 문화는 거의 그런 윤리를 유지해왔다고 해도 좋습니다. 절약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문화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회가 어느정도 풍요를 실현하고 나서, 자발적으로 그 풍요를 줄인다, 그런 결정을 한다는 것은 역사상 그다지 선례가 없었습니다. 편한 생활에서 힘든 생활로 의도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역사 속에서 찾으면 있을지 모르지만, 있었다고 해도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는 지금 우리 상황까지 간 사회도 없었다, 즉 이 정도의 환경위기에 직면한 그런 사회도 선례가 없다는 것입니다. 해결에 선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문제에도 선례가 없습니다.



15.
물론, 이것은 자유시간을 ‘돈으로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풍요의 기준을 돈에서 시간(여가)으로 바꾼다는 뜻입니다.
…(중략)…
혹은 다르게 표현하면 돈의 교환과 무관한 시간. 돈을 벌고 있는 시간도 아니고, 물건을 사는 시간도 아닙니다. 돈과 관계가 없는 이 귀중한 시간이 현대사회 속에는 매우 부족합니다.



16.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런 예를 드는 것은 이것으로 괜찮다, 이제 정부에 맡겨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과 조금도 변함없이 정부와 관료, 그리고 기업 경영자, 그들을 위해 연구하고 있는 경제학자, 이른바 ‘현실주의자’들은 이 문제, 이 상황을 마침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최후의 인간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아래로부터 압력이 없으면 그들이 바뀔 가능성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17.
그런데, 정치학 교과서, 또는 민주주의는 무엇인가라는 데 관해서 씌어진 보통의 교과서를 펴보면, 반드시 서론이나 제1장에 이러한 대목이 있습니다.
예전에 고대 그리스에는 직접 민주주의가 있었다. 그러나 근대, 현대사회에서는 그것은 적합하지 않다, 불가능하다, 이상. 이러한 간단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어째서 직접 민주주의가 지금은 불가능하다고 하느냐 하면 지금의 국가는 크고 복잡하다든지, 지금의 경제시스템은 이해하기 어렵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어떻든 직접 민주주의는 논외라는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통 민주주의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대의 민주주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민주주의에 관한 책이 많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빠른 결론입니다. 민주주의에 대해 공부하려고 하는데,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니까 다른 것을 공부하라고 하는 셈입니다. 정말 불가사의하다고 할까, 의외라는 느낌을 줍니다.
언제부터 대의제를 민주주의라고 일컫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와 같이, 고대 그리스에서는 선거에서 대표를 뽑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선거는 귀족제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거를 하면 가장 유명한 사람, 가장 돈이 많은 사람, 가장 사회에서 눈에 뜨이는 사람이 뽑히게 되므로, 그것은 귀족이라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에서 만약 대표를 뽑는다고 한다면, 즉 민주적으로 대표를 뽑는다면, 그것은 제비뽑기라야 합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제비로 뽑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눈에 뜨이는 사람, 돈이 많은 사람, 유명한 사람이 선출되는 게 아니라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선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것이 민주적인가. 몇 가지 측면이 있지만, 하나는 시민이라면 전원이 대표가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고, 그래서 누구라도 시민이라면 대표를 맡아야 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 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언제든 자기 차례가 될지 모르니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또하나, 그런 식으로 제비뽑기로 뽑힌 사람은 뽑혔다는 것에 대하여 뻐길 이유가 없습니다.



18.
우리는 물론 이런 논리를 비판합니다. 근대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노예제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대학에서 가르치면 모두가 분노합니다. 아니, 노예제 옹호가 아닌가, 그것은 엉터리 민주주의다, 라고 심히 엄격히 비판합니다. 그것은 물론 올바른 비판입니다. 그러나, 노예란 여가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사회는 어떠한가, 하고 물어보게 됩니다. 근무시간 이외에 거의 틈이 없는 상태가 일상이 되어있다면, 우리는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노예의 범주에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19.
이것은 “보지도, 말하지도, 듣지도 못한다”의 현대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 이외에도 큰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보더라도 보지 못하고, 알고도 말하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20.
취직하면 직장에서 여러 문제에 직면합니다. 예를 들면, 많은 일터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직장에서 언론의 자유가 이토록 심히 억눌려 있다는 현상은, 거꾸로, ‘직장 내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 것인지(두려운 것인지)를 반증합니다.
…(중략)…
또 하나 우리가 갖는 경제적 역할은 소비자로서의 역할입니다. 히스테리에 가까운 선전이나 상업광고를 보고 있으면, 소비자가 물건을 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기업에게는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가 잘 이해됩니다.



21.
그러나, 지금 주류 문화는 완전히 이 정치경제 시스템 속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문화에 의해서 인간사회에 있는 다양한 것의 ‘가치’가 결정되지만, 지금의 소비문화 속에서는 금전적인 가치가 없는 것은 가치가 없다, 라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감도 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경제의 교환가치 이외의 본래적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감성과 미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가 부활한다면, 시장경제가 우리들에 대해서 갖고 있는 지배력은 많이 약화될 것입니다.



22.
그와 같이 맑스가 말하고 있는 하부구조는 경제제도입니다만, 경제제도 바깥에는 역시 자연환경이 있습니다.
경제제도, 즉 생산수단, 생산의 제관계는 절대적, 근원적으로 환경에 종속돼 있습니다. 환경이 바뀌면 경제제도의 하부구조는 틀림없이 바뀝니다. 환경이 파괴되면 경제제도도 파괴됩니다.



23.
현재의 사회에서는 소비의 상식에 따르면, 자연파괴로 이어지고, 위엄있는 생활을 하는 것도 어렵다. 오늘의 노동에 관한 (회사에 관한) 상식에 따르면, 과로사 통계에 이바지하게 되고, 민주주의 정신은 훼손된다. 그리고, 주류의 정치상식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더욱더 멀어지고, 전쟁은 자꾸만 더 가까이 다가온다.



24.
미국인은 사물을 이해할 때, 아주 한정된 카테고리밖에 갖고 있지 않다. 기독교 전통으로부터는 ‘죄’라는 것을, 그리고 실용주의 전통으로부터는 ‘행동’을 배워서 알고 있다. 노인에 대한 질문 가운데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죄가 있다고 느끼기를 바라는가라고 그에게 물었다. “아니오”라고 조 워싱턴은 대답했다. “여러분은 이미 그 죄를 돌이킬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도움을 바랍니까”라고 학생들은 되풀이하여 물었다. “아니오.” 그는 어렴풋이 측은한 심정을 나타내며 말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략)…
“50년 후 라미 인디언은 어떠한 모습이 되어있을 걸로 생각하십니까?” 이번 대답은 더욱 솔직했다. “50년 후에는 한사람의 라미 인디언도 남아있지 않겠지요.”
여기에도, 유죄선고를 하든, 어떠한 일을 하든, 보상할 수 없는 한 인간집단의 소멸을 이해할 수 있는 사고범주가 미국인의 이데올로기 속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나도 조 워싱턴을 오해하였을지 모르나 단지 그는 하나의 단순한 사실을 학생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랐다고 내게는 생각되었다. 그 사실이란, 그의 전 생애를 지배해왔던 사실, 즉 수천년에 걸쳐 발달해온 더없이 귀중한 성스러운 것이 백인문명의 침입으로 지상에서 말살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또한 일단 소멸하면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노력을 해도 재건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인 학생들은 아까도 말하였듯이 상대적으로 호의적이며 지성을 가진 청중이었다. 그런 그들이 조 워싱턴이 말하려고 했던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은 미국인이 자신들의 역사의 의미, 그리고 오늘날 놓여 있는 역사적 상황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굉장한 어려움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나라의 발전이 가공할 범죄를 초래하여, 벌써 한계적 상황에 이르렀음을 알아차린 미국인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찌하여 그들과 같은 국민이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의 동기를 헤아려보아도 결백하다고밖에 느끼지 못한다. 선조들이 그렇게 자신과 다른 인간일 수 있을까. 범죄가 이루어졌다고 하면 착오에 의한 것이 틀림없다. 사죄하고 재정적 원조를 베푸는 것 이외의 방법은 없는 게 아닐까. 인디언이 오래된 문화를 잃어가고 있을지라도 무언가 반대급부를 얻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위대한 민주주의 헌법을 가진 미국은 자유를 원하는 모든 인간에게 그것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문제의 복잡성을 드러내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해답으로 제안된 ‘자유(liberty)'야말로 (적어도 미국인의 이데올로기가 정의하는 의미에서는) 문제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중략)…
합중국에는 여지껏 한번도 귀족, 혹은 소작농 계급이 있은 적이 없고, 프롤레타리아는 생산하였으나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지는 못했다. 미국을 통틀어서, 부자에게도 가난뱅이에게도 합중국은 자유주의의 나라인 것이다.
이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유럽에서와 같은 역사적 중압, 완전히 계층화된 사회조직, 교회와 귀족의 지배 등의 요소들이 면제된 새로운 세계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져왔다. 여기에서 자유주의는 자연과 직접 싸우게 되었다. 자유주의의 성격을 시험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있겠는가.



25.
토크빌이 묘사한 ‘미지의 인간’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외의 모든 재능을 희생시키면서, 부에 대한 집착, 확장하는 자유를 수용하고 스스로를 정복의 도구로 개조한 인간인 것이다. 동시에 이 인간이야말로 미국인이 지닌 자유(liberty)의 개념에 꼭 들어맞는 모델이며 오늘날에 와서조차 이 나라의 민화(民話)에서 로맨틱한 인간, 칭찬받아야 할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다른 관점에서 말하면 미국인의 해방(liberation)의 관념은 소외와 구별하기 어렵다.



26.
토크빌이 쓴 가장 강력하고 신랄한 문장의 하나에서 그는 이것을 스페인인의 방식과 대비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들짐승을 대하는 것처럼 경찰견을 부려 인디언을 추적하였다. 그들은 신천지를, 강습(强襲)으로 함락된 도시와 같이 아무런 분별도 자비심도 없이 약탈하였다. 그러나 파괴는 언젠가는 종말을 고하지 않으면 안되며, 광란적인 행태에도 한계가 있다. 대학살을 피하여 살아남은 인디언 종족은 정복자들과 교류하여 이윽고 정복자들의 종교와 생활양식을 받아들였다. 이에 반대 원주민에 대한 연방 미국인들의 행동은 법률상의 정식 절차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스페인인들은 비할 수 없이 잔학무도한 짓을 저질러 자신들의 이름을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더럽혔으나 그럼에도 인디언 종족을 절멸하지는 못했으며 인디언의 여러 권리를 박탈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합중국의 미국인들은 이 두 가지 목적을 아주 훌륭한 솜씨로 평온하게 합법적으로, 박애주의적으로, 피를 흘리는 일도 없이, 또한 세계의 이목 앞에서 도덕의 원칙을 깨트림 없이 완수했던 것이다. 인도(人道)의 법칙을 이 이상 존중하면서 인간을 파멸시키기란 불가능하다.
-<미국의 민주주의>


 
말할 것도 없이, 토크빌은 19세기 후반의 저 장렬한 인디언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것을 쓰고 있다.
…(중략)…
스페인식의 정복은 문명인으로서의 행위에 확실히 어긋나고, 모든 사람의 눈에 의심의 여지가 없이 잔혹하며, 따라서 무한히 지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국인의 정복은 광란(狂亂)도 없고 언제나 합법적인 정치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수행되어, 실질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특히 미국인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형태로 이루어졌다. 미국의 확장주의가 가진 이 ‘합법성’, 불가시성, 제도적 본질은 그들의 확장에는 어떠한 한계도 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또한 미국인 자신이 역사상의 잔해(殘骸)를 보고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 ‘내가’ 무언가 나쁜 짓을 했단 말입니까”라고 순진하게 묻는 기이한 ‘무지’에 대한 설명도 된다.



27.
나는 곧 ESS 반원들이 미국인과 유럽인들에게 보이는 추종적 태도가 그저 외국 손님들에 대한 우애의 표시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같은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별난 족속으로 대하는 태도를 결코 우애의 표시로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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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편 우리나라 노비에게는 성(姓)은 없고 이름만 있는 반면, 서양 노예는 성이 있었다. 왜 그럴까? 그 차이의 비밀은 '체면'과 '실리'라는 상반된 가치관에 있었다. 다시 말해 체면을 중시하던 우리나라에서는 성을 매우 명예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노비에게 성을 준다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반면 실용주의 사고가 만연한 서양에서는 노예를 매매할 때 산지를 증명하기 편리하도록 성을 주었던 것이다.


2.
늑대인간과 구미호를 비교해보면 밤에만 활동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몇 가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늑대인간은 남자가 늑대로 변한 다음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반면, 구미호는 여우가 미녀 모습으로 변한 다음 남자들을 홀린다. 이것은 야수에 대한 공포감은 똑같지만 서구인들은 야수 그 자체를 두려워하고, 한국인들은 인간의 교활함을 두려워한다는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늑대인간은 타인을 늑대인간으로 만드는 전염성 질병을 퍼뜨리는 반면, 구미호는 전염성은 없으나 사람을 죽이거나 또는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여기서 늑대인간의 전염성은 해괴한 현상이라도 질병 차원으로 해석하는 서구인의 관념을 보여주고, 구미호의 살인 또는 섹스 욕구는 처녀 귀신의 원한과 관계가 있어 맺힌 한(恨)을 결코 잊지 못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셋째, 늑대인간은 보름달이 뜰 때만 활동하지만 구미호는 달빛이 희미한 밤에 활동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보름달'은 서구인의 과학과 연계된 자연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실제로 보름달이 뜰 때 범죄율이 높다고 한다. 반면 한국의 어스름한 달빛 또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은 심정적으로 두려운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3.
그런데 서양인은 사진을 찍을 때도 "three, two, one"으로 큰 수부터 말하는데, 이는 출발 자체에 중점을 둔 관념에서 비롯된 습관이다. 이에 비해 한국인은 "하나, 둘, 셋"이라고 점차 큰 수를 말한다. 이는 자연적 스름에 맞춰 그 순간을 택하는 정서에거 비롯된 습관이다. 한마디로 '카운트다운'은 일 중심의 사고이고, '하나 둘 셋'은 자연 중심의 사고인 셈이다.


4.
여러 나라를 살펴보면 묘하게도 문명이 발달하고 개인주의 문화가 팽배할수록 편견과 경계심이 강함을 발견할 수 있다. 공동체 사회에서는 어울려야 하는 일이 많으므로 사회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많은 데 비해,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그런 상황이 적어 대부분 자기 주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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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신의 사진이 불만스럽다면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버트 카파를 비롯한 많은 사진의 대가들이 한결같이 얘기하는 사진의 원칙이다. 초보자들뿐 아니라 몇 년씩 사진을 찍은 사람들도 인물을 찍을 때는 가까이 가지 못한다. 겁을 내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데 가까이 가도 될까, 나(카메라)를 두려워하지 않을까" 걱정하다 보니 앞으로 나서는 것이 힘들다. 두 번째 이유는 전체를 담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다. 어차피 사진은 전체를 보여주지 못한다. 가까이 갈수록 필요한 것이 잘 보이고 크게 보인다.



2.
찍히는 사람의 예의

미국에서 사진공부를 할 때, 길에서 모르는 사람 10명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 얼굴을 찍으라는 과제가 있었다. 미국에서 난 기자가 아닌 학생이었다. 명함도 없고 얼굴색도 다른 동양인이었을 뿐인데도 대부분 흔쾌히 시간을 내줬다. 우리는 거리에서 사진 찍힐 때 너무 경직되어 있다. 낯선 사람이 다가와서 사진 찍겠다고 부탁하면 관대하게 응해 주자. 내가 응해 줘야 나도 찍을 수 있다.내 모습이 담긴 사진이 공모전에 출품되어 상을 받았다고 기분 나쁠 일이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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