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쁜 쪽으로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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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여인숙의 밑바닥 인생들 앞에 한 노인이 찾아온다. 노인은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버티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독려한다.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점차 그의 희망 섞인 말에 기대를 걸고 꿈꿔왔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노인은 사라지고 희망에 가득 차 있던 이들은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 꿈꾸던 삶과 현실의 간극 (間隙) 만큼의 충격을 안고 이전보다 더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때론 희망도 어떤 이들에겐 독이 된다."

 

 

 

 

고리끼의 희곡 '밑바닥에서'는 희망과 절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처절한 현실을 힘겹게 견뎌내고 있는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 섞인 말은 약이 될까? 아니면 독이 될까? 이는 결국 희망의 진정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들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주는 것은 큰 비용이 소요되지 않는다. 희망에 부푼 이들이 현실과 꿈의 간극을 재확인하고 더 깊은 심연으로 침몰해도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러한 꿈을 꾸고 그러한 삶을 살아온 그 자신에게 있다. 희망은 이들에게 절실한 것이지만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장밋빛 희망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절망은 '헛된 희망'을 동반한다.

 

 


 


 

 


김사과의 두번째 소설집 <더 나쁜쪽으로>을 읽고 '희망' '절망' 그리고 '희망의 진정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3부로 나뉘어진 본 소설집의 1부는 김사과의 세계를 바라보는 비판적이고 냉철한 시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1부를 여는 첫번째 단편이자 표제작인 '더 나쁜쪽으로'의 주인공에게 삶은 하나의 거리로 요약된다. 주인공은 거리를 떠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자신은 이 거리, 도시, 세계 안에 속해있어 아무것도 넘어서지 못하고, 아무데도 닿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거리로 돌아온다. 거리 위에는 이 거리를 만드는데 기여한 똑같은 사람들이 가득하고, 그는 그들을 아니 '우리'를 저주한다

 

 

 

 

끔찍하게 쌓아 올려진 이 모든 것이자 그것을 쌓는데 인생을 탕진한 바로 그자들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가.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라니? 모두 그저 쫓겨 온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오직 그 점에서만 우리들은 동지가 아닌가? (p. 28)

 

 

 

 

'샌프란시스코'의 주인공은 여전히 시작에 머무르면서 시작을 반복하고, 결국 아무데도 닿지 못한 채 제 자리에 머무르며 점차 고립되어간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실패를 반복하고 누군가의 삶에 '내가 하는 말'이 영향을 주는 것이 두려워 적게 말하는 것을 선택하고 결국 말을 잃어간다. 결국 그가 신봉하는 것은 말이 아닌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로 국한된 단편적 분석에는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이해는 생략된다.

 

 

 

 

이미지는 살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를 덮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게 말을 걸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그것은 편리하고 편리한 것은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문득 그는 이미지의 바깥을 상상하고 있었다. 한 구체적인 정신을 그는 고려하고 있었다. 그는 혼란에 빠졌다. (p. 37)

 

 

 

 

', 증기, 그리고 속도'의 인물들에게도 세상은 절망적이다. 그들은 파국이 닥치기 전 허용된 시간 동안 큰 의미 없는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내일은 저 멀리 있다

 

 

 

 

한동안 우리는 사이가 좋았다. 그러니까 그게 닥쳐오기 전까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거. 현실? 글쎄. 뭐 그런거. 우리가 유일하게 갖고 있지 않은. (p. 76)

 

 

 


 


 


 

'지도와 인간'은 내용의 상당 부분이 영어로 쓰여진 파격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형식과 언어의 파괴를 통해 작품의 주제의식이 잘 드러난다. 대화와 혼잣말이 뒤섞이고,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서술방식은 파편화된 개인의 소외감과 쓸쓸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나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지만 진화를 거치며 각자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퇴행적이고 자폐적인 고유어를 사용하여 결국 개인은 아무와도 소통할 수 없고 점차 고립되어간다.

 

 

 

 

전에는 인간들이 말이라는 것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자해에 가까울지라도, 하지만 내가 말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게임은 끝나 있었다. 지도는 완성되었고, 내 위치는 아무데도 없었다. ... 내가 꽃같이 활짝 피어나는 사이 모든 게 이렇게 철저히 무너져내리라고는... (p. 96)

 

 

 

 

2부는 동일한 시선을 유지하며 그 대상을 한국적 현실에 더 집중한다. '박승준씨의 경우'의 박승준씨는 고시원에 살지만 우연히 줍게된 신상 디올 슈트를 낡은 티와 운동화로 매치하면서 의도치 않게 반문화적, 진보적 성향의 자신만의 고유한 패션을 추구하는 힙스터(Hipster)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이 세계의 주류에서 벗어나려 한 시도의 결과는 파국이었다.

 

 

 

 

갑자기 민영이 비명을 지르며 그를 밀려나고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그는 어리둥절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검은 차가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엄청난 속도로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그가 그 차를 발견했을 때는 차가 이미 그를 덮치는 중이었다. (p. 121)

 

 

 

 

'카레가 있는 책상'의 주인공은 스스로 세계로부터의 고립을 택한다. 그는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채 별다른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살아간다. 또한 대중적인 햄버거나 샐러드 보다는 적당히 자극적이지만 라면보다는 몸에 좋은 카레를 즐겨 먹는다. 하지만 고시원의 이웃들은 그를 카레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린치를 가한다. 이 사건은 주인공이 타인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는 계기가 되고 실제로 카페에서 본 '버블티 여자'를 상대로 한 범죄를 계획한다. 하지만 또 다른 타인의 타인을 향한 혐오사건들을 목도하면서 주인공은 세계를 향해 완전한 굴복을 선언하게 된다.

 

 

 

나는 부드럽게 으깨어질 것이다. 소화될 것이다. 흡수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더 이상 두렵지가 않았다. 나는 안전하다. 나는 외롭지 않다. 나는 기분이 좋다. 나는(p. 145)

 

 

 

 

'이천칠십X년 부르주아 6'에서는 작품의 무대가 '2070년의 한국'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빈부격차로 인한 양극화 그리고 단절, 파편화, 소외감, 혐오의 정서는 여전하다. 소설 속에서 미래를 살아가는 주인공들도 끝없는 환상 속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천천히 사라져간다.

 

 

 

그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이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것임을 알았다. 현실을 역겨워하며, 죽음을 저주하며.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끔찍한 증오 속에서. 무력감 속에서. 천천히 썩어갈 것임을 직감했다. 영원한 그리움 속에서 (p. 174)

 

 

 

3 '세계의 개' 'apoetryendingmachine'은 작가가 쓴 몇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3부에서도 무심한 듯한 냉철함으로 세계의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작가의 시선은 여전하다.

 

 

 

 

 어차피 아무 의미 없는 것들, 영 움직이지 않는 세계, 무력한 자에게 인식이란 여기저기 널브러져 이상한 빛을 내는 광기일 뿐이다. 그것이 눈앞을 떠나지 않는 것은 악몽이다. 의지를 잃어버렸으므로... 우리는 세계의 개, 남은 것은 시간을 견디는 것, 아무 의미도 바닥도 천장도 없는 (세계의 개, p. 182)

 

 

 

 

우리에게는 아무런 생산능력이 없다. 먹고 쓴다. 오로지 누워 있다. 우리에게는 어떤 대항수단이 없다. 당신들에게 대적할 아무런 의지가 없다. 힘도 없다. 항복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원한 없이, 우리는 투항한다. (우리의 입장, p. 205)

 

 

 

 

책을 덮고 표지를 바라 보았다. 이 책 표지의 대부분은 노란색이 차지하고 있다. 노란색은 색채적으로 가장 밝은 색으로 기쁨, , 에너지를 상징하는 색이다. 하지만 밝은 원색의 표지에서 나는 기쁨과 에너지 보다는 역설적으로 어두움과 답답함을 느꼈다. 이는 비단 <더 나쁜 쪽으로>라는 소설집의 제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표지의 위아래, 양 옆 4개의 사다리꼴이 표현하고 있는 소실점은 모두 저 아래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또한 저 아래로 가는 길에는 레드카펫이 깔려 있다. 레드카펫은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서 개선해 돌아올 때 빨간 길을 걸은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레드카펫은 "극진한 대우" "환대"를 의미하는 것이고 일정한 자격을 갖춘 초대 받은 몇몇만 올라설 수 있다. 빨간색은 불 같은 열정과 광기, 피의 희생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 나쁜 쪽으로>라는 제목은 사무엘 베케트의 <가장 나쁜 쪽으로>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더 나쁜쪽을 논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에게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지금이 최악이 아니고 진정한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냉혹한 현실을 인식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더 나쁜쪽으로 걸어가는 것도 레드 카펫에 오르는 이들처럼 냉혹한 현실을 바라볼 용기와 열정, 희생, 광기가 선행되어야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냉철한 성찰 뒤에 우리가 선택하게 될 길이 설령 더 나쁜쪽이라고 해도 가장 나쁜쪽이 아닌 더 나쁜쪽으로 간다는 것은 아직 삶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표지를 보니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색의 삼원색 중 노랑과 빨강으로만 이루어진 표지에서 파란색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삶이란 불공평하고 잔인한 것이며, 현실 속에 파랑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파란색은 하늘, 대기, 우주, 꿈 등 심리적, 물리적으로 저 멀리 존재하는 것, 즉 희망을 대변하는 색이기 때문이다. 고리끼의 밑바닥에서처럼 헛된 희망은 진정한 절망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고난과 역경을 딛고 저 아래 어딘가를 향하는 레드카펫에 설 사람들에게 창문 틈에서 새어 나오는 한줄기 푸른빛 즉, 삶의 여지를 줄 수는 없었을까

 

 

 

 


 

 

 

 

밖에 나와 하늘을 향해 책을 들어올렸다. 책의 표지를 둘러싼 푸른 하늘이 배경으로 추가되자 색의 삼원색의 조화가 완성되었다. 옅은 푸른색의 하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어딘가에 아직 희망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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