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탐욕스러운 사람을 조종하기란 인형 극장의 어린 관객들을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손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제때에 간파한 저 선택된 사람들에 대해 나는 진정으로 경탄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라고 썼던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고등 사기꾼과 익살꾼은 거의 같은 직업이라고 볼 수 있다.

 




2.

그들이 자신의 손이나 아니면 발로 만들어 낸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예술작품 옆에 서 있을 때, 그들의 눈에 빛나는 메시아적 사명 의식에는 우리도 덩달아 감명을 받게 마련이다.

 




3.

그러나 이제 우리는 거장 중의 거장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때이다. 세기적인 작품, <브릴로 상자들>을 최초로 창조한 사람에게는 무릎을 꿇는 것 말고는 달리 경의를 표할 방법이 없다. 이 ‘브릴로 상자들’은 한 만능 천재가 이웃 약국에서 손수 구입한 것인데, 그가 바로 미국의 위대한 구매자이자 화가인 앤디 워홀이다.

…(중략)…

허나 명명백백한 사실은, ‘존재의 예정된 조화’와 같은 표현들이나, 아니면 휘황찬란한 카탈로그 속에 인쇄된 이 명작들에 대한 모든 것은 순전히 유머로만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겁에 질린 관람객들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키고, 그렇게 되면 어리둥절해진 관객은 아예 침묵하거나 아니면 다른 멍청한 사람들처럼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한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러한 작품들이 지닌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오락적 가치를 인식한다면, 그 작품들을 진정으로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4.

누구 한 사람이라도 그 작품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던가? 나는 그런 웃음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5.

그러나 여기에는 작지만 아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동네 슈퍼에서 할인 가격으로 살 수 있는 토마토 깡통을 전시한 게 아니라, 시각적인 정확성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필치와 기법을 개발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법을 쓰면서도 그들은 동시에 진실이나 아니면 인간 및 자연의 본질적인 것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6.

그렇지만 이와 같은 장난이 음반을 통한 현대음악에서 제대로 관철될 수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분명 음악은 단지 그것이 재현되는 동안만 음악으로서 존재하지, 투자 가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중략)…

그러나 소위 현대예술이라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더욱더 서먹서먹하게 만든다. 현대예술은 대부분의 사람은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사유재산처럼 애지중지하는 이른바 진보적 엘리트에게는 일종의 특권이다.

우리가 꼭 레닌의 열렬한 추종자는 아니더라도 ‘예술작품은 본래 다수의 인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라는 레닌의 말에는 동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레닌 말의 강조점은 바로 ‘다수’에 있다. 적어도 나는 지금까지 자신의 피아노 조율사를 위해 교향곡을 지었다는 작곡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오직 자신의 이발사 한 사람만을 위해 자서전을 썼다는 작가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현대미술 작품은 전적으로 두 종류의 사람들, 즉 미술 비평가와 미술 장사꾼들을 위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7.

현대미술에 대한 나의 경멸감에 분명히 동조하는 비평가들의 평론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고, 또 그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예술에 관한 진실에 대해 써주기를 학수고대했지만 그 기다림은 헛된 것이었다. 행간 사이에서는 못마땅하다는 투의 목소리를 읽을 수 있었지만, 큰소리가 판을 치는 우리 시대에 과연 누가 그런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예술사가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나는 어네스트 H. 곰브리치를 들겠다. 나는 만족감과 존경심을 가지고 그의 저서를 읽고 있다. 그러나 그 또한 너무 점잖고 너무 배려하는 것이 많다. 쿠르트 슈비터스와 같은 영리한 모더니즘 화가가 “나는 예술가이다. 그러므로 내가 침을 뱉기만 해도, 그것은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선언했을 때, 85세의 이 노학자는 그러한 발언에 차분히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예술이 단지 인간 개성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는 공감하지 않는다.”

만약 곰브리치 교수에게 끝내 그의 솔직한 견해를 피력하도록 압력이 가해진다면, 기껏해야 그는 요셉 보이스와 그의 익살을 두고 이렇게는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를 평가하지 않는다.”

 




8.

그렇다. 한 폭의 그림을 바라보면서 미적인 만족을 느낄 수 있었던 그러한 시대는 완전히 지나가 버렸다.

그 사이 그림은 그것에 딸린 부수적인 텍스트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미리 20여 쪽에 이르는 팸플릿을 공부하지 않고는 전시회의 그림을 이해할 수 없다. 이제는 그림 자체가 사이비 철학을 설명하는 삽화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유명한 작가이자 미술 연구가이기도 한 탐 울프가 이제부터는 그림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는 해설을 확대해서 걸자는 제안을 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니면-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제안이지만-벽에 단지 가격표만을 걸어 놓는 게 어떨는지.

 




9.

납세자들의 돈을 가지고 자신들의 예술 지식을 입증하고자 하는 고등동물의 저 불타는 욕구를 설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모든 관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파킨슨 교수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베스트셀러인 <낭비의 법칙>에서 이러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정의내리고 있다.

 

잘 알다시피, 지출이란 항상 수입의 한계선까지 올라간다. 이것이 개인의 가계뿐만 아니라 공공 재정에 있어서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징세 수입이 많더라도, 그 수입을 모두 써버리거나 더 많이 지출을 하고 싶은 간절한 욕구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 정부는 개인과 차이가 난다. 즉 정부는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는 경우가 매우 드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세상은, 수억 단위의 돈은 감도 잡지 못하면서 수천 단위의 액수에 대해서는 잘 훈련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의 위원회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수억 단위의 프로젝트는 몇 분 안에 가결하면서 사무실에서 소비하는 커피 값을 두고는 몇 시간 동안이나 논쟁을 벌이는 것이다.


 



10.

편지를 보낸 독자들의 분노는 드디어 볼프 포스텔의 메가톤급 괴물로 집중되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마치 정통 유대인처럼 옷을 입는 이 예술가는 시의 문화담당 장관에게 아주 독창적인 제안을 했다. 이러한 제안은 앞서 다른 세 도시에서도 했던 것으로 두 대의 최신형 캐딜락을 거꾸로 세운 채 서로 기대어 놓고, 그 위에 상당량의 콘크리트를 부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포스텔 씨는 자신의 기막힌 착상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작품 <신화 자동차>는 에로티즘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펴면서 그는 이 두 대의 콘크리트 승용차가 <옷을 벗은 마하(마야)>의 형상을 띠도록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대가는 그의 철학의 테제를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즉 그의 매머드 작품은 ‘황금 송아지를 둘러싸고 벌이는 운전사의 24시간 동안의 춤’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웃음을 터뜨리지 않고는 배기기 힘든 그런 어처구니없는 난센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는 한 가지 답이 있다. 즉 논거가 불합리하면 할수록 그 효과는 더 놀랄 만하다는 것이다.

…(중략)…

그 토론에서 청중의 한 사람이 왜 하필이면 포스텔이 그의 콘크리트 괴물을 라팔로 조약을 체결한 장본인이며 1922년 비열한 암살의 희생양이 된 빼어난 정치가 발터 라테나우의 이름을 따서 붙인 광장에다 세웠느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브록 교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 반항적인 질의자의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천둥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라테나우를 언급하고 그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먼저 라테나우의 저서를 읽어 보도록 권유하고 싶소. 그의 저작은 다시 편집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당신은 당신의 입장과는 반대되는 의견들을 하나하나 발견하게 될 것이오. 라테나우도 그 당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내용의 토론을 했었소. 그의 저술을 읽어 보면 이런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수갈채와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이 반항적인 질의자는 창피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고, 모든 사람들은 그를 모른 체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인상적인 발언이 지닌 트릭을 눈치 챘다. 나는 이 독창적인 발견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러한 트릭을 ‘라테나우 선수 치기’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그의 트릭은 매우 단순하지만 그 효과는 즉각적이고 결정적이었다. 그것은 뭔가 알지 못하고, 읽지 못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창피함을 느낀다는 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뭔가를 좀 알고 있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맞서 이길 승산이 전혀 없는 것이다.

브록 교수의 감동적인 연설, 다시 말해 발터 라테나우가 살아 있다면 콘크리트 방공호 에로티시즘을 지닌 포스텔 식의 ‘누워 있는 마하’ 전시회에 열광적으로 찬성했으리라는 그의 연설이, 단지 미학 교수의 넘쳐나는 환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충분히 짐작했으리라 생각된다. 아마 브록 교수가 강연을 하는 동안 고야는 지하에서도 몸을 뒤척였을 것이고 라테나우 역시 현기증에 눈앞이 어질어질했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발터 라테나우는 모더니즘 예술관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예술은 경계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예술의 가장 고귀한 경계는 민중이며 또 민중의 자연스런 취미이다.’

…(중략)…

방문객으로서 베를린에서 겪었던 나의 모험담을 마치기 전에 베를린의 빌머스도르프 구에 사는 몇몇 대담한 삶들의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보아야만 하겠다. 어느 날 저녁 이들은 그들의 단골 술집에서 도덕론자인 포스텔과 한번 경쟁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그들 스스로 진보적인 조각품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시 차원의 세금 보조는 기대할 수도 없는 처지라 다 낡은 차를 구해다가, 약간의 형이상학적인 부식 효과를 주기 위해, 그것에 콘크리트를 붓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날이 어두워지자 그 작품을 포스텔의 원작 옆에 세워 두었다. 베를린 시의 문화장관은 다음날 그 광경을 보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드디어 그는 그것도 예술작품이라는 결정을 내리고는 그것을 있는 자리에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11.

이 추모전에서 먼저, 보이스가 세상의 혼돈을 퇴치하기 위하여 7일 동안이나 뉴욕의 한 전시장에 가두어 두었던 코요테에 대해 말할 때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흥분에 떨리고 있었다.그러고 나서 그의 몇몇 숭배자들이 화면에 비쳤다. 그들은 예외 없이 보이스를, 모든 시대를 초월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의 하나로 불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어느 누구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요셉 보이스의 전체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충성스런 숭배자들은 이렇게 덧붙였다. “보이스의 보편적인 작업 행위를 개별적으로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의 독창적인 작품 모두를 간략하게 평가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니까요…….”

“앞으로도 수세대에 걸쳐 그의 엄청난 예술적 유산은 연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외에도 많은 언급이 있었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그 누구도 자세히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12.

예술가이자 교수였던 보이스는 유아 욕조에다 다 낡은 반창고와 가제, 바셀린 크림을 붙여서 <수집자 오브제>라는 작품을 만들어 뮌헨의 한 예술 전문가에게 팔았다. 그는 그것을 1973년 다시 부퍼탈 미술관에 임대했다. 이 ‘욕실 오브제’는 또다시 다른 오브제와 함께 레버쿠젠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이곳 미술관의 책임자들은 이 ‘예술작품’이 전시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욕조는 창고에 놓이는 신세가 되었다.

바로 이즈음 사민당의 레버쿠젠 지부가 이 미술관에서 어떤 축제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다. 당원들이 의자를 찾던 도중 예의 그 창고에서 문제의 욕조를 발견하고는 맥주를 차게 하는 데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서 그 욕조를 가져가 버렸다. 결벽증이 있는 몇몇 당원들은 그 욕조가 너무 지저분하다고 생각해서 욕조에 붙어 있던 반창고와 가제, 바셀린을 조심스럽게 긁어내었고,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 명작은 망가지고 말았다. 전문가들의 감정에 의하면 그 손상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대가 보이스의 말을 직접 인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나서서 이것이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나는 그 대상이 ‘나는 완성되었습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분명 앞에서 말한 유아 욕조는 너무 어려서 이 대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말하기 싫어하는 내향적인 욕조였을 것이다. 보이스 스스로도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열린 화법 또는 부서지기 쉬운 화법이라 부르는 것은 만약 우리가 열려 있는 상태나 구멍이 나 있는 상태를 원할 때는 꼭 필요하다. 그래야 만들어질 작품이 말하려는 의도와 관련하여 생명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 모더니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지만, 돌처럼 굳어 있는 대상들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13.

세상 사람이 그들의 작품을 곧이곧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가장 놀란 것은 아마도 예술가 그들 자신이었을 것이다.




 

14.

자신의 작품이나 자신의 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에 대한 사랑 없이 진정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을 위하는 배려나 애정이 빠지게 되면 이기주의나 오만, 허영심, 아니면 효과만을 노리는 마음만이 중요하게 된다. 예술은 관객이 작품에 접근할 수 있고,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호소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예술은 그림을 보는 관객에 의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현대예술이 저지르고 있는 최대의 죄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객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경멸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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