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탐욕스러운 사람을 조종하기란 인형 극장의 어린 관객들을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손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제때에 간파한 저 선택된 사람들에 대해 나는 진정으로 경탄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라고 썼던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고등 사기꾼과 익살꾼은 거의 같은 직업이라고 볼 수 있다.

 




2.

그들이 자신의 손이나 아니면 발로 만들어 낸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예술작품 옆에 서 있을 때, 그들의 눈에 빛나는 메시아적 사명 의식에는 우리도 덩달아 감명을 받게 마련이다.

 




3.

그러나 이제 우리는 거장 중의 거장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때이다. 세기적인 작품, <브릴로 상자들>을 최초로 창조한 사람에게는 무릎을 꿇는 것 말고는 달리 경의를 표할 방법이 없다. 이 ‘브릴로 상자들’은 한 만능 천재가 이웃 약국에서 손수 구입한 것인데, 그가 바로 미국의 위대한 구매자이자 화가인 앤디 워홀이다.

…(중략)…

허나 명명백백한 사실은, ‘존재의 예정된 조화’와 같은 표현들이나, 아니면 휘황찬란한 카탈로그 속에 인쇄된 이 명작들에 대한 모든 것은 순전히 유머로만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겁에 질린 관람객들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키고, 그렇게 되면 어리둥절해진 관객은 아예 침묵하거나 아니면 다른 멍청한 사람들처럼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한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러한 작품들이 지닌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오락적 가치를 인식한다면, 그 작품들을 진정으로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4.

누구 한 사람이라도 그 작품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던가? 나는 그런 웃음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5.

그러나 여기에는 작지만 아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동네 슈퍼에서 할인 가격으로 살 수 있는 토마토 깡통을 전시한 게 아니라, 시각적인 정확성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필치와 기법을 개발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법을 쓰면서도 그들은 동시에 진실이나 아니면 인간 및 자연의 본질적인 것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6.

그렇지만 이와 같은 장난이 음반을 통한 현대음악에서 제대로 관철될 수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분명 음악은 단지 그것이 재현되는 동안만 음악으로서 존재하지, 투자 가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중략)…

그러나 소위 현대예술이라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더욱더 서먹서먹하게 만든다. 현대예술은 대부분의 사람은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사유재산처럼 애지중지하는 이른바 진보적 엘리트에게는 일종의 특권이다.

우리가 꼭 레닌의 열렬한 추종자는 아니더라도 ‘예술작품은 본래 다수의 인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라는 레닌의 말에는 동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레닌 말의 강조점은 바로 ‘다수’에 있다. 적어도 나는 지금까지 자신의 피아노 조율사를 위해 교향곡을 지었다는 작곡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오직 자신의 이발사 한 사람만을 위해 자서전을 썼다는 작가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현대미술 작품은 전적으로 두 종류의 사람들, 즉 미술 비평가와 미술 장사꾼들을 위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7.

현대미술에 대한 나의 경멸감에 분명히 동조하는 비평가들의 평론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고, 또 그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예술에 관한 진실에 대해 써주기를 학수고대했지만 그 기다림은 헛된 것이었다. 행간 사이에서는 못마땅하다는 투의 목소리를 읽을 수 있었지만, 큰소리가 판을 치는 우리 시대에 과연 누가 그런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예술사가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나는 어네스트 H. 곰브리치를 들겠다. 나는 만족감과 존경심을 가지고 그의 저서를 읽고 있다. 그러나 그 또한 너무 점잖고 너무 배려하는 것이 많다. 쿠르트 슈비터스와 같은 영리한 모더니즘 화가가 “나는 예술가이다. 그러므로 내가 침을 뱉기만 해도, 그것은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선언했을 때, 85세의 이 노학자는 그러한 발언에 차분히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예술이 단지 인간 개성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는 공감하지 않는다.”

만약 곰브리치 교수에게 끝내 그의 솔직한 견해를 피력하도록 압력이 가해진다면, 기껏해야 그는 요셉 보이스와 그의 익살을 두고 이렇게는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를 평가하지 않는다.”

 




8.

그렇다. 한 폭의 그림을 바라보면서 미적인 만족을 느낄 수 있었던 그러한 시대는 완전히 지나가 버렸다.

그 사이 그림은 그것에 딸린 부수적인 텍스트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미리 20여 쪽에 이르는 팸플릿을 공부하지 않고는 전시회의 그림을 이해할 수 없다. 이제는 그림 자체가 사이비 철학을 설명하는 삽화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유명한 작가이자 미술 연구가이기도 한 탐 울프가 이제부터는 그림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는 해설을 확대해서 걸자는 제안을 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니면-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제안이지만-벽에 단지 가격표만을 걸어 놓는 게 어떨는지.

 




9.

납세자들의 돈을 가지고 자신들의 예술 지식을 입증하고자 하는 고등동물의 저 불타는 욕구를 설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모든 관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파킨슨 교수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베스트셀러인 <낭비의 법칙>에서 이러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정의내리고 있다.

 

잘 알다시피, 지출이란 항상 수입의 한계선까지 올라간다. 이것이 개인의 가계뿐만 아니라 공공 재정에 있어서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징세 수입이 많더라도, 그 수입을 모두 써버리거나 더 많이 지출을 하고 싶은 간절한 욕구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 정부는 개인과 차이가 난다. 즉 정부는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는 경우가 매우 드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세상은, 수억 단위의 돈은 감도 잡지 못하면서 수천 단위의 액수에 대해서는 잘 훈련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의 위원회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수억 단위의 프로젝트는 몇 분 안에 가결하면서 사무실에서 소비하는 커피 값을 두고는 몇 시간 동안이나 논쟁을 벌이는 것이다.


 



10.

편지를 보낸 독자들의 분노는 드디어 볼프 포스텔의 메가톤급 괴물로 집중되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마치 정통 유대인처럼 옷을 입는 이 예술가는 시의 문화담당 장관에게 아주 독창적인 제안을 했다. 이러한 제안은 앞서 다른 세 도시에서도 했던 것으로 두 대의 최신형 캐딜락을 거꾸로 세운 채 서로 기대어 놓고, 그 위에 상당량의 콘크리트를 부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포스텔 씨는 자신의 기막힌 착상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작품 <신화 자동차>는 에로티즘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펴면서 그는 이 두 대의 콘크리트 승용차가 <옷을 벗은 마하(마야)>의 형상을 띠도록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대가는 그의 철학의 테제를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즉 그의 매머드 작품은 ‘황금 송아지를 둘러싸고 벌이는 운전사의 24시간 동안의 춤’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웃음을 터뜨리지 않고는 배기기 힘든 그런 어처구니없는 난센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는 한 가지 답이 있다. 즉 논거가 불합리하면 할수록 그 효과는 더 놀랄 만하다는 것이다.

…(중략)…

그 토론에서 청중의 한 사람이 왜 하필이면 포스텔이 그의 콘크리트 괴물을 라팔로 조약을 체결한 장본인이며 1922년 비열한 암살의 희생양이 된 빼어난 정치가 발터 라테나우의 이름을 따서 붙인 광장에다 세웠느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브록 교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 반항적인 질의자의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천둥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라테나우를 언급하고 그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먼저 라테나우의 저서를 읽어 보도록 권유하고 싶소. 그의 저작은 다시 편집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당신은 당신의 입장과는 반대되는 의견들을 하나하나 발견하게 될 것이오. 라테나우도 그 당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내용의 토론을 했었소. 그의 저술을 읽어 보면 이런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수갈채와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이 반항적인 질의자는 창피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고, 모든 사람들은 그를 모른 체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인상적인 발언이 지닌 트릭을 눈치 챘다. 나는 이 독창적인 발견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러한 트릭을 ‘라테나우 선수 치기’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그의 트릭은 매우 단순하지만 그 효과는 즉각적이고 결정적이었다. 그것은 뭔가 알지 못하고, 읽지 못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창피함을 느낀다는 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뭔가를 좀 알고 있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맞서 이길 승산이 전혀 없는 것이다.

브록 교수의 감동적인 연설, 다시 말해 발터 라테나우가 살아 있다면 콘크리트 방공호 에로티시즘을 지닌 포스텔 식의 ‘누워 있는 마하’ 전시회에 열광적으로 찬성했으리라는 그의 연설이, 단지 미학 교수의 넘쳐나는 환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충분히 짐작했으리라 생각된다. 아마 브록 교수가 강연을 하는 동안 고야는 지하에서도 몸을 뒤척였을 것이고 라테나우 역시 현기증에 눈앞이 어질어질했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발터 라테나우는 모더니즘 예술관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예술은 경계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예술의 가장 고귀한 경계는 민중이며 또 민중의 자연스런 취미이다.’

…(중략)…

방문객으로서 베를린에서 겪었던 나의 모험담을 마치기 전에 베를린의 빌머스도르프 구에 사는 몇몇 대담한 삶들의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보아야만 하겠다. 어느 날 저녁 이들은 그들의 단골 술집에서 도덕론자인 포스텔과 한번 경쟁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그들 스스로 진보적인 조각품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시 차원의 세금 보조는 기대할 수도 없는 처지라 다 낡은 차를 구해다가, 약간의 형이상학적인 부식 효과를 주기 위해, 그것에 콘크리트를 붓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날이 어두워지자 그 작품을 포스텔의 원작 옆에 세워 두었다. 베를린 시의 문화장관은 다음날 그 광경을 보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드디어 그는 그것도 예술작품이라는 결정을 내리고는 그것을 있는 자리에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11.

이 추모전에서 먼저, 보이스가 세상의 혼돈을 퇴치하기 위하여 7일 동안이나 뉴욕의 한 전시장에 가두어 두었던 코요테에 대해 말할 때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흥분에 떨리고 있었다.그러고 나서 그의 몇몇 숭배자들이 화면에 비쳤다. 그들은 예외 없이 보이스를, 모든 시대를 초월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의 하나로 불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어느 누구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요셉 보이스의 전체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충성스런 숭배자들은 이렇게 덧붙였다. “보이스의 보편적인 작업 행위를 개별적으로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의 독창적인 작품 모두를 간략하게 평가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니까요…….”

“앞으로도 수세대에 걸쳐 그의 엄청난 예술적 유산은 연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외에도 많은 언급이 있었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그 누구도 자세히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12.

예술가이자 교수였던 보이스는 유아 욕조에다 다 낡은 반창고와 가제, 바셀린 크림을 붙여서 <수집자 오브제>라는 작품을 만들어 뮌헨의 한 예술 전문가에게 팔았다. 그는 그것을 1973년 다시 부퍼탈 미술관에 임대했다. 이 ‘욕실 오브제’는 또다시 다른 오브제와 함께 레버쿠젠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이곳 미술관의 책임자들은 이 ‘예술작품’이 전시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욕조는 창고에 놓이는 신세가 되었다.

바로 이즈음 사민당의 레버쿠젠 지부가 이 미술관에서 어떤 축제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다. 당원들이 의자를 찾던 도중 예의 그 창고에서 문제의 욕조를 발견하고는 맥주를 차게 하는 데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서 그 욕조를 가져가 버렸다. 결벽증이 있는 몇몇 당원들은 그 욕조가 너무 지저분하다고 생각해서 욕조에 붙어 있던 반창고와 가제, 바셀린을 조심스럽게 긁어내었고,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 명작은 망가지고 말았다. 전문가들의 감정에 의하면 그 손상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대가 보이스의 말을 직접 인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나서서 이것이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나는 그 대상이 ‘나는 완성되었습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분명 앞에서 말한 유아 욕조는 너무 어려서 이 대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말하기 싫어하는 내향적인 욕조였을 것이다. 보이스 스스로도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열린 화법 또는 부서지기 쉬운 화법이라 부르는 것은 만약 우리가 열려 있는 상태나 구멍이 나 있는 상태를 원할 때는 꼭 필요하다. 그래야 만들어질 작품이 말하려는 의도와 관련하여 생명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 모더니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지만, 돌처럼 굳어 있는 대상들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13.

세상 사람이 그들의 작품을 곧이곧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가장 놀란 것은 아마도 예술가 그들 자신이었을 것이다.




 

14.

자신의 작품이나 자신의 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에 대한 사랑 없이 진정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을 위하는 배려나 애정이 빠지게 되면 이기주의나 오만, 허영심, 아니면 효과만을 노리는 마음만이 중요하게 된다. 예술은 관객이 작품에 접근할 수 있고,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호소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예술은 그림을 보는 관객에 의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현대예술이 저지르고 있는 최대의 죄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객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경멸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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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것에 대한 선망'에 대해 말하자면, 그런 동경보다도, 저는 오히려 그런 거대한 것의 비극성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거대한 육체가 덧없이 스러지고, 고래가 해체되어가고, 아까 제가 여학생 얘기도 했지만 거대한 육체 안에 깃든 비극성에 저는 더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생명체가 크다는 것은 굉장히 비극적인 거죠. <원령공주>라는 일본 만화영화에 보면 무시무시하게 큰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그건 매우 아름답지만 그래서 더 비극적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상상력도 실은 매우 좁아지면서 세밀해지고 있는데 전 그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현대사회의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질서 속에서 거대한 정신과 그 아름다움이 스러져가는 데에 대한 애절함, 이 속엔 그런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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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말문이 트이는 것도 느리고, 말귀도 잘 못 알아듣고, 한글도 늦게 뗀 아들을 보는 엄마들의 시선이 곱지가 않다. 남매를 기르는 엄마는 종종 둘을 비교하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딸은 과외며 학원이며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잘하는데, 아들은 도통 공부에 흥미가 없다는 것이다. 밖에 나가 친구들과 공차기나 좋아하고 집에서는 게임기만 붙잡고 있다. 말을 해도 흘려듣고 숙제나 준비물도 챙겨주지 않으면 빼먹기 일쑤다. 물론 모든 아들들이 다 이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중략)…

남아는 여아와 다른 발달 순서를 밟는데,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발달 순서에 불리한 환경을 제공받는다. 게다가 부모가 아이에게 기대하는 능력은 얄궂게도 대부분 여아의 발달 단계에 맞춰져 있고, 학습 과정 또한 그렇다. 그래서 남자아이들은 항상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여아는 소근육과 사고, 언어가 먼저 발달하는 데 비해, 남아는 대근육과 행동이 먼저 발달한다. 여자아이는 발달 시기에 맞게 말하기와 읽기, 쓰기를 배우고, 별 어려움 없이 원하는 정보를 얻고 실력을 발휘해서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남자아이들에게 그 시기는 대근육을 발달시키는 시간이다. 한창 움직이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우리는 앉아서 공부할 것을 강요하는 셈이다. 이 시기에 남자아이의 대근육 발달은 여자아이를 능가하지만, 아무도 아이의 대근육 발달을 칭찬해주지 않는다.

 


2.

아기를 갖게 된 순간부터 엄마 아빠는 아이의 미래를 구상한다. 처음의 바람은 소박했다.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충분하다 싶었다. 심성 곱고 반듯한 아이면 더 바랄 것이 엇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엄마 아빠는 하나둘 욕심을 보태기 시작한다.

이제 첫돌을 맞이한 아이가 왜 옆집 아이보다 걸음마를 빨리 떼지 못하는가 안달하더니, ‘엄마’ ‘아빠’라는 말을 언제 시작하는지 조바심 내고, 생후 18개월에 기저귀 뗐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다. 그러고는 누구보다 한글을 빨리 떼겠다며 교재, 교구의 힘을 빌려 경쟁에 돌입한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대기자 명단에 올려둔 유명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언제 연락이 오나 노심초사하고, 막 세 돌이 되었을 뿐인데 요즘 트렌드라는 각종 교육기관으로 아이를 내몬다……. 처음의 소박한 바람으로 일관했던 부모도 ‘남들은 다 한다’는 생각에 점차 불안해지긴 마찬가지. 웬만한 강심장 부모 아니고서는 소신 있게 아이를 가르치기가 쉽지 않다.

 


3.

아이가 착하면 손해를 본다는 것은 부모의 착각이다.

 


4.

부모 역할극에서 아이들이 대신 보여준 부모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구분된다. 이것은 세상 모든 부모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첫 번째는 “네가 잘못을 하니까 걔가 네 이름을 적는 거 아니야”, “너 공부 제대로 안 하면 나중에 평생 못살아”,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을 나쁘다고 그러면 안 되지” 등은 아이의 행동을 ‘비판’하는 것에 해당한다. 부모들이 가장 흔히 취하는 태도다.

두 번째 “네가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려봐”, “친구들하고 같이 놀면 친구들이 널 좋아하잖아. 그러면 반장 뽑을 때 널 잘 뽑지 않을까?”, “그럼 네가 한번 반장이 돼봐” 등은 ‘설득’에 해당한다. 설득형 부모는 자신은 아이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마지막 세 번째 “뭐 그런 선생님이 다 있어”라는 대답은 ‘공감’에 속한다. 이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모의 태도다.

 


5.
사소한 이야기란 아이와 엄마 사이에 아무런 심리적 이해관계가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 쉽게 말해서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꽃이 피었구나”, “바람이 차구나” 같은 이야기인데, 혹시라도 추우니까 나가지 말라는 식의 훈계조가 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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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운명이란 우스운 것이야. 나도 모르게 내가 빠지는 것이고, 또 내가 빠져 있는 것이고 한 것이 운명이야.



2.

그는 모든 자기의 생활의 벽을 향하여 몸을 꽝꽝 부딪으며 나간다.



3.

술이 깬 후에도 나는 골치가 아프지 않았지만 머리맡에 놓은 주사약 상자를 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즐거웠다. 이것만 다 맞으면 아주 현기증이 없어질 것이다. 정신이상에 대한 공포도, 일체의 강박관념도 씻은 듯 부신 듯이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약상자들은 마치 나의 구주나 다름없이 거룩하게만 보였다.



4.

일전에 D신문의 <시단평>을 통해서 나는 <한국의 현대시에 대한 나의 답변은 한마디로 말해서 ‘모르겠다!’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 글을 보고 모 소설가가 <모르겠다고 해서야 쓰겠나, 잘 키워가도록 해야지>라는 말을 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이 소설가는 이 글을 보면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게 자포자기가 돼서야 쓰나, 아무리 보수가 적은 번역일이라도 끝까지 정성을 잃지 말아야지>라고. 나는 그를 평소부터 소설가라기보다는 학교교사로 보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들은 후부터는 더욱 그 감이 심해졌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고급 <속물>이 참 많다.



5.

입장료도 무섭지만 입장료를 안 받는 것은 더 무섭다.



6.

그에 비하면 토끼는 하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토끼도 (닭에 못지않게) 기르기가 힘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무슨 일이든 얼마가 남느냐 보다도 얼마나 힘이 드느냐를 먼저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아내는 아직도 나의 이 <역경주의(力耕主義)>에는 그리 신뢰를 두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7.

그러나 책임은 아무래도 나의 눈과 머리와 마음에 더 많은 것 같다. 허위에 흐려져 있는 눈, 타성에 젖어 있는 머리, 어줍지 않게 오만해진 마음.

그러나 더 캐고 보면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벌써 나는 재주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된 지가 오래다. 내가 재주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재주라는 것은 생각하면 한이 없는 것이고, 세상에 재주만 생각하고 있다가는 아무 일도 되는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재주의 딜레마의 막바지에서 행동으로 옮겨간 나는, <머리가 좋다>는 말처럼 이 <재주>라는 말이 싫기까지도 하다. <우리집 아이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해서요> 하는 학부형들의 치사한 자기 아이 변명에서부터 <나는 머리는 좋은데 두뇌가 나빠> 식의 라디오 약광고의 코메디에 이르기까지, 이렇게까지 머리와 재주가 노이로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이상한 시대풍조, 이것은 현대의 새로운 거대한 미신의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까지 재주와 머리가 우상화되고 있으면서 무릇 다른 진정한 가치가 그렇듯이 이 가치도 현실면에서는 여전히 천시 학대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8.

필경 나도 누구를 지식인이 아니라고 욕할 만한 권한이 점점 희박해져 가는 처지에 있고, 그런 절망적인 처지에 이길 가망이 도저히 없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소련의 현대시인 솔제니친의 시에 나오는 개미와 같은 낡은 생리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감명적인 시라고 생각되어서 최근에 《사상계(思想界)》에 번역되어 나온 것을 그대로 옮겨서 소개한다.


개미와 불

아무 생각 없이 나는 작은 나무쪽은 불 속에 던져 넣었는데, 그것은 개미들이 오밀조밀 집을 짓고 있던 통나무쪽이었다.

통나무 껍질이 딱딱 소리를 내면서 타기 시작할 때 개미들은 절망 속을 기어 허위적거렸다. 껍질로 기어나와 날름대는 불꽃 속에서 타죽어가고 있었다. 얼른 통나무의 한쪽을 들어올려 비벼대었다. 많은 개미들이 도망쳐 모래밭을 횡단, 낮은 솔잎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 기운을 피해 아주 달아나 버리지 않았다. 일단 절박한 위험을 극복하자마자 개미들은 다시 타고 있는 통나무 주의로 기어들었다. 마치 어떤 힘이, 개미들을 그들이 포기해 버린 고향으로 다시 되돌려 보낸 듯이 많은 개미 떼가 불타는 통나무로 다시 기어오르기까지 했다. 기어코 타 죽을 때까지 개미들은 그 불붙는 집을 방황하는 것이었다.


9.

나에게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좀처럼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죽음과 가난과 매명(賣名)이다. 죽음의 구원. 아직도 나는 시를 통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40여 년을 문자 그대로 헛 산 셈이다. 가난의 구원. 길가에서 매일같이 만나는 신문 파는 불쌍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자책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역사를 긴 눈으로 보라고 하지만, 그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볼 때마다 왜 저애들은 내 자식만큼도 행복하지 못한가 하는 막다른 수치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나는 40녀 년 동안을 문자 그대로 피해 살기만 한 셈이다. 매명의 구원. 지난 1년 동안에만 하더라도 나의 산문행위는 모두가 원고료를 벌기 위한 매문·매명 행위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다. 진정한 <나>의 생활로부터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나의 머리는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받을 원고료의 금액에서 헤어날 사이가 없다.



10.

세상에서는 자학이 나쁘다고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자학의 미덕에 대신하는 종교를 찾지 못하고 있소. 속되어 가는 나 자신에 대한 이나마의 변명이라도 없이는 어디 살겠소?

…(중략)…

그것은 그냥 글씨의 나열이오. 미안하오. 그 글씨의 나열에 대해서 오천 원이나 받아서 미안하오.



11.

속물의 특성은 겸손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에서도 얼마 전에 십이 층인가의 고층 건물을 지은 사람을 상대로 그 건물의 뒤에 사는 사람이 햇빛을 막아서 그늘이 진다는 피해로 오랫동안 소송을 걸었다가 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인이라면 옆의 집에 그늘이 지는 것을 보고 집까지는 헐 용기가 없더라도 미안한 생각쯤은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문소설가나 방송작가들을 보면 그늘이 진 옆의 집에 미안한 생각을 품기는커녕, 왜 나만큼 큰 집을 못 짓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쓰레기와 오물까지도 아침저녁으로 내리쏟는다. 유독 신문소설가나 방송작가뿐이 아니다. 이런 그레셤의 법칙은 문화단체와 예술단체의 이름으로, 교수의 이름으로, 학장의 이름으로, 아나운서의 이름으로, 신문기자의 이름으로 날이 갈수록 더 성해가기만 한다. 유능한 아나운서와 유능한 사회자는 대담자나 회담자나 청중을 리드해 간다는 미명으로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이다. 유명이 유명을 먹고, 더 유명한 것이 덜 유명한 것을 먹고, 덜 유명한 것이 더 유명한 것을 잡아누르려고 기를 쓴다. 이쯤 되면 지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의 대제도(大制度)는 지옥이다. 이 지옥 속의 레슬러들이 속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속물이다. 아무것도 안 붙인 가슴보다는 지옥의 훈장이라도 붙이고 있는 편이 덜 쓸쓸하다. 아무 목걸이도 없느니보다는 개의 목걸이라도 걸고 있는 편이 덜 허전하다. 하나님이시여, 이 <테리어>종들에게 구원을!



12.

요즘의 시대는 <머리가 좋다>는 것에 대한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세상이라, 중학교 아이들까지도 무슨무슨 별에는 인간의 두뇌의 몇 갑절 머리 좋은 생물이 살고 있단 말을 곧잘 하고, 그런 말을 들으면 어른들까지도 「팔이 셋이나 있다지?」 하면서 멀쑥해지지만, 나의 경우는 시의 덕분으로 우선 양키의 미인보다도 더 아름답게, 추한 아내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이라도 둔하게 된 것을 그나마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고 자위하고 있다.



13.

무허가 이발소의 딱딱한 평상에 앉아서 순차를 기다리는 시간처럼 평화로운 때는 없다. 시내의 다방이나 술집 중에서 어수룩한 한적한 분위기를 찾아다니는 것을 단념한 지는 벌써 오래이고, 변두리인 우리 동네의 이발관에까지도 요즘에 와서는 급격하게 <근대화>의 병균에 오염되어서, 라디오 가요의 독재적인 연주에다가 미인계를 이용한 마사지의 착취까지가 가미되어 좀처럼 신경을 풀고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좌석버스나 코로나 택시에서까지도 가요 팬의 운전사를 만나게 되면, 사색은 고사하고 그날 하루의 재수가 염려될 만큼 신경고문과 세뇌교육이 사회화되고 잇는 세상에서는 신경을 푼다는 것도 하나의 위법이요 범죄라는 감이 든다. <무허가> 이발소에서야 비로고 군색한 사색을 위한 신경휴식이 가능하게 되었으니, 사색이 범죄라고 아니 말할 수 있겠는가.

하기는 무허가 이발소에도 라디오의 소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향군무장(鄕軍武裝)을 보도하는 투박한 뉴스 소리가 귀에 거슬리고, 인기배우를 모델로 한 전축광고 포스터 같은 것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래도 수십 명의 승객들의 사전 양해도 없이 제멋대로 유행가를 마구 틀어놓는 운전사의 무지와 무례에 비하면, 무료한 이발사의 이 정도의 위안은 오히려 소박한 편에 속한다.

이런 뒷골목 이발소의 고객들이란 주로 동네꼬마들과 시골서 올라온 인근 공장의 직공아이들인데, 스무 살도 채 안 되는 아이들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정중하게 인두질을 해주고 게다가 우스갯소리까지 해주면서 기껏해야 50원을 받는 이 영리행위는 너무나 바보스럽고 어처구니없이 불쌍해 보이기까지도 한다.

저 다 헤어진 신에, 저 더러운 옷에 저 반짝거리는 머리가 어떻게 어울린다고 저 불필요한 치장을 하나 하고 처음에는 화도 내보았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불쌍한 저 아이가 저렇게 정중한 우대를 받고 사람대우를 받는 것은 무허가 이발소에서밖에 있으랴 하는 측은한 감이 들고,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얼마나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는 우리들인가 하는 원시적인 겸손한 반성까지도 든다. 참 할 일이 많다. 정말 할 일이 많다! 불필요한 어리석은 사랑의 일이!



14.

그의 말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의 문학지는 오늘날과 같은 비상시에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되고, 따라서 그들이 문학을 애호하는 것은 (적어도 문학지를 구매한다는 것은) 평화 시절에만 국한될 한사(閑事)에 불과하다는 말도 된다.

…(중략)…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그 기자의 말을 듣고 내심으로는 오히려 통쾌한 감이 들었고, 우리나라 문학계도 이제야 비로소 응당 받아야 할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하고 쾌재를 부르짖었다.

젊은 층의 전면적인 불신임을 받아야 할 것은 정치계에만 한한 일이 아니라 문학계도 마찬가지이고, 이러한 각성의 시기는 빨리 오면 빨리 올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15.

그런데 이보다도 더 위험한 일은 지식층들의 피로다. 이것은 우리나라뿐이 아닌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보면 그뿐이겠지만 좌우간 비어홀이나 고급 술집의 대학교수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목석 같은 사나이가 나를 울린다」를 부르면 좋아하지만, 언론자유 운운하면 세련되지 않은 촌닭이라고 핀잔을 맞는 것이 상식이다.

…(중략)…

계를 드는 여편네를 막을 수가 없고, 돈을 빌려 쓰지 않을 수가 없고, 딱한 경우에 돈을 꾸어주지 않을 수가 없고, 돈을 꾸어주면 이자를 받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버렸다.

우리들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간은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그러나 건강한 개인도 그렇고 건강한 사회도 그렇고 적어도 자기의 죄에 대해서 몸부림은 쳐야 한다. 몸부림은 칠 줄 알아야 한다.



16.

시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곧 그것을 쓰는 사람의 사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나 소설 그 자체의 형식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생활의 방식과 직결되는 것이고, 후자는 전자의 부연(敷衍)이 되고 전자는 후자의 부연이 되는 법이다. 사카린 밀수업자의 붓에서 「두이노의 비가」가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진달래꽃」을 쓴 소월(素月)은 자기 반의 부유한 아이들을 10여 명씩 모아놓고 고가의 과외공부를 가르치는 국민학교 6학년 선생이나 중학교 3학년의 담임선생은 될 수 없었다.

…(중략)…

나의 이상으로는 개성 있는 시인의 대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매너리즘에 빠진 오늘날과 같은 치욕적인 추천제도에는 도저히 응해지지 않을 것이오. 오늘날의 문단의 추천제는 「007」의 영화를 보려고 새벽 8시부터 매표구 앞에 줄을 지어 늘어선 관객들을 연상케 하는 치욕적인 것이오.



17.

악(惡)도 이만큼 빈틈없이 세련되면 한번 싸워볼 만하다.



18.

외국에 다녀온 친구들이 항용 하는 말이 우리나라에는 논설이나 회화에 있어서 <주장>만 있지 <설득>이 없는 것이 탈이라는 것이다.

…(중략)…

이런 경우에 <주장>이란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명령>으로 화하는 성질의 것이고, 이런 현상은 으레 문화의 기반이 약하고, 정치적으로는 노상 독재의 위협에 떨고 있는 사회에 수반되는 현상이다.

…(중략)…

무식한 위정자들은 문화도 수력발전소의 댐처럼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최고의 문화정책은, 내버려두는 것이다. 제멋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는다. 간섭을 하고 위협을 하고 탄압을 한다. 그리고 간섭을 하고 위협을 하고 탄압을 하는 것을 문화의 건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문화의 방향」의 필자는 <문화를 무시한 경제적 안정이나 정치적 안정>이 나쁘다고 했지만, 나는 논법으로는 오히려 문화를 무시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19.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따라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두려워해야 할 <숨어있는 검열자>는 그가 말하는 <대중의 검열자>라기보다도 획일주의가 강요하는 대제도의 유형무형의 문화기관인 <에이전트>들의 검열인 것이다.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대행하는 것이 이들이고, 이들의 검열 제도가 바로 <대중의 검열자>를 자극하는 거대한 테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대중의 검열자>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자각조차 할 수 없는…… 숨어 있는> 검열자라고 <문예시평>자는 말하고 있지만, 대제도의 검열관 역시 그에 못지않게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자각조차 할 수 없는 숨어 있는 것이다. 이들의 대명사가 바로 질서라는 것이다.



20.

일전에도 또 술이 억병이 되어서 눈 위에 쓰러진 것을 지나가던 학생이 업어가지고 고반소에 데리고 갔다는데 나중에 여편네 말을 들으니 고반소의 순경을 보고 내가 천연스럽게 절을 하고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올시다> 하고 인사를 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튿날 사지가 떨어져나갈 듯이 아픈 가운데에도 이 말을 듣고 겁이 났고 그렇게 겁을 내는 자신이 어찌나 화가 났던지 화풀이를 애꿎은 여편네한테다 다 하고 말았었다. 겁을 낸 자신이, 술을 마시고 <언론자유>를 실천한 내 자신이 한량없이 미웠다.



21.

<그러나 지금 우리의 고향은 변모하여 가고 있다. (……) 비록 계수나무를 뽑아내고 옥토끼를 학살하는 한이 있더라도 로켓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그의 평론집을 읽고 난 이튿날 새벽에 제일 먼저 나의 머리에 떠오른 평범한 구절이 바로 이것이었다.



22.

<인생이 비극이라고 느끼는 그 순간 우리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이츠 자신의 말이다.



23.

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돌과 옥을 구별할 수 없을 것이고, 옥을 보지 못한 사람도 옥과 돌의 구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24.

나이를 먹으면 주접이 붙는다. 분별이란 것이 그것이다. 술을 먹을 때도 몸을 아끼며 먹는다.

그리고 젊었을 때와 다른 것이, 젊은 사람들과 대할 때면 완연히 체면 같은 것을 의식해서 말도 함부로 하지 않게 되고 주정도 자연히 삼가게 된다. 이쯤 되면 거지가 되거나 농부가 되거나 죽거나 해야 할 텐데 그것을 못한다. 나이가 먹으면서 거지가 안 된다는 것은 생활이 안정되어 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불안을 느끼지 않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남을 판단한다. 하다못해 술친구들까지도 자기하고 생활 정도가 비슷한 사이를 좋아하게 된다.

그렇지만 항산(恒産)이 항심(恒心)이라고, 생활에 과히 불안을 느끼지 않으면 정신의 불필요한 소모가 없어진다. 도시 마음을 쓸 데가 없는 것 같다. 약간의 사치를 하는 것도 싫지 않고, 남이 하는 사치도 자기의 사치보다 더 즐겁게 생각된다. 하늘은 둥글고 땅도 둥글고 사람도 둥글고 역사도 둥글고 돈도 둥글다.



25.

<네가 어떤 죄를 저지르든 간에, 수많은 성인들이 벌써 그것을 저지르고 있단 말야.>

<위대한 성인들의 병과 쇠약을 이 몸이 맛볼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위안이 될까.>

전자의 날카로운 아이러니는 그린의 취미에 맞는 것이고, 후자의 기발한 진지성(眞摯性)은 스파크의 취미다. 그런데 이 두 작가의 개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그들이 제각기의 작품 속에서 이런 인자스러운 관념에 부여하고 있는 역할일 것이다. 그린은 전자를, 자기는 이미 구원을 받을 여지가 없는 죄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한 등장인물의 정신착란에 걸린 마지막 자존심을 때려부수기 위해서 사용한다. 스파크는 여명(餘命)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 환자들의 비참하고도 익살맞은 생활을 가차없이 묘사하는 문장 속에서, 어쩌다 새어들어온 밝은 햇빛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살며시 후자를 삽입하고 있다.



26.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심각하게 모방하면 실패하지만 유쾌하게 모방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7.
내가 써온 시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어뿐이다. 혹은 서적어와 속어의 중간쯤 되는 말들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고어(古語)도 연구해 본 일이 없고 시조에 대한 취미도 없다. 어느 서구 시인이 시어는 15세까지 배운 말이 시어가 될 것이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는데, 나의 시어는 어머니한테서 배운 말과 신문에서 배운 시사어의 범위 안에 제한되고 있다.




28.

너무 좋은 책은 집에 두고 싶지 않다. 집의 서가에는 고본옥에서도 사지 않는 책만 꽂아두면 된다. 이왕 속물근성을 발휘하려면 이류의 책이나 꽂아두라.



29.

그들은-그들이란, 출판업자나 잡지 편집자나 신문기자들-우리들이 얼마큼 시를 싫어하는지를 모른다. 공연히 겸손해서 하는 말로 생각하고 있다. 현대의 작가들은 자기들의 문학을 불신한다는 카뮈의 선언은, 시는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랭보의 말만큼 중요하다. 이것이 오늘의 척도다. 그러나 이런 건 말로 하면 싱겁다. 그냥 혼자 알고 있으면 된다. 이런 고독을 고독대로 두지 않기 때문에 <문학>이 싫다는 것이다.



30.

애인은 오지 않았지만, 애인을 만나고자 기다리는 순수한 시간을 맛보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할 수 있다.



31.

작은 눈으로 큰 현실을 다루거나 작은 눈으로 작은 현실을 다루지 말고 큰 눈으로 작은 현실을 다루게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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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처럼 보이는 어떤 남자가 무대 위로 올라갔는데 사람들은 웃지 않고 아주 근엄하게 그 광대의 말을 경청하는 거예요. "우리 독일인들이 최고입니다. 우리가 우수한데 왜 전쟁에 졌습니까? 유태인들과 공산주의자들 때문입니다." 난 스스로에게 말했어요. "바보같으니라구, 사람들은 과거가 어땠는지를 기억한다고. 네 입을 다물게 만들 거야." 맙소사,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아무도 항의하지 않는 거예요. 그 광대는 말했어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모든 게 가능합니다!" 수천수만 명이 손을 들고 한 사람의 목소리처럼 외치는 거예요. "하일, 히틀러!"
…(중략)…
그러더니 이번에는 손수레로 그들을 실어 날라 아주 커다란 화로 같은 데서 태워버렸어요. 모든 게, 기차에서부터 굴뚝까지의 모든 것이 마치 기계가 움직이는 거 같았어요. 그놈들이 사람들한테 빼앗은 안경들이 거대한 산처럼 쌓여갔어요. 사람들은 이제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고 모든 것이 뿌옇게 흐려졌어요. 그 뿌연 흐릿함 속에서 난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 광대 히틀러가 약속한 것, "모든 것이 가능하다"가 이루어졌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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