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에 혁명을 부정한 기득권 세력들은 혁명 세력의 미래에 대한 약속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도 변화를 통하여 민중에게 보다 나은 삶을 보장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등장된 것이 바로 '개혁(reform)'이라는 용어이다.
한마디로 개혁이란 용어는 보수 세력이 혁명 세력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안으로서 사용한 것이다.

2.
대한민국은 북한의 공산혁명 이론에 반대하여 수립된 국가이다. 때문에 자연히 공산혁명의 반대 세력인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정권의 핵심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즉 서구적인 분류로 보면 보수 세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3.
이처럼 정치적 갈등 속에서 상대 세력들을 비판하는 입장은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얽혀서 '수구반동' 혹은 '친북좌파'라는 무서운 정치적 낙인을 찍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보수와 진보의 합리적 갈등을 저해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즉, 경제에 있어서 성장을 강조하면 그 반대 세력에 의해 수구반동이라는 낙인찍히기 쉬운데, 이는 바로 군사 독재 체제가 대기업 육성을 통한 경제발전 정책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성장보다는 분배가 우선이라고 하면, 이는 좌파적 냄새가 난다고 하여 그 반대 세력에 의해 친북좌파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대북 정책에 있어서도 햇볕정책을 지지하면 친북좌파로, 이를 반대하고 상호주의를 강조하면 수구반동 혹은 친미종속주의자, 그리고 반통일분자로까지 매도되기도 한다. 과거의 정치적 갈등에서 빚어진 잘못된 공격적 발언에 양측 모두가 상처를 입고 있는 꼴이다. 세계화에 찬성하면 민족의 주체성을 상실한 반민족주의자 등으로 매도되기 쉬우며, 세계화를 반대하면 냉엄한 국제 질서와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자 혹은 맹목적 국수주의자 등으로 격하되어 온 측면이 적지 않았다.

4.
그리고 각 정당의 당원들은 정신분석적 입장에서 볼 때 집단의 퇴행성을 연구한 바이온(W.R. Bion)이 지적한 '종속적 집단(dependent group)'의 퇴행성을 보이고 말았다. 즉, 당원의 자아이상이 지도자와 연결됨으로써 당원의 꿈 자체가 이념이보다는 자기가 지지하는 지도자로 귀결되어 지도자에 대한 맹종만을 일삼았다. 더욱 심하게 말하면 다수의 정치인들은 지도자를 이상으로 삼은 척 하면서도 실제는 정당을 통해 지도자에게 잘 보여 자기의 정치적 출세를 도모하려는 사적 이해에만 골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의 정당 구조는 보수와 진보라는 두 개의 부류로 나뉠 수가 없었다.

5.
실제로 민주주의 제도가 앞선 서구에서도 정당 간의 차이는 매우 미비하게 되고 말았다. 프랑스 정치학자인 두베르제(Manrice Duverger)가 1964년 발표한 그의 저서 <정치의 관념(The Idea of Politics)>에서 소련이나 미국의 20년 후 국가 발전 청사진은 거의 비슷하다고 말함으로써 정치에 있어서 이념의 무의미성을 지적한 사실이 입증이라도 되듯이 현대 자유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정당 간의 이념적 구별은 어렵게 되고 더 나아가서 정책적 차별성마저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이처럼 이념과 정책의 차별성이 약화된 자리에는 감성의 정치가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중략)… 단적으로 말하면 현대 사회에 있어서 각 선거는 거의 유흥(entertainment)화 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6.
이러한 이유로 산업 사회에서 아버지의 역할 감소에 따른 어린이의 정신 발달 양상에 대한 변화의 의미가 서양 사회에서는 1950년대부터 다양하게 논의되었는데, 그 시발은 독일의 비판이론가들(혹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이었다. …(중략)…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는 산업 사회는 가정이 담당했던 교육을 위시한 여러 문제들을 국가가 대행함으로써 가족의 의미가 상실되고 아버지는 더 이상 어린이들에게 이상화(Idealization)의 대상이 되지 못하며 그 권위마저도 과학 기술 등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그는 산업 사회에 있어서 가정은 단순히 부부 간의 성적 관계를 이어주는 장소로 전락하였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들은 아버지를 이상화함으로써 그들 삶의 가치를 배우게 된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다. 즉, 아버지로부터 삶의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내향화(internalization)라고 하는데 이는 현실에 대한 비판능력을 길러준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호르크하이머는 산업 사회에서 아버지를 통한 내향화의 부재는 아버지의 권위 상실을 가져오고 결국은 권위에 저항할 줄 모르는 무기력을 길어준다고 확대 해석하고 있다.
아도르노(Theodore Adorno) 역시 호르크하이머처럼 산업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로 아버지의 권위 상실을 지적하고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들에게 좋은 의미의 자아(good ego)를 길러주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좋은 자아가 형성되지 못하면 어린아이들은 내부적으로 만족을 찾게 되는 자아도취적 현상을 일으키게 됨으로써 현실적 독립성을 잃게 되고 결국은 외부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파시즘이나 나치즘의 출현을 가능케 한 원인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비판이론가를 떠나서 정신분석학자들 사이에서도 산업 사회에서 가족 구조의 변화가 가져오는 어린아이들의 정서 변화는 다양하게 논의되어 오고 있다. 앞서 지적한 <아버지 없는 사회>를 저술한 미처리히는 산업 사회에 있어서 아버지의 권위 상실은 물론 어머니의 역할 감소까지를 논함으로써 어린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어떠한 상징적 현실의 의미를 배우지 못하고 익명의 기능(anonymous function)에 의하여 움직여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학자로 출발하여 정신분석 이론으로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크리스토퍼 래시(Christopher Lasch)는 1970년대 말 <자아도취적 문화(Culture of Narcissism)>라는 책을 써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의 아버지 권위의 상실에 대한 견해는 위의 비판이론가들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권위의 상실은 옳고 그름의 판단 의식까지를 앗아감으로써 사회 전체의 권위 상실까지를 초래하였다고 보고 있다. 사회적 권위가 상실되면 정부도 국민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국민들도 국가 혹은 사회적인 선이 무엇인가라는 고민보다는 그저 오늘 하루를 어떻게 하면 즐겁게 보낼 수 있는가에만 신경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래시는 현대 사회를 건전한 권위마저 사라진 자기도취주의적 사회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7. 
비판이론가들은 아버지의 권위는 어린아이들에게 비판 정신을 함양해 준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동양의 예를 보면 전통 사회에서 아버지의 엄격한 권위는 오히려 어린아이들에게 아버지의 권위에 절대 순종하는 행동을 배우게 하였고 오히려 비판 정신을 앗아가는 현상을 보인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권위가 비판 정신을 증진시킨다는 비판이론가들의 분석은 적어도 동양 사회에서는 적용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8.
따라서 서양철학에 있어서는 선의 의미가 완전히 개인적인 문제로 설명된다. 그런데 동양에서 선의 의미는 인간관계에서 형성된다. 유교의 최고 덕목인 삼강오륜도 따지고 보면 전부 자신과 남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도 '우리'를 강조한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마르크스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왜 공산혁명이 마르크스 예언대로 당시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된 미국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지 않고 동양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러시아에서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혁명이 동으로 이동하여 중국과 한국으로 번지게 되었는지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9.
더불어 다양한 시민단체들의 출현으로 인하여 정당의 역할이 감소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오히려 정당의 이념적 구별이 아닌 정당의 새로운 역할, 혹은 본질적으로 현대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정당 정치의 위기를 논하는 것이 보다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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