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니와 데모꾼
김종수 지음 / 달아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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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인 정의를 보면 ‘근로자’와 ‘노동자’는 큰 차이가 없다.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의 정의는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의미한다. ‘노동자’는 사전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근로와 노동의 사전적 차이와는 달리 사회적 심리적인 괴리감은 생각보다 크다. 우리는 흔히 ‘노동자’라는 단어에서 ‘능동적’, ‘저항’, ‘권리’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고 ‘근로자’라는 단어에서는 ‘수동적’, ‘안정’, ‘사무직’ 등의 긍정적 이미지를 떠올린다. 나 또한 한사람의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노동’과 ‘노동운동’에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선입견의 영향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몇 년 전 우연히 만난 한권의 잡지는 나의 이러한 생각을 불식시켜주었다. 언론사 기자들의 재능기부로 탄생한 지상에서 가장 따뜻한 잡지이자 비정규직을 위한 특별잡지 "꿀잠"이었다. 꿀잠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첫 페이지였다. 꿀잠의 첫 페이지는 잡지 속 화려한 광고에 익숙해진 내게 어쩌면 무심코 넘겨질 페이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잘 차려입은 여성 모델들의 모습은 충분히 눈길을 끌만한 것이었지만, 별다른 특별한 것이 없는 광고라고 생각했고, 광고의 대상 또한 내 관심 분야가 아닌 여성복이었기 때문이다. 페이지를 넘기려는 손가락을 주저하게 만들었던 건 여성모델의 사진 아래에 남겨진 글이었다.

"아름다워요. 또렷하고 밝게 빛납니다. 오늘 당신의 하루 어땠나요? 어둡군요. 흐릿합니다. 누구인지, 왜 거기에 있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 청소를 하고 계셨군요. 깨끗해야 하는 것을 닦느라 더러워진 당신 손안의 걸레를 이제야 보았습니다. 오늘 당신의 하루 어땠나요?"

문구를 읽고 나서 다시 사진을 보았다. 사진은 스튜디오에서 광고를 위해 촬영된 것이 아닌 LED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진 대형 옥외광고물을 찍은 것이었다. 그리고 사진 속에는 문구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모델의 밝은 미소를 부각시켜주는 조명판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 청소 아주머니가 걸레로 닦고 있는 모습이 불빛에 비춰진 실루엣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광고는 이윤추구를 위해 사람들의 눈을 잡아끌며 상냥한 인사를 건네고 있는 반면 사회의 버팀목인 노동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본 도서 <엄니와 데모꾼>을 만나게 해준 것도 잡지 꿀잠이 내게 준 선물이다. 평소에 문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문학이 다루는 다양한 주제 중 그 동안 무지했던 ‘노동’이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준 것은 그 때 꿀잠과의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엄니와 데모꾼>의 저자 김종수는 30년간 노동운동에 헌신해온 노동자다. 등단 이력은 물론 시골 백일장 경력도 없는 책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그러한 삶을 살아낸 저자의 진정성이 담긴 시집이자 이력서이며 자서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출가한 딸에게는 깨달음의 순간을 기록한 한 인간의 ‘오도송’이자 만리타향에서 불어오는 아버지의 숨결이고, 삶을 지켜본 친구에게는 점점 약해짐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아직도 등대의 역할을 하는 믿음직한 동료의 기록이다.

시집 <엄니와 데모꾼>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사랑’일 것이다.

표제작 “엄니와 데모꾼”은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의도치 않게 불효를 행하는 자식의 애달픈 사랑이다.

 

‘참 그 소리 들을 날도 얼마 안 남았제. 그케 생각하믄 눈물 나야.’ - 엄니와 데모꾼 -

“빼먹은 대가”와 “다시 피는 꽃”은 한평생 고생시킨 아내에게 표현하는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슬며시 내보이는 쑥스러운 사랑의 고백이다.

 

‘지난 세월 당신을 빼먹은 대가를 이제 와서 톡톡히 치루고 있다는 것을’ - 빼먹은 대가 -

‘그대 생의 넋두리도 내 몫이 되는 것. 그리하여 꽃은 다시 피는 것’ - 다시 피는 꽃 -

“딸에게”에는 출가하는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아비의 애틋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선택한 길이 힘들고 어렵다 해도 부디 두근두근 설레는 길이길’ – 딸에게 -

저자는 혁명가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염원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 대한 동료애도 표현했다. “촛불”을 통해서는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시민들의 위대함을 표현했고, “파업소풍”을 통해서는 세상의 변화를 바라는 순수한 열망을 표현했다. 알베르 까뮈는 모든 혁명가는 압제자 (oppressor)나 이단자 (heretic)로 끝난다고 말한다. 이는 혁명가의 말로가 헤게모니를 쥐고 지배하거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이단이 되는 것으로 끝나는 이유는 그들이 혁명의 동기가 된 순수한 이념과 열정을 망각하고 권력과 자본에 탐닉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간절한 염원 한 점 보태러 간다.’ - 촛불 -

파업은 소풍이야. 잠 못 들고 뒤척이다 새벽녘에 잠든 아이 같은 설렘이야.’ - 파업소풍 -

어쩌면 저자의 시처럼 인생이란 뜨거웠던 젊은 시절의 열기를 조금씩 식히며, 스러져가는 불빛들끼리 조금 더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식탁 위의 밥처럼 뜨거웠던 지난 시절을 조금씩 식히는 것 식탁위의 촛불처럼 꺼져가는 불빛들끼리 조금 더 바라보는 것’ - 인생이란 -

어두운 곳에서는 밝은 곳이 잘 보이지만 밝은 조명 안에서 바라보면 어두운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를 현혹하며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스포트라이트로 인해 땀의 눈물과 소중함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노동으로 일군 삶이야말로 자랑스럽고 떳떳해야 하고, 그 땀의 웃음이 밝고 아름답게 빛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엄니와 데모꾼>을 읽으며 나는 노동이 웃음이 되는 세상, 노동이 보람이 되는 세상을 간절하게 소망한 저자의 진정성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내게 있어 <엄니와 데모꾼>은 '당신의 노동은 안녕한가?'라고 묻는 저자의 질문이고, 먼저 살아본 선배가 나에게 해주는 인생에 대한 조언이며, 세상은 아직 따뜻하고 살아볼 만한 곳이라는 말해주는 한 그릇의 따뜻한 밥이었다. 나는 아직도 우리 가슴 속에는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서도 치유 받거나 구원 받을 수 없는, 오직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구할 수 있는 따스함의 영역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노동자들의 삶에 꿀잠이 깃들길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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