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 1 - 5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5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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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 』 1권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전반부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과정을, 후반부는 카이사르가 부재한 로마에서 폼페이우스가 서서히 로마의 독재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시작하게 되고 이어서 갈리아 정복을 추진하게 된다. 1권은 바로 이 시점인 카이사르가 기원전 54년 브리타니아로 원정을 떠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와 관련해서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 더 나아가 로마의 일인자가 될 야심을 드러낸 인상 깊은 구절이 있어 소개한다.

 

 

나는 갈리아에 돌아가서도 그곳의 모든 이들이 나를 (그리고 로마를) 인정할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왜냐면 내가 로마이니까. 하지만 나보다 여섯 살 많은 내 사위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로마가 될 수 없다. 그러니 착한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여, 문단속 잘하시오. 당신이 로마의 일인자로 남아 있을 기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카이사르가 간다.” (P. 26)

 

 

카이사르의 이 말은 장수이자 리더로서 카이사르의 넘치는 자신감을 드러내준다. “내가 로마다.” 라는 카이사르의 말은 훗날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을 남긴 절대적 신권을 가진 존재 태양왕 루이 14세의 발언이 연상된다. 생각해보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참으로 기구한 인연으로 얽혀진 관계다. 나이는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 보다 6살이 많지만,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혼인하여, 카이사르의 사위이다. 또한 두 사람은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전개한 정치적 동지이기도 하다. 말년에 사이가 멀어져서 폼페이우스는 전투에서 패한후 도망치고, 카이사르는 추격하다가 결국 폼페이우스는 목숨을 잃게 되는 어찌보면 역사의 장난이며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는 기묘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전장에서 승리한 위대한 명장이었지만,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패한 단 한번의 전투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모두 뛰어난 리더였지만, 정치가로서 안목이나 스타일이 달랐던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고,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권력을 잡게 되고 두 사람의 갈등과 대립이 고조될 것이다. 결국은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폼페이우스와 대결하는 과정이 전개될 것인데, 이 과정을 콜린 맥컬로는 어떤 관점에서 그릴 것인지 벌써부터 2권의 내용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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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니와 데모꾼
김종수 지음 / 달아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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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인 정의를 보면 ‘근로자’와 ‘노동자’는 큰 차이가 없다.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의 정의는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의미한다. ‘노동자’는 사전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근로와 노동의 사전적 차이와는 달리 사회적 심리적인 괴리감은 생각보다 크다. 우리는 흔히 ‘노동자’라는 단어에서 ‘능동적’, ‘저항’, ‘권리’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고 ‘근로자’라는 단어에서는 ‘수동적’, ‘안정’, ‘사무직’ 등의 긍정적 이미지를 떠올린다. 나 또한 한사람의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노동’과 ‘노동운동’에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선입견의 영향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몇 년 전 우연히 만난 한권의 잡지는 나의 이러한 생각을 불식시켜주었다. 언론사 기자들의 재능기부로 탄생한 지상에서 가장 따뜻한 잡지이자 비정규직을 위한 특별잡지 "꿀잠"이었다. 꿀잠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첫 페이지였다. 꿀잠의 첫 페이지는 잡지 속 화려한 광고에 익숙해진 내게 어쩌면 무심코 넘겨질 페이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잘 차려입은 여성 모델들의 모습은 충분히 눈길을 끌만한 것이었지만, 별다른 특별한 것이 없는 광고라고 생각했고, 광고의 대상 또한 내 관심 분야가 아닌 여성복이었기 때문이다. 페이지를 넘기려는 손가락을 주저하게 만들었던 건 여성모델의 사진 아래에 남겨진 글이었다.

"아름다워요. 또렷하고 밝게 빛납니다. 오늘 당신의 하루 어땠나요? 어둡군요. 흐릿합니다. 누구인지, 왜 거기에 있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 청소를 하고 계셨군요. 깨끗해야 하는 것을 닦느라 더러워진 당신 손안의 걸레를 이제야 보았습니다. 오늘 당신의 하루 어땠나요?"

문구를 읽고 나서 다시 사진을 보았다. 사진은 스튜디오에서 광고를 위해 촬영된 것이 아닌 LED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진 대형 옥외광고물을 찍은 것이었다. 그리고 사진 속에는 문구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모델의 밝은 미소를 부각시켜주는 조명판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 청소 아주머니가 걸레로 닦고 있는 모습이 불빛에 비춰진 실루엣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광고는 이윤추구를 위해 사람들의 눈을 잡아끌며 상냥한 인사를 건네고 있는 반면 사회의 버팀목인 노동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본 도서 <엄니와 데모꾼>을 만나게 해준 것도 잡지 꿀잠이 내게 준 선물이다. 평소에 문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문학이 다루는 다양한 주제 중 그 동안 무지했던 ‘노동’이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준 것은 그 때 꿀잠과의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엄니와 데모꾼>의 저자 김종수는 30년간 노동운동에 헌신해온 노동자다. 등단 이력은 물론 시골 백일장 경력도 없는 책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그러한 삶을 살아낸 저자의 진정성이 담긴 시집이자 이력서이며 자서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출가한 딸에게는 깨달음의 순간을 기록한 한 인간의 ‘오도송’이자 만리타향에서 불어오는 아버지의 숨결이고, 삶을 지켜본 친구에게는 점점 약해짐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아직도 등대의 역할을 하는 믿음직한 동료의 기록이다.

시집 <엄니와 데모꾼>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사랑’일 것이다.

표제작 “엄니와 데모꾼”은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의도치 않게 불효를 행하는 자식의 애달픈 사랑이다.

 

‘참 그 소리 들을 날도 얼마 안 남았제. 그케 생각하믄 눈물 나야.’ - 엄니와 데모꾼 -

“빼먹은 대가”와 “다시 피는 꽃”은 한평생 고생시킨 아내에게 표현하는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슬며시 내보이는 쑥스러운 사랑의 고백이다.

 

‘지난 세월 당신을 빼먹은 대가를 이제 와서 톡톡히 치루고 있다는 것을’ - 빼먹은 대가 -

‘그대 생의 넋두리도 내 몫이 되는 것. 그리하여 꽃은 다시 피는 것’ - 다시 피는 꽃 -

“딸에게”에는 출가하는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아비의 애틋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선택한 길이 힘들고 어렵다 해도 부디 두근두근 설레는 길이길’ – 딸에게 -

저자는 혁명가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염원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 대한 동료애도 표현했다. “촛불”을 통해서는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시민들의 위대함을 표현했고, “파업소풍”을 통해서는 세상의 변화를 바라는 순수한 열망을 표현했다. 알베르 까뮈는 모든 혁명가는 압제자 (oppressor)나 이단자 (heretic)로 끝난다고 말한다. 이는 혁명가의 말로가 헤게모니를 쥐고 지배하거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이단이 되는 것으로 끝나는 이유는 그들이 혁명의 동기가 된 순수한 이념과 열정을 망각하고 권력과 자본에 탐닉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간절한 염원 한 점 보태러 간다.’ - 촛불 -

파업은 소풍이야. 잠 못 들고 뒤척이다 새벽녘에 잠든 아이 같은 설렘이야.’ - 파업소풍 -

어쩌면 저자의 시처럼 인생이란 뜨거웠던 젊은 시절의 열기를 조금씩 식히며, 스러져가는 불빛들끼리 조금 더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식탁 위의 밥처럼 뜨거웠던 지난 시절을 조금씩 식히는 것 식탁위의 촛불처럼 꺼져가는 불빛들끼리 조금 더 바라보는 것’ - 인생이란 -

어두운 곳에서는 밝은 곳이 잘 보이지만 밝은 조명 안에서 바라보면 어두운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를 현혹하며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스포트라이트로 인해 땀의 눈물과 소중함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노동으로 일군 삶이야말로 자랑스럽고 떳떳해야 하고, 그 땀의 웃음이 밝고 아름답게 빛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엄니와 데모꾼>을 읽으며 나는 노동이 웃음이 되는 세상, 노동이 보람이 되는 세상을 간절하게 소망한 저자의 진정성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내게 있어 <엄니와 데모꾼>은 '당신의 노동은 안녕한가?'라고 묻는 저자의 질문이고, 먼저 살아본 선배가 나에게 해주는 인생에 대한 조언이며, 세상은 아직 따뜻하고 살아볼 만한 곳이라는 말해주는 한 그릇의 따뜻한 밥이었다. 나는 아직도 우리 가슴 속에는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서도 치유 받거나 구원 받을 수 없는, 오직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구할 수 있는 따스함의 영역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노동자들의 삶에 꿀잠이 깃들길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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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직지 1~2 세트 - 전2권 - 아모르 마네트
김진명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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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의 제목 <직지(直指)>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 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의미한다. 소설을 접하기 전부터 <직지>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민족적 가치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정확한 명칭과 의미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알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학창시절 의무교육을 통해 <직지><직지심경>이라는 불교의 경전으로 오인될 수 있는 이름으로 처음 접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직지>의 정확한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로 이는 '백운화상이 편찬한 마음의 실체(근본)를 가리키는 선사들의 중요한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직지>는 백운화상이라는 고려시대 고승이 역대 선승들의 선문답을 정리한 '요절(要節)'로서 부처의 말씀을 아난존자가 옮겨 적은 걸 의미하는 '불경(佛經)'이 아니다. (직지 151)

 

앞의 것이 이미 사라지는가 하더니 뒤의 것이 다시 생기고... 앞과 뒤가 이어져 진리에 닿을지니.(직지 191

 

소설을 접하기 전에는 고려시대 불경의 보전을 위해 청주의 작은 사찰에서 탄생한 현존 최고(最古)의 금속 활자본이라는 것이 <직지>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주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며 <직지>의 정확한 명칭과 의미에 대해 알 수 있었고, 나아가 <직지>가 담고 있는 가치도 새롭게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앞과 뒤가 이어져 진리에 닿는다.<직지>의 문구처럼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과 새롭게 깨달은 진리의 파편들을 완전한 것으로 착각하는 데서 벗어나 끊임없이 진리를 향하여 다가설 것을 독려하는 <직지>의 위대한 통찰,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진실에의 접근을 시도하는 소설 <직지>와도 그 맥을 같이 하는 듯 했다.

 

2권으로 구성된 소설 <직지>는 창으로 심장을 관통당한 채 귀가 잘리고 목에 흡혈의 흔적까지 남아있는 참혹한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1권은기자인 '기연'이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잔혹한 살인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와 <직지>와의 연관성을 발견하게 되고, 이렇게 미스터리한 살인사건의 진실은 <직지>의 미스터리로 연결된다. 2권에서는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적 사실에 작가적 상상력이 가미되어 탄생한 조선의 여인 '은수'<직지>와 구텐베르크의 연결고리가 되어 조선과 유럽을 무대로 펼치는 활약을 다룬다.

 

저자는 '최고의 목판본 다라니경에서부터 최고의 금속활자 직지, 최고의 언어 한글, 최고의 메모리 반도체'로 이어지는 흐름을 언급하며 지식의 전파와 보급의 측면에서 인류의 지식정보혁명에 기여해온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직지 17) <직지>와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의 직접적인 관련성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지식과 정보를 전파하고 공유하려는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알파벳과 문장부호 등을 포함해서 약 60자 정도만 주조하면 되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에 비해 <직지>는 수많은 한자를 주조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금속활자 인쇄의 장점은 수많은 활자를 미리 주조해두고, 필요한 것만 가져다 조판하여 빠르게 인쇄할 수 있다는 것인데 <직지>는 한자가 갖는 언어적 특징 때문에 장점을 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탄생하기 이전에 세종대왕은 한글을 반포했다. 한글은 만든 목적이 분명하고 만든 사람과 만든 시기가 분명한 세계 유일의 언어이다. 글을 모르고는 지식을 습득할 수 없고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생활의 향상, 문화의 향상을 도모할 수 없다는 애민정신과 실용주의를 기반으로 탄생한 한글은 오늘날 우리가 학문적,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소설 속에서 과거의 '은수'와 현재의 '기연'<직지>의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연결된다. 그들이 닿고자 했던 진리, 애써 전하고자 했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은수는 목에 걸린 은십자가 목걸이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목걸이에 새겨진 글귀를 되뇌었다. '템푸스 푸지트 아모르 마네트 (Tempus fugit Amor Manet)', 은수는 라틴어를 깨우치면서 이 글귀가 '세월은 흘러도 사랑은 남는다.'는 뜻인 걸 알게 되었다.(직지 2157

 

인간이란 무엇일까? 욕망을 품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고 그 욕망을 어떻게 조절하고 통제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가장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이었다. 이는 진리는 감각으로 경험하는 현실이 아닌 이성으로 인지하는 이데아(idea)에 있다는 플라톤의 주장이나 사사로운 욕심에서 발생하는 마음인 '인심(人心)'과 인의예지라는 본성에서 기인하는 '도심(道心)'과 관련한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론 논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설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인간에게는 행복이 최고의 목표가 아니야. 인간은 때때로 행복보다 불행을 택하기도 해. 그게 더 의미가 있다면...(직지 289)

 

소설에서 과거에서 또 현재에서 진리를 추구했던 두 여인이 깨달았던 것은 부처의 지혜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받아들여져 온 우주가 연꽃같은 장엄함으로 가득찬 세계가 된다는 '화엄경'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 아닐까? 연약하기 짝이 없는 작은 싹이 혼신의 힘을 다해 그 무거운 흙의 무게를 이겨낸 후 땅 위로 몸을 내미는 순간의 장엄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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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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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은 102세의 베르트 할머니와 경찰의 대치 상황으로 시작한다. 결국, 할머니는 옆집 남자를 총으로 쏘아 부상을 입히게 되고, 이 일로 인해 경찰서로 가서 그를 왜 쏘게 되었는지 심문을 받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자택의 지하실에 몇 구의 시체가 있음을 자백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체들이 왜 그곳에 존재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아픈 삶의 기억들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한다.

   

 

, 다시 시작할까요? 시신이 총 일곱 구가 발견됐고, 부인은 세 차례의 살인을 자백했어요. 나치 한 명과 두 남편, 나머지 네 명은 누구죠?“

마찬가지야.“

마찬가지라니, 뭐가요?“

괴물들이라고, 또 다른 괴물들.“

    

 

그녀가 이렇게 살인으로 얼룩진 삶을 살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은 살인자로 대표되는 그녀의 표면적인 삶, 그 이면에 존재하는 것들을 그녀의 삶의 궤적을 거슬러 올라가며 조망한다. 그녀의 삶의 이면에는 20세기를 지나쳐오는 동안 그녀가 만나왔던 지극히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 남성 중심의 역사로 인한 폭력과 억압이 있었다. 그녀가 만난 남성들은 설득력 있는 반대 논리를 펼치는 대신, 보다 충격적인 논리를 선택했다. 그것은 물리적 폭력과 착취, 모욕이었다. 이는 부족한 지성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여자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손쉬운 방식이었고, 남자들은 늘 그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해왔다. 그녀가 겪어온 남성들은 전쟁을 이용해 그녀의 몸을 탐하려고 한 군인, 가정폭력범, 위선자, 인종차별주의자, 자신의 콤플렉스를 비뚤어진 방식으로 아내에게 투사하거나 자신만의 망상에 빠진 자들이었다. 그녀에게 그들은 괴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 맞선 그녀의 대응방식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전 법을 믿어요."

"그럼 날 지켜줘야 할 순간엔 어디 있었니? 정의와 법은 정략결혼처럼 서로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야. 오래오래 천천히 죽이는 건 살인으로 치지들 않지. 아내를 때리고, 고문하고, 파괴하는 남편은 법으로 처벌받지 않아...“

증거만 있다면, 처벌받습니다.“

넌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내보일 수 있니?“

    

 

그녀가 오랜 기간 남성들로부터 억압을 받으며 빛을 잃어갈 때, 절실하게 정의와 법을 필요로 했을 때, 정의와 법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의 규칙에서 그녀의 삶을 보장받는 것을 바랄 수 없었고, 처절한 현실 속에서 오직 살기 위해, 생존을 위해 그녀만의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어린 시절 그녀의 수호천사였던 나나 할머니가 그녀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지금 사람들이 수군댈 걸 걱정하는 거야......? 인생은 짧아, 이것아...... 세상의 규칙 따위...... 아무 상관없다고...... 살아야 해...... 할미 말 들어!“

 

    

 

"나는 행복했고, 만족했으며, 이보다 더 좋은 삶을 알지 못합니다. 삶이 내게 준 것들로 나는 최고의 삶을 만들었어요. 결국 삶이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언제나 그래왔고, 또 언제까지나 그럴 겁니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에서)

    

 

모지스 할머니가 자전 에세이 <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에 남긴 말이다. 모지스 할머니는 화가를 꿈꿨지만, 삶의 무게로 인해 76세가 되어서야 붓을 잡았고, 10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녀는 88세에 '올해의 젊은 여성'으로 선정되었고, 93세에는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으며, 100번째 생일은 '모지스 할머니의 날'로 지정되었다. 그녀는 그녀가 살아낸 삶과 삶의 순간순간을 표현한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누구나 다른 삶의 밀도와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소설 속 베르트 할머니와 같은 삶이 있다면, 모지스 할머니와 같은 삶의 방식도 존재한다. 우리가 그들보다 높은 밀도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베르트 할머니의 삶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베르트 할머니를 눈앞에 드러나 있는 표면적인 삶만으로 평가하기 이전에 그녀가 자신의 행위가 아닌 역사적, 사회적 맥락으로 희생되고 상처를 입었던, 그 이면의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소설을 읽게 될 당신도 현실의 삶 앞에 당당할 수 있기를, 또 그녀처럼 열정과 유쾌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당신은 그리 고생스러워 보이지 않는데?"

"내가 어떤 길을 지나왔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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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인문학 수업 - 인간다움에 대해 아이가 가르쳐준 것들
김희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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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진의 <돌봄 인문학 수업>을 읽으며 공감했던 것은 인간다움에 대해 아이가 가르쳐준 것들이라는 책의 부제처럼 육아라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 부모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성숙해진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아이를 돌보며 겨우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부분은 아이를 돌본다는 행위가 주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가져다주는 빛나는 통찰들이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 무엇보다 나를 경악케 한 것은, 출산의 고통도 아니고, 모유 수유의 고통도 아니고, 아기가 정말로, 너무나,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지나치게 사랑스럽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너무 사랑스러운데 그 아이를 돌보는 일은 너무 힘들어서, 그 불균형 때문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특히 저자는 일과 사랑, 성취와 돌봄의 양립 문제를 동요 섬집 아기와 연관하여 풀어내고 있다. ‘섬집 아기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동요 중 하나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학창 시절에 접했던 익숙함과 더불어 최근에는 아이와 함께 듣는 동요 모음집에도 포함되어 있어 친근함이 느껴지는 노래였다. 하지만 동요 섬집 아기에 가지는 친근함은 동요의 1절에 국한된다는 걸 <돌봄 인문학 수업>을 읽으며 깨달았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 잠이 듭니다.” (섬집 아기 1)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섬집 아기 2)

    

 

익숙한 1절을 지나 만나게 되는 2절에는 일과 돌봄의 양립을 위해 애쓰는 엄마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삶을 위해 굴을 따면서도 갈매기 울음소리에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집에 남겨진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모랫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오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어머니 말이다. 섬집 아기의 1절에 가려져 있는 2절의 의미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아이를 키우면서 또, <돌봄 인문학 수업>을 접하면서 새로 알게 된 인생의 의미였다.

    

 

저자는 모든 인간이 자기 마음속에 자신만의 특별한 부모, 양육자의 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현실의 부모가 부재하거나, 부모와 아이가 너무 달라서 서로 이해하기 어렵거나, 부모가 정신적, 정서적 자원이 부족해 아이를 양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자신들 내면의 양육자 상을 통해 에너지를 보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양육자 상이 주로 모성의 이미지인 것은 기술적이고도 역사적인 한계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돌봄과 육아의 이론은 존재하지 않듯이 그것은 모성의 이미지도, ‘부성의 이미지도 될 수 있고 그보다 훨씬 더 기상천외하고 다양한 이미지가 될 수도 있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돌봄이 둘이 함께 추는 춤, 상호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대목을 읽으며 인디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의 가사가 떠올랐다.

    

 

"우린 긴 춤을 추고 있어. 자꾸 내가 발을 밟아. 고운 너의 그 두 발이 멍이 들잖아. 난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해. 이 춤을 멈추고 싶지 않아. 그럴수록 맘이 바빠. 급한 나의 발걸음은 자꾸 박자를 놓치는 걸. 자꾸만 떨리는 너의 두 손."

 

 

저자의 말처럼 돌봄은 둘이 함께 추는 춤이다. 하지만 혼자서는 절대 출 수 없는 춤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선율에 맞추어 추는 춤은 아름다운 장면만 담기지 않는다. 때론 춤을 추는 과정에서 상대의 발을 밟기도 하고, 때로는 박자를 놓쳐서 상대가 손을 떨게 만들기도 한다. 이는 어떠한 형태의 인간관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어떤 인간이든 저 안쪽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모든 아이는 각기 특별하게 태어나며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사랑의 눈으로 그 특별함을 발견하고 잘 자라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가장 가까이 깊숙이 들여다보는 사람이 부모라면 아이들에게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도 부모가 아닐까? 아이와 가장 가까이 오랫동안 접하는 사람은 부모기 때문에 아이의 개성과 자질, 좋아하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도 부모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물론 그 과정은 부모가 아이를 향한 일방적인 것이 아닌 상호교감이 이루어지는 둘이 함께 추는 춤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돌봄과 함께 성숙해가는 그 아름다운 과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지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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