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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쁜 쪽으로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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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여인숙의 밑바닥 인생들 앞에 한 노인이 찾아온다. 노인은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버티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독려한다.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점차 그의 희망 섞인 말에 기대를 걸고 꿈꿔왔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노인은 사라지고 희망에 가득 차 있던 이들은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 꿈꾸던 삶과 현실의 간극 (間隙) 만큼의 충격을 안고 이전보다 더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때론 희망도 어떤 이들에겐 독이 된다."

 

 

 

 

고리끼의 희곡 '밑바닥에서'는 희망과 절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처절한 현실을 힘겹게 견뎌내고 있는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 섞인 말은 약이 될까? 아니면 독이 될까? 이는 결국 희망의 진정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들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주는 것은 큰 비용이 소요되지 않는다. 희망에 부푼 이들이 현실과 꿈의 간극을 재확인하고 더 깊은 심연으로 침몰해도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러한 꿈을 꾸고 그러한 삶을 살아온 그 자신에게 있다. 희망은 이들에게 절실한 것이지만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장밋빛 희망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절망은 '헛된 희망'을 동반한다.

 

 


 


 

 


김사과의 두번째 소설집 <더 나쁜쪽으로>을 읽고 '희망' '절망' 그리고 '희망의 진정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3부로 나뉘어진 본 소설집의 1부는 김사과의 세계를 바라보는 비판적이고 냉철한 시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1부를 여는 첫번째 단편이자 표제작인 '더 나쁜쪽으로'의 주인공에게 삶은 하나의 거리로 요약된다. 주인공은 거리를 떠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자신은 이 거리, 도시, 세계 안에 속해있어 아무것도 넘어서지 못하고, 아무데도 닿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거리로 돌아온다. 거리 위에는 이 거리를 만드는데 기여한 똑같은 사람들이 가득하고, 그는 그들을 아니 '우리'를 저주한다

 

 

 

 

끔찍하게 쌓아 올려진 이 모든 것이자 그것을 쌓는데 인생을 탕진한 바로 그자들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가.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라니? 모두 그저 쫓겨 온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오직 그 점에서만 우리들은 동지가 아닌가? (p. 28)

 

 

 

 

'샌프란시스코'의 주인공은 여전히 시작에 머무르면서 시작을 반복하고, 결국 아무데도 닿지 못한 채 제 자리에 머무르며 점차 고립되어간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실패를 반복하고 누군가의 삶에 '내가 하는 말'이 영향을 주는 것이 두려워 적게 말하는 것을 선택하고 결국 말을 잃어간다. 결국 그가 신봉하는 것은 말이 아닌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로 국한된 단편적 분석에는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이해는 생략된다.

 

 

 

 

이미지는 살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를 덮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게 말을 걸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그것은 편리하고 편리한 것은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문득 그는 이미지의 바깥을 상상하고 있었다. 한 구체적인 정신을 그는 고려하고 있었다. 그는 혼란에 빠졌다. (p. 37)

 

 

 

 

', 증기, 그리고 속도'의 인물들에게도 세상은 절망적이다. 그들은 파국이 닥치기 전 허용된 시간 동안 큰 의미 없는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내일은 저 멀리 있다

 

 

 

 

한동안 우리는 사이가 좋았다. 그러니까 그게 닥쳐오기 전까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거. 현실? 글쎄. 뭐 그런거. 우리가 유일하게 갖고 있지 않은. (p. 76)

 

 

 


 


 


 

'지도와 인간'은 내용의 상당 부분이 영어로 쓰여진 파격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형식과 언어의 파괴를 통해 작품의 주제의식이 잘 드러난다. 대화와 혼잣말이 뒤섞이고,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서술방식은 파편화된 개인의 소외감과 쓸쓸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나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지만 진화를 거치며 각자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퇴행적이고 자폐적인 고유어를 사용하여 결국 개인은 아무와도 소통할 수 없고 점차 고립되어간다.

 

 

 

 

전에는 인간들이 말이라는 것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자해에 가까울지라도, 하지만 내가 말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게임은 끝나 있었다. 지도는 완성되었고, 내 위치는 아무데도 없었다. ... 내가 꽃같이 활짝 피어나는 사이 모든 게 이렇게 철저히 무너져내리라고는... (p. 96)

 

 

 

 

2부는 동일한 시선을 유지하며 그 대상을 한국적 현실에 더 집중한다. '박승준씨의 경우'의 박승준씨는 고시원에 살지만 우연히 줍게된 신상 디올 슈트를 낡은 티와 운동화로 매치하면서 의도치 않게 반문화적, 진보적 성향의 자신만의 고유한 패션을 추구하는 힙스터(Hipster)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이 세계의 주류에서 벗어나려 한 시도의 결과는 파국이었다.

 

 

 

 

갑자기 민영이 비명을 지르며 그를 밀려나고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그는 어리둥절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검은 차가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엄청난 속도로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그가 그 차를 발견했을 때는 차가 이미 그를 덮치는 중이었다. (p. 121)

 

 

 

 

'카레가 있는 책상'의 주인공은 스스로 세계로부터의 고립을 택한다. 그는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채 별다른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살아간다. 또한 대중적인 햄버거나 샐러드 보다는 적당히 자극적이지만 라면보다는 몸에 좋은 카레를 즐겨 먹는다. 하지만 고시원의 이웃들은 그를 카레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린치를 가한다. 이 사건은 주인공이 타인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는 계기가 되고 실제로 카페에서 본 '버블티 여자'를 상대로 한 범죄를 계획한다. 하지만 또 다른 타인의 타인을 향한 혐오사건들을 목도하면서 주인공은 세계를 향해 완전한 굴복을 선언하게 된다.

 

 

 

나는 부드럽게 으깨어질 것이다. 소화될 것이다. 흡수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더 이상 두렵지가 않았다. 나는 안전하다. 나는 외롭지 않다. 나는 기분이 좋다. 나는(p. 145)

 

 

 

 

'이천칠십X년 부르주아 6'에서는 작품의 무대가 '2070년의 한국'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빈부격차로 인한 양극화 그리고 단절, 파편화, 소외감, 혐오의 정서는 여전하다. 소설 속에서 미래를 살아가는 주인공들도 끝없는 환상 속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천천히 사라져간다.

 

 

 

그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이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것임을 알았다. 현실을 역겨워하며, 죽음을 저주하며.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끔찍한 증오 속에서. 무력감 속에서. 천천히 썩어갈 것임을 직감했다. 영원한 그리움 속에서 (p. 174)

 

 

 

3 '세계의 개' 'apoetryendingmachine'은 작가가 쓴 몇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3부에서도 무심한 듯한 냉철함으로 세계의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작가의 시선은 여전하다.

 

 

 

 

 어차피 아무 의미 없는 것들, 영 움직이지 않는 세계, 무력한 자에게 인식이란 여기저기 널브러져 이상한 빛을 내는 광기일 뿐이다. 그것이 눈앞을 떠나지 않는 것은 악몽이다. 의지를 잃어버렸으므로... 우리는 세계의 개, 남은 것은 시간을 견디는 것, 아무 의미도 바닥도 천장도 없는 (세계의 개, p. 182)

 

 

 

 

우리에게는 아무런 생산능력이 없다. 먹고 쓴다. 오로지 누워 있다. 우리에게는 어떤 대항수단이 없다. 당신들에게 대적할 아무런 의지가 없다. 힘도 없다. 항복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원한 없이, 우리는 투항한다. (우리의 입장, p. 205)

 

 

 

 

책을 덮고 표지를 바라 보았다. 이 책 표지의 대부분은 노란색이 차지하고 있다. 노란색은 색채적으로 가장 밝은 색으로 기쁨, , 에너지를 상징하는 색이다. 하지만 밝은 원색의 표지에서 나는 기쁨과 에너지 보다는 역설적으로 어두움과 답답함을 느꼈다. 이는 비단 <더 나쁜 쪽으로>라는 소설집의 제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표지의 위아래, 양 옆 4개의 사다리꼴이 표현하고 있는 소실점은 모두 저 아래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또한 저 아래로 가는 길에는 레드카펫이 깔려 있다. 레드카펫은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서 개선해 돌아올 때 빨간 길을 걸은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레드카펫은 "극진한 대우" "환대"를 의미하는 것이고 일정한 자격을 갖춘 초대 받은 몇몇만 올라설 수 있다. 빨간색은 불 같은 열정과 광기, 피의 희생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 나쁜 쪽으로>라는 제목은 사무엘 베케트의 <가장 나쁜 쪽으로>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더 나쁜쪽을 논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에게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지금이 최악이 아니고 진정한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냉혹한 현실을 인식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더 나쁜쪽으로 걸어가는 것도 레드 카펫에 오르는 이들처럼 냉혹한 현실을 바라볼 용기와 열정, 희생, 광기가 선행되어야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냉철한 성찰 뒤에 우리가 선택하게 될 길이 설령 더 나쁜쪽이라고 해도 가장 나쁜쪽이 아닌 더 나쁜쪽으로 간다는 것은 아직 삶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표지를 보니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색의 삼원색 중 노랑과 빨강으로만 이루어진 표지에서 파란색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삶이란 불공평하고 잔인한 것이며, 현실 속에 파랑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파란색은 하늘, 대기, 우주, 꿈 등 심리적, 물리적으로 저 멀리 존재하는 것, 즉 희망을 대변하는 색이기 때문이다. 고리끼의 밑바닥에서처럼 헛된 희망은 진정한 절망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고난과 역경을 딛고 저 아래 어딘가를 향하는 레드카펫에 설 사람들에게 창문 틈에서 새어 나오는 한줄기 푸른빛 즉, 삶의 여지를 줄 수는 없었을까

 

 

 

 


 

 

 

 

밖에 나와 하늘을 향해 책을 들어올렸다. 책의 표지를 둘러싼 푸른 하늘이 배경으로 추가되자 색의 삼원색의 조화가 완성되었다. 옅은 푸른색의 하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어딘가에 아직 희망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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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말 1 - 6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6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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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제6부 시월의 말 (The October Horse)은 그 이름이 유래한 전차경주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시월의 말은 매년 10월에 열린 전차경주의 우승마이자 동시에 신에 대한 제사의식으로 제물로 바쳐진 말을 의미하며, 전차경주는 공화정 로마의 세르비우스 성벽 바깥에 펼쳐진 마르스 평원의 초록빛 풀밭에서 개최되었다. 전차경주에서 그 해 최고의 군마들은 두 필씩 전차에 매여 무서운 속도로 경주장을 달렸고, 이긴 전차의 오른쪽 말 (가장 강하고 빠른 말)이 시월의 말이 되어 전통적인 의식에 따라 창에 찔려 제물로 바쳐졌다. 작가 콜린 매컬로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아무도 기억 못할 만큼 까마득히 오래된 이 의식에서, 로마가 가진 단연 최고의 것은 로마를 지배하는 한 쌍의 동력인 전쟁과 영토에 제물로 바쳐졌음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바로 이 쌍둥이 동력에서 로마의 힘, 로마의 번영, 로마의 영원한 영광이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시월의 말의 죽음은 과거에의 애도이자 미래에의 전망임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나는 시월의 말을 보며 로마를 지배하는 한 쌍의 동력이 아닌 한 명의 인물이 떠올랐다. 그 인물은 바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는 공화정권의 파괴자, 또는 반대로 제정의 초석을 굳힌 인물 등 현재까지 일관되게 형성되어 있지 않다. 인물에 대한 평가의 범위도 정치인으로서, 장군으로서,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등을 남긴 문인으로서, 그의 인간적 매력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광범위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향방은 논외로 하더라도 비단 로마뿐만 아니라 서양사 전체에서도 카이사르라는 한 명의 인물이 가진 영향력은 그 어떤 인물과 비교했을 때도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더더군다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제6부 시월의 말은 카이사르의 최후와 그와 함께 몰락하는 공화정 로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내가 시월의 말에서 카이사르를 연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는 7부까지 예정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카이사르의 최후가 담긴 6부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작가 콜린 매컬로는 시리즈의 마지막을 6부까지로 생각했고, 7부는 독자들의 요청에 따른 외전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일본 전국시대를 그린 대하 장편소설 <대망>을 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일본 전국시대 3대 명장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 냉철한 판단력과 유연한 사고,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지녔던 오다 노부나가의 최후를 보고나서 그 다음의 독서를 이어가기가 너무나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 제6부 시월의 말은 카이사르의 이집트 원정과 저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가 등장하는 소아시아 정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 3권에서 전개될 잔혹하고 비참한 카이사르의 최후와 그 이후의 로마 공화정의 몰락이 어떻게 묘사될지 정말 기대된다.



"베니, 비디, 비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이 말을 모토로 삼을까 생각 중이네. 이 말에 들어맞는 상황이 걸핏하면 생기는데다 간명한 표현이기까지 하니 말이지." (제1권 p. 383)



승리의 아픔이란 전장의 유일한 생존자로 남는 것이다. (제1권 p.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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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5 일의 미래로 가라
조병학.박문혁 지음 / 인사이트앤뷰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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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TVN의 인기 프로그램 알쓸신잡’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을 시청하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던 기억이 있다. 알쓸신잡은 작가, 미식평론가, 소설가, 과학박사, 가수이자 프로그램의 MC 5명이 함께 여행을 떠나면서 문화와 예술, 정치, 과학 등 다방면의 주제를 놓고 수다를 떠는 프로그램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춘천편이었다. 춘천편에서 나왔던 책과 인쇄박물관 때문이다. 컴퓨터 베이스 인쇄가 대중화된 현재 세대들은 불과 몇십년 전에 문선공이란 직업이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기술 발전의 역사 속에서 밀려나야만 했던 구식 기술과 그 시기의 지식인들을 생각하며 4차산업 혁명의 현재와 AI, 그리고 미래를 생각해보았고 고민끝에 본 도서 ‘2035 일의 미래로 가라를 펼쳐보았다.   

 

 

이 책은 현재의 산업구조가 기술발전으로 인해 미래로 개편되면서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 지에 대한 가능성을 검증하면서 우리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우리가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미래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한 무지로부터의 궁금증과 두려움도 있지만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에 대한 부분도 존재한다는 저자들의 생각에 동의하면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미래에 대해 안다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책은 크게 4가지 Part로 구성되어 있다.


  1. ​Part1 : 보이는 미래, 보이지 않는 미래

  2. Part2 : 일의 해체 : 일이 사라지는 9가지 징후

  3. Part3 : 일의 융합 : 일을 융합하는 9가지 혁신

  4. Part4 : 일의 미래 : 미래의 일과 직업

 

Part1에서는 미래로 가는 가로축, 즉 미래로 가는 마일스톤을 그리고 있다. 2025, 2035, 2045년경에 일어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미래를 어떠한 관점에서 보고 예측하느냐에 따라 선택된 좌표들에 대해 논란이 제기될 수도 있다. 미래의 속도와 방향 모두 관점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과학기술의 관점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미래학자이자 구글의 엔지니어링 책임자인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의 견해를 참고하여 이를 서술하고 있다.

Part2에서는 미래로 가는 마일스톤을 기준으로 펼쳐지는 주요 이슈들을 살펴본다. 구체적으로는 초연결사회, AI와 인간지능, 3D프린터의 등장, 가상현실, 저물어가는 탄소 에너지, 디지털화의 추세, 휴머니즘 등의 이슈들을 중심으로 현재의 일이 미래로 가며 해체되는 현상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Part3에서는 일을 중심으로 중요한 산업들의 변화를 서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융합되는 유통산업, 미디어의 미래, 금융의 변화, 우주산업, 식량과 에너지산업 등을 살펴보면 산업간 융합이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고 이 과정에서 일자리의 변화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저자들의 생각을 서술하고 있다.

마지막 Part4에서는 해체와 융합과정을 거쳐 일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분석한다. Part 2Part 3에서 본 것 처럼 일은 사라지기도 하지만 새롭게 탄생하기도 한다. 심지어 죽은 일이 살아나기도 한다. AI와 스마트 공장, GMO 등으로 대변되는 과학 기술의 변화가 미래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설명과 이 과정에서 휴머니즘은 어떻게 보존되고 발전할 것인지에 대한 저자들의 생각을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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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1 - 5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5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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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 』 1권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전반부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과정을, 후반부는 카이사르가 부재한 로마에서 폼페이우스가 서서히 로마의 독재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시작하게 되고 이어서 갈리아 정복을 추진하게 된다. 1권은 바로 이 시점인 카이사르가 기원전 54년 브리타니아로 원정을 떠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와 관련해서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 더 나아가 로마의 일인자가 될 야심을 드러낸 인상 깊은 구절이 있어 소개한다.

 

 

나는 갈리아에 돌아가서도 그곳의 모든 이들이 나를 (그리고 로마를) 인정할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왜냐면 내가 로마이니까. 하지만 나보다 여섯 살 많은 내 사위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로마가 될 수 없다. 그러니 착한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여, 문단속 잘하시오. 당신이 로마의 일인자로 남아 있을 기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카이사르가 간다.” (P. 26)

 

 

카이사르의 이 말은 장수이자 리더로서 카이사르의 넘치는 자신감을 드러내준다. “내가 로마다.” 라는 카이사르의 말은 훗날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을 남긴 절대적 신권을 가진 존재 태양왕 루이 14세의 발언이 연상된다. 생각해보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참으로 기구한 인연으로 얽혀진 관계다. 나이는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 보다 6살이 많지만,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혼인하여, 카이사르의 사위이다. 또한 두 사람은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전개한 정치적 동지이기도 하다. 말년에 사이가 멀어져서 폼페이우스는 전투에서 패한후 도망치고, 카이사르는 추격하다가 결국 폼페이우스는 목숨을 잃게 되는 어찌보면 역사의 장난이며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는 기묘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전장에서 승리한 위대한 명장이었지만,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패한 단 한번의 전투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모두 뛰어난 리더였지만, 정치가로서 안목이나 스타일이 달랐던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고,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권력을 잡게 되고 두 사람의 갈등과 대립이 고조될 것이다. 결국은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폼페이우스와 대결하는 과정이 전개될 것인데, 이 과정을 콜린 맥컬로는 어떤 관점에서 그릴 것인지 벌써부터 2권의 내용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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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니와 데모꾼
김종수 지음 / 달아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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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인 정의를 보면 ‘근로자’와 ‘노동자’는 큰 차이가 없다.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의 정의는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의미한다. ‘노동자’는 사전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근로와 노동의 사전적 차이와는 달리 사회적 심리적인 괴리감은 생각보다 크다. 우리는 흔히 ‘노동자’라는 단어에서 ‘능동적’, ‘저항’, ‘권리’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고 ‘근로자’라는 단어에서는 ‘수동적’, ‘안정’, ‘사무직’ 등의 긍정적 이미지를 떠올린다. 나 또한 한사람의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노동’과 ‘노동운동’에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선입견의 영향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몇 년 전 우연히 만난 한권의 잡지는 나의 이러한 생각을 불식시켜주었다. 언론사 기자들의 재능기부로 탄생한 지상에서 가장 따뜻한 잡지이자 비정규직을 위한 특별잡지 "꿀잠"이었다. 꿀잠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첫 페이지였다. 꿀잠의 첫 페이지는 잡지 속 화려한 광고에 익숙해진 내게 어쩌면 무심코 넘겨질 페이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잘 차려입은 여성 모델들의 모습은 충분히 눈길을 끌만한 것이었지만, 별다른 특별한 것이 없는 광고라고 생각했고, 광고의 대상 또한 내 관심 분야가 아닌 여성복이었기 때문이다. 페이지를 넘기려는 손가락을 주저하게 만들었던 건 여성모델의 사진 아래에 남겨진 글이었다.

"아름다워요. 또렷하고 밝게 빛납니다. 오늘 당신의 하루 어땠나요? 어둡군요. 흐릿합니다. 누구인지, 왜 거기에 있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 청소를 하고 계셨군요. 깨끗해야 하는 것을 닦느라 더러워진 당신 손안의 걸레를 이제야 보았습니다. 오늘 당신의 하루 어땠나요?"

문구를 읽고 나서 다시 사진을 보았다. 사진은 스튜디오에서 광고를 위해 촬영된 것이 아닌 LED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진 대형 옥외광고물을 찍은 것이었다. 그리고 사진 속에는 문구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모델의 밝은 미소를 부각시켜주는 조명판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 청소 아주머니가 걸레로 닦고 있는 모습이 불빛에 비춰진 실루엣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광고는 이윤추구를 위해 사람들의 눈을 잡아끌며 상냥한 인사를 건네고 있는 반면 사회의 버팀목인 노동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본 도서 <엄니와 데모꾼>을 만나게 해준 것도 잡지 꿀잠이 내게 준 선물이다. 평소에 문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문학이 다루는 다양한 주제 중 그 동안 무지했던 ‘노동’이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준 것은 그 때 꿀잠과의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엄니와 데모꾼>의 저자 김종수는 30년간 노동운동에 헌신해온 노동자다. 등단 이력은 물론 시골 백일장 경력도 없는 책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그러한 삶을 살아낸 저자의 진정성이 담긴 시집이자 이력서이며 자서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출가한 딸에게는 깨달음의 순간을 기록한 한 인간의 ‘오도송’이자 만리타향에서 불어오는 아버지의 숨결이고, 삶을 지켜본 친구에게는 점점 약해짐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아직도 등대의 역할을 하는 믿음직한 동료의 기록이다.

시집 <엄니와 데모꾼>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사랑’일 것이다.

표제작 “엄니와 데모꾼”은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의도치 않게 불효를 행하는 자식의 애달픈 사랑이다.

 

‘참 그 소리 들을 날도 얼마 안 남았제. 그케 생각하믄 눈물 나야.’ - 엄니와 데모꾼 -

“빼먹은 대가”와 “다시 피는 꽃”은 한평생 고생시킨 아내에게 표현하는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슬며시 내보이는 쑥스러운 사랑의 고백이다.

 

‘지난 세월 당신을 빼먹은 대가를 이제 와서 톡톡히 치루고 있다는 것을’ - 빼먹은 대가 -

‘그대 생의 넋두리도 내 몫이 되는 것. 그리하여 꽃은 다시 피는 것’ - 다시 피는 꽃 -

“딸에게”에는 출가하는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아비의 애틋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선택한 길이 힘들고 어렵다 해도 부디 두근두근 설레는 길이길’ – 딸에게 -

저자는 혁명가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염원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 대한 동료애도 표현했다. “촛불”을 통해서는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시민들의 위대함을 표현했고, “파업소풍”을 통해서는 세상의 변화를 바라는 순수한 열망을 표현했다. 알베르 까뮈는 모든 혁명가는 압제자 (oppressor)나 이단자 (heretic)로 끝난다고 말한다. 이는 혁명가의 말로가 헤게모니를 쥐고 지배하거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이단이 되는 것으로 끝나는 이유는 그들이 혁명의 동기가 된 순수한 이념과 열정을 망각하고 권력과 자본에 탐닉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간절한 염원 한 점 보태러 간다.’ - 촛불 -

파업은 소풍이야. 잠 못 들고 뒤척이다 새벽녘에 잠든 아이 같은 설렘이야.’ - 파업소풍 -

어쩌면 저자의 시처럼 인생이란 뜨거웠던 젊은 시절의 열기를 조금씩 식히며, 스러져가는 불빛들끼리 조금 더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식탁 위의 밥처럼 뜨거웠던 지난 시절을 조금씩 식히는 것 식탁위의 촛불처럼 꺼져가는 불빛들끼리 조금 더 바라보는 것’ - 인생이란 -

어두운 곳에서는 밝은 곳이 잘 보이지만 밝은 조명 안에서 바라보면 어두운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를 현혹하며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스포트라이트로 인해 땀의 눈물과 소중함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노동으로 일군 삶이야말로 자랑스럽고 떳떳해야 하고, 그 땀의 웃음이 밝고 아름답게 빛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엄니와 데모꾼>을 읽으며 나는 노동이 웃음이 되는 세상, 노동이 보람이 되는 세상을 간절하게 소망한 저자의 진정성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내게 있어 <엄니와 데모꾼>은 '당신의 노동은 안녕한가?'라고 묻는 저자의 질문이고, 먼저 살아본 선배가 나에게 해주는 인생에 대한 조언이며, 세상은 아직 따뜻하고 살아볼 만한 곳이라는 말해주는 한 그릇의 따뜻한 밥이었다. 나는 아직도 우리 가슴 속에는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서도 치유 받거나 구원 받을 수 없는, 오직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구할 수 있는 따스함의 영역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노동자들의 삶에 꿀잠이 깃들길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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