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여성들 - 늑대를 타고 달리는
막달레나의 집 엮음 / 삼인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이주노동자 얘기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책이 이주노동자에 대한 내용인 것은 아니다.)

이주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쭈뼛거리며 친구들 뒤를 따라 명동성당 이주노동자 농성장에 처음 갔을 때, '아무 개념없이' '멋모르고' 간 것들이 그간 한편으론 스스로가 너무 답답하고 한심하게 생각된 분명한 이유였음에도, 또 한편으론 그대신 굉장히 많은 다른 경험들을 할 수 있었구나, 하는 걸 지금에서야 느낀다. '농성장'이란 곳이 결코 일상의 공간이 아니지만, 나는 그 농성장에서 '그럼에도'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별 놀라움이나 충격 혹은 내적인 반발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본 모습이 결코 일상의 전부도, 전형적인 모습도 아니라는 건 잘 안다. 반복하지만, 농성장 천막이란 곳 자체가 도무지 일상의 공간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나는, 울고 웃는 갖가지 사연들, 서로 위해주고 배려하는 모습과 토라지고 싸우는 모습들도 보았고, 주로는 같이 밥먹고 수다떨고 사진찍고 같이 춤추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때론 같이 술먹고), 혹은 말없이 천막 안에서 시간을 같이 보내는 등 '같이 노는' 시간들을 통해 일상의 일부, 혹은 일상의 반영(reflect)의 일부를 함께 했다. 그리고 이건, 집회에 참여해 함께 구호를 외치고 투쟁가를 부르고 거리를 행진한 시간들만큼이나 소중했다. 이런 경험은, 사람을 스테레오 타입으로 어떤 편견을 충족시키는 저 담장 너머 밖의 말하는 인형이 아닌, 살아있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과정이다. (물론 내가 깨닫고 있는, 혹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한계들 역시 존재할 것이다.) 당연히, 이주노동자들은 나와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게다가 습속과 문화도 다르다), 말도 다르고 지금 처해있는 처지도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이고 노동자란 측면에서, 희로애락을 느끼고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치사해지고 때로는 작은 것에 감동하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짜증내고 울고 웃는다는 점에서 같다.

물론 그 당시에도 내가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있지도 못했고, 오히려 회사일로 피로에 쪄든 몸으로 농성장에 와서 "그냥 수다나 떨다 가는" 것에 충족되지 않는 부족함과 안타까움과 답답함도 느꼈다. 하지만 그렇게 보낸 시간들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또다른 의미에서 소중한 시간들이었음을, 내가 전혀 헛짓거리를 했던 건 아니었음을, 이 책을 읽고서야 느꼈다.

이주노동자만큼이나 배제되고 자신의 입을 갖지 못한 채 타인에 의해 언제나 폭력적으로 정의되고 묘사되며 평가되고 오해되는 성매매 여성들을, 성매매 연구자들이 심층 인터뷰하며 그 과정, 혹은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8개의 글이 실려있는 책이다. 이렇게 소개했을 때 사람들이 가질 통상적인 선입견과 달리 이 책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여인수난 열전을 늘어놓으며 화려한 비극미를 치장하지도, 그러므로 성매매가 나쁘고 비참한 것이라느니 혹은 그러므로 성매매를 합법화 해야 한다느니 떠들지도 않는다. 이 책은 그저, 저마다 사연을 가진 개개인으로서의 그들의 삶, 그들의 기쁨과 절망과 슬픔, 분노와 희망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거기에서 보이는 그녀들은 일방적으로 불쌍한 피해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들의 생활과 일상의 주체로 서 있다.

어떤 소수자운동이든지간에, 우리는 그들을 한 사람의 당당한 주체로 인정하는 것,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입을 열게 하고 그 주장에 귀를 조용히 기울이는 것, 그리고 서로가 평등한 위치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기본임을 알고 있다. 소수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대체적으로 그들을 주체로, 말하는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말하는 주체라는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들을 너무 많이 본다. 온라인상에서 내가 끼어드는 모든 담화들에서,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훈계와 평가와 작정하고 달려드는 오해의 대상으로 한없이 격하되는 것이 못마땅했고 때로는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나마 나는 말을, 내 언어를 가진 사람이고, 블로그라는 표현수단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언제나 제3자들에 의해 이리 평가되고 저리 평가되고, 그리하여 이렇게 혹은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볼모로 잡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무시무시한 폭력으로 느껴질까. 그 깊이를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약간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할 듯싶다.

신분도 계급도 다른, 그래서 적대감이 느껴질 것도 같은 여성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어준다는 이유로 너무나 기뻐하며 열심히 이야기를 쏟아내었던 그녀들의 모습이 각 글들에서 보인다. 물론 연구자들의 겸허하고 성실한, 그리고 오랜 시간의 노력이 그렇게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에 큰 힘을 발휘했을 터이다. (지금도 열심히 활동 중인 그분들께 존경을.) 하지만 그런 활동가/연구자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생살을 보이면서, 삶의 질곡과 일상의 기쁨과 아픔을 담담히 드러내놓는 그녀들의 구체적인 이야기들에서 나는, 모진 바람과 아스팔트 틈에서도 기어코 꽃을 피우는, 그리고 대기 가득 꽃씨들을 날아오르게 하는 예쁜 꽃, 민들레를 떠올린다. 그리고 운동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깨닫고 나를 돌아보며 반성한다. 여전히 나는 '성 노동자'라는 말 자체에 대해 별로 동의할 수 없지만, 이 말이 그녀들에게 어떤 주체감과 자존감을 안겨줄 수 있는지, 말 자체에 대한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수긍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마지막에 실린 글, '어떤 역사'는 몇번이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보았다. 그들 자신이 스스로 만든 자치조직 개나리회는 비록 사회의 철저한 외면을 당하였지만, 그들 자신에겐 더할 수 없는 긍지와 자존감의 역사로 남아 그들의 삶을 직접 변화시켰고, 나처럼, 연구자라는 매개를 통해 뒤늦게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조차 무한한 용기와 감동을 안겨주었다. 개나리회가 특별한 것은 그녀들이 스스로 만든 조직이고, 스스로 목표와 활동을 정해 스스로 열심히 활동했던 조직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몸을 돌아보고, 스스로의 정신을 돌아보며, 상상도 할 수 없는 주변의 폭력과 시선에 직접, 스스로 당당히 맞서 싸운 역사. 감히 누가 그 역사를 작은 것이라,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으랴. 진정한 역사는 바로 그런 것들이 하나둘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주여성 문제를 고민하는 분들 중 아직 이 책을 접하지 않은 분들께, 이책 후반부에 실린 백재희의 글 'I'm entertainer, I'm not sex worker'와 쳉 실링의 글 '사랑을 배우고, 사랑에 죽고'가 특히 도움이 되시리라 믿는다. 소수자의 주체적 운동을 고민하시는 분들께는 엄상미의 '어떤 역사'가 큰 영감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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