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러시 - 우주여행이 자살여행이 되지 않기 위한 안내서
크리스토퍼 완제크 지음, 고현석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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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위대한 개츠비 -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항상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인간은 현재의 삶을 딛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저마다 개별적 삶을 살면서도 타인과 또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시대를 이루고그것이 되풀이되고 순환되는 과정을 거쳐 역사를 이루며 발전하는 인간의 삶이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별자리는 저마다 거리와 밝기가 다른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또한각각의 별들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제각기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하지만 별들은 인간의 가시거리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먼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별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해내지 못하고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군집된 별자리로 인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도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직선적 사건이 아닌별자리처럼 시공간이 뒤섞인 원심형의 배열에 가깝다. 동시대에서 같이 호흡하면서도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한때에 머무르고또 누군가는 현재를 넘어 미래를 향해 있는 것은 인간이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 (Kronos)' 보다 주관적이고 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 (Kairos)'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것인 동시에 미래를 꿈꾸고 호흡하게 하는 두 번째 심장이다상실과 결핍몰이해라는 인간의 현실적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의 삶이 군집을 이룬 채 살아가는 별들과 서로 닮아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예전부터 우주를 대상으로 하는 SF 소설을 좋아했다. 현실에서 느끼는 상실감과 결핍에서 벗어나 저 반짝이는 아득한 공간을 향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또한, 세월의 흔적을 걷어내고 바라보면 SF 소설의 주인공들도 저마다가 직면한 세계에 맞서 살아가는 우리와 똑같은 존재라는 동질감도 느낄 수 있었다. SF가 그리는 미래의 어느 시점은 그 아득한 시간의 간극이 걷히면 또 다른 우리의 모습으로 남는다언젠가 우리도 현재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한 누군가와또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존재와 공존하면서 전혀 다른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TO INFINITY AND BEYOND!)”

 

우리가 바라는 모든 꿈은 계속할 용기만 있다면 모두 이루어진다고 말한 월트 디즈니의 말을 대변하듯이 디즈니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에서 버즈 라이트이어는 무한한 공간 저 너머를 향한 꿈과 희망을 설파하고 있다. 현실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는 집단적 경험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맨 오브 라만차에서 보았듯이   사람만 믿는 이야기일지라도  꿈이 강렬하고 진실하기만 하다면 꿈은 공유되고 전파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반대로 고리끼의 희곡 밑바닥에서는 희망은 누구에게나 절실한 것이지만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장밋빛 희망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밑바닥 삶들 앞에 어느 날 찾아온 노인은 희망이 되지만 노인이 사라진 후 희망에 가득 차 있던 이들은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서 꿈과 현실의 간극만큼의 충격을 안고 이전보다 더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때로는 희망도 어떤 이들에겐 독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절망은 '헛된 희망'을 동반하는 것이다.

 

우주기술과 우주탐사는 미래파의 도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지금, 그리고 여기의 문제인 것이다.” (p. 365)

 

아이직 아시모프 이후 우주탐사에 관한 최고의 책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스페이스 러시>우주 여행이 자살 여행이 되지 않기 위한 안내서라는 부제처럼 우주라는 공간을 냉철한 시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책이다. 현시점에서 인류가 확보한 과학기술을 통해 어떤 것이 가능하고, 어떤 것은 다소 문제가 있으며, 어떤 것은 그저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SF에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허황된 희망들, 예를 들어 워프 속도로 여행하는 텔레포트 (순간이동)이나 테라포밍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의 환경을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것) 등을 통해 지구 밖에서 지구 보다 호화롭게 살 가능성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NASA의 수석작가로도 활동한 저자 크리스토퍼 완제크는 지구에 야기되고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는 곧 위험이 닥칠 거라는 생각 때문에 지구를 떠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스페이스 러시>라는 제목이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는 정부간 체제의 우월성을 가리는 경쟁의 무대에서 벗어나 민간 기업들이 우주를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며 경쟁하는 뉴 스페이스의 시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인류가 물에 다리를 놓고 하늘에 길을 냈듯이 언젠가는 인류가 자연스럽게 우주로 진출해 진화를 향한 대담한 첫 걸음을 내딛을 것이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시점을 기준으로 본다면 인간의 우주탐사는 지구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의 인류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테드창의 소설 <거대한 침묵>은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멸종위기에 처한 앵무새들이 인류에게 “잘 있어사랑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지만 무심한 인류는 이마저도 인지하지 못한 채 지성을 가진 외계 생명체를 찾기 위해 광대한 우주를 향해 고정되어 있는 아레시보 전파 망원경에만 귀를 기울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이처럼 우리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편견과 집착에 사로잡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거나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트럼프의 아르테미스 계획의 허황됨을 비판하면서 현재의 지구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우주를 바라봐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보며 지식의 최대 적은 무지함이 아니라 허황된 지식이라는 스티븐 호킹의 말이 떠올랐다저자가 <스페이스 러시>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세상의 흐름에 떠밀리지 말고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아닐까그것이 비록 광속이나 워프 항법의 속도에 한참 못 미치는 저속이라고 하더라도 그 방향만 정확하다면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그곳에 매번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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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 고종의 밀사 헐버트의 한국 사랑 대서사시
김동진 지음 / 참좋은친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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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 2019년은 2 8 독립선언과, 3 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였다. 2019년에 나는 100년의 그 때처럼 동경 재일본 한국 YMCA에서 열린 2 8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191928일 그렇지. 그땐 우리에게는 오직 독립뿐, 좌도 우도 없었다.'

 


기념식에서 2 8 독립선언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나라 잃은 식민지 청년들의 독립을 향한 순수한 열망을 느꼈다. '사람', 그리고 ''은 좌우 이데올로기의 시각만으로는 결코 재단할 수 없는 것이고, 여기서 벗어나야만 '사람', ''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린 언제부턴가 이를 잊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

 


2019년은 이념에서 벗어나 '사람', ''을 향한 진심을 보여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Homer B. Hulbert) 박사의 70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헐버트 박사의 70주기를 기념하여 헐버트 박사 기념 사업회 회장인 김동진씨는 헐버트 박사의 일대기를 정리한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를 발간하였다. 이전에도 김동진씨는 최초의 헐버트 평전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과 헐버트 박사의 논문 57편을 우리말로 옮긴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를 저술한 바 있다.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는 한국은 물론 미국과 일본에 남아 있는 헐버트 박사의 드러나지 않은 행적을 추적하여 그의 생애를 총괄적으로 정리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3 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는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국민 참여 기념사업' 도서로 선정하였다.

 


헐버트 박사는 조선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 '육영공원'의 교사를 역임한 교육학자였고,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한 한글학자였다. 또한, 최초의 종합역사서이자 근대 역사학의 출발점으로 평가 받는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와 한민족의 역사, 문화, 생활상을 집대성하고, 을사늑약의 부조리를 표출한 '대한제국의 종말(The Passing of Korea)'를 저술한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헐버트는 YMCA를 탄생시킨 선교사이자 계몽주의자이기도 했다. 헐버트는 YMCA는 선교를 넘어 교육, 계몽을 포괄하는 사회단체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헐버트가 기초한 한국 YMCA 헌장의 핵심내용은 'YMCA의 목적은 교육, 계몽, 선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한국인들을 위해 싸울 것이다. 그들은 모든 권리와 재산을 빼앗겼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들을 대변할 것이다." (P. 325)

 


헐버트 박사가 남긴 여러 행적들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한국인들 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는 건 헐버트 박사를 대표하는 수식어처럼 그의 모든 행적 저변에 깔려 있는 한국과 한민족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단순한 사랑을 전하는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헐버트는 그의 일생을 걸고 투쟁했다. 맹목적으로 한자만을 고집하던 사대부들의 보수성에 맞서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하며 한글 전용을 주장했고, 주권침탈의 야욕을 드러냈던 청나라, 러시아, 일본에 한국을 대변하여 맞섰다. 이를 위해 언론을 통해 고국인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한국과 한민족의 사회 문화적 우수성을 알렸다. 헐버트 박사가 1889년 한글의 우수성을 뉴욕트리뷴지에 기고하며 한글의 자모를 최초로 소개했다는 사실과 을사늑약 저지를 위해 고종 황제와 전보를 주고받았다는 기사(뉴욕타임스)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처음 공개하는 사실들이다. 또한, 헐버트 박사는 을사늑약의 무효화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위한 고종 황제의 특사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의 역사는 투쟁과 부역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고통스럽고 핍박 받는 현실 속에서도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응답했던 사람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까지도 기꺼이 감수했던 이들이 있었던 반면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 이들도 존재했다. 한국인들마저 국가와 민족에 반하는 삶을 택한 엄혹한 시기에 한국에 아무런 의무가 없는 한 이방인에 불과했던 헐버트 박사는 어떻게 자신과 가족의 삶까지 희생하며 이렇게까지 한국과 한민족을 위해 행동할 수 있었을까? 한민족의 한과 얼이 서려 있는 구전 민요 '아리랑'의 가사를 최초로 채록하고 서양 음계로 채보한 사람이 헐버트 박사라는 사실은 그 진실의 조각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원칙이 승리보다 중요하다.'는 헐버트가의 가훈으로부터 형성된 그의 인간애가 한국과 한민족 특유의 '()'을 만나 언어와 논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결과를 이끌어낸 것이 아닐까?

 


헐버트는 자신이 보유한 다양한 학문에 대한 스펙트럼을 한국에 기꺼이 공유해주었고,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한국의 시대적 아픔에 공감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헐버트 박사는 올바른 가치관의 형성도 중요하지만 그 가치관을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그의 삶을 통해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헐버트의 삶에 대해 1909년 안중근 의사는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라고 말했고, 그의 사후 7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저자 김동진은 "헐버트야말로 조선의 척박한 현실을 마다 않고 한민족에 동화한 진정한 한민족의 벗이자, 바른 삶의 좌표를 행동으로 제시한 가치관적 영웅이었다."고 응답하고 있다.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단편적 사건들의 단순 합이 아니라 시대를 구성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요소들의 총체인 동시에 이들이 빚어낸 유기적 결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의 진정한 주역은 어쩌면 민족과 국가를 위한 진심을 보이고 사라져간 민중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민중들이 아닐까? 민중이란 특정 계급이나 계층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국가와 사회를 이루며 역사를 구성하는 유동적인 계급, 계층의 연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민중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학생, 노동자, 농민, 상인들은 당시 시대상황을 정확히 꿰뚫어보지는 못했지만, 어떤 사건이나 교육을 계기로 민족의 앞날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행동하였고, 이를 통해 역사의 진보를 이루어내었다. 이렇게 교육 및 계몽을 통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위대한 힘의 존재기반은 민중에게 있으며, 이는 핍박과 분열, 갈등이 빚어낸 시대의 소음 속에서 일순간에 타오른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 이들이 있었다. 푸른 눈의 한국인, 한국인 보다 한국과 한민족을 더 사랑했던 헐버트 박사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에게 헐버트 박사의 삶이 갖는 의미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하나의 그림이 있다. 바로 윌리엄 터너의 명화 <전함 테메레르>.


 

영화 <007 스카이폴>에는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뒤로하고 나이가 들어 노쇠한 스파이 제임스 본드가 내셔널 갤러리에서 한 점의 그림을 응시하고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쓸쓸한 뒷모습을 여과 없이 노출하며 그가 바라본 그림은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였다. 테메레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순간에 조국을 구하고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영웅이었다.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flagship) 빅토리호를 구하고 두 척의 배까지 나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은퇴의 기로에 선 스파이는 그림 속 범선을 보며 세월의 무게와 시대의 변화를 읽었던 것일까? 인간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처절하고 애잔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새삼 놀라고 감동받았던 기억이 있다.

 


윌리엄 터너와 그의 대표작 <전함 테메레르>'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를 대신하여 2020년부터 영국 20파운드 지폐의 새로운 모델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전함 테메레르>BBC에서 선정한 가장 위대한 영국 그림으로 꼽히기도 했다. 터너와 그의 작품 <전함 테메레르>가 영국인들에게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트라팔가 해전 승리후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이 조성되었고 광장의 중앙에는 승장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졌다. 넬슨이 승선했던 기함 빅토리호는 포츠머스 해군기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반면 1838년 영국 해군은 테메레르호를 런던의 운수업자에게 팔아넘겼고 배를 산 운수업자는 배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템즈 강가로 산책을 나간 터너는 이 위대한 선박의 마지막 항해를 그림으로 남겼던 것이다.



트라팔가에서 테메레르는 넬슨 제독의 생명을 구하진 못했지만 조국 영국을 구했다. 테메레르의 빅토리호 구원이 없었다면 19세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아닌 저물어가는 일몰이었을지도 모른다. 윌리엄 터너는 시대를 빛내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영웅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기억하는 넬슨 제독, 빅토리호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테메레르도 있었다고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라고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그를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이름 없는 민중들,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역사의 페이지에 그들의 몫도 있을까? 헐버트 박사는 그의 생전 소망대로 서울 마포 양화진에 묻혔다.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이었고, 이듬해인 1950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이 추서되기도 했다. 또한, 20137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고, 2014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과 2015년 서울아리랑페스티벌, 1'서울아리랑 상'에 추서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그에 대한 예를 다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윌리엄 터너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를 기억해주어야 한다. 그의 정신과 투쟁, 숭고한 희생은 <전함 테메레르>가 되기 충분하다. 헐버트 박사는 자랑스러운 우리 과거의 일부분인 동시에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고독한 걸음을 내디딘 이름 없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웨스터민스터 사원 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헐버트 박사는 이제 한국인의 가슴 속에 묻혀 영원히 불멸의 생을 이어갈 것이다. 이것이 우리 한국인들이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예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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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1-11-22 0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을 축하하러 오시지 않았다면 조금 더 오래 가족 곁에 머물러 사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정말 한국인들은 그를 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잭와일드 2021-11-22 09:52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당시 80대 후반의 고령이셨고, 여독까지 겹쳐서...
 
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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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는 문학지망생인 두 청년 '나'와 '빌리'의 가장 뜨거웠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은 그 시절에 관계의 '형성''단절'이 남긴 균열의 흔적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가시적이고 의도된 폭력이 아닌 가시화되지 않은 무의식적인 폭력을 조명한다. ‘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자신의 작은 모서리를 쓰다듬어주고 지지해주는 빌리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는 그 행복은 상대에 대해 또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깨닫는다.

 


"우리가 글 쓰고 있는 거, 사진으로 한 장 찍자."

"증거로 남겨놔야지. 우리의 덧없는 청춘을. 언젠가 그리워하게 될 테니까." (p.147)

 


는 행복했던 순간을 박제화시킨 사진 속 순간처럼 영원을 꿈꾸지만, 그들의 관계는 프레임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초점 나간 사진처럼 불안정했고, 결국 영원이 아닌 멈춤과 단절을 향해 나아간다. ‘는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위태롭고 위험한 것인지, 또한 사람은 그런 식으로 쉽게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관계가 남긴 흔적을 통해 깨닫게 된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이로움만을 건네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을까? 중력도 마찰력도 없는 세계에서 멈추지 않고 영원히 굴러가는 구와 같은 삶은 바람직한 삶일까? 우리는 관계의 미숙함으로 인한 상실의 경험을 아프게 회고하지만, 서로에게 무해한 존재라는 것은 때론 위안이 아닌 상처로 다가온다. 비록 부정적인 방향이지만 상대를 아직 요동치게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런 식으로라도 감정적인 교류를 나누며 관계에 아직도 피가 흐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이 때론 우리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의도의 유무를 떠나 누군가에게 상처와 해를 끼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처와 균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일 수 밖에 없다. 함께라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 방식,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들지만, 우리는 삶의 흔적, 아픔을 매개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이해하고 위로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해는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와 무시, 거부를 넘어서야 하고, 또한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 세상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이해를 이용하는 위선을 극복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삶의 고통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진정한 위로의 경험을 얻는다.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서도 치유 받을 수 없는 오직 사람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밝은 곳에서는 어두운 곳이 잘 보이지 않지만, 인간은 서로 간에 존재하는 적당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과 온기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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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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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음습한 지하 여인숙은 이 곳에 살고 있는 밑바닥 인생들의 이력만큼이나 어두운 무채색의 기운이 감돈다. 어느 날 이 곳 밑바닥 인생들 앞에 정체불명의 한 노인이 찾아온다. 노인은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버티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독려한다.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점차 그의 희망 섞인 말에 기대를 걸고 꿈꿔왔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노인은 사라지고 희망에 가득 차 있던 이들은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 꿈꾸던 삶과 현실의 간극 (間隙) 만큼의 충격을 안고 이전보다 더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때론 희망도 어떤 이들에겐 독(毒)이 된다.“

고리끼의 희곡 <밑바닥에서>는 희망과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 희망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노인 '루카'는 절망에 빠진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면서 궁극적으로 이들에게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희망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일까? 그 형태와 방식에 있어서 저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어도 힘든 현실에서 공감과 위로는 누구에게나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밑바닥에서>는 이에 동의하면서도 '희망'의 무게와 진정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희망은 ‘절망을 버텨내는 동력‘이 될 수 있는 반면 절망의 늪에 더 깊숙히 빠져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드는 ‘무책임한 거짓‘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 말이다. 희망은 때론 더 나은 삶을 위한 빛이 되지만 때로는 그 희망이 현실에 기반하지 않을 때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

모드 쥘리앵의 <완벽한 아이>는 김영하의 북클럽을 통해 접하게 되었다. <완벽한 아이>에는 인간은 더없이 사악한 존재이고, 세상은 더없이 위험한 곳이며, 이렇게 오염된 세상의 기운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후계자를 키워내 언젠가 세상을 구원할 존재로 만들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가진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은 전부 딸의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 라고 되풀이해 말한다. 중년 이후의 삶을 온전히 자신의 딸이 예외적 존재가 될 운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딸의 형체를 빚고 조각하고 키워내는 일에 바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살아온 삶과 개인적 체험에서 기반한 비뚫어진 세계관을 딸에게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오염된 세상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아버지가 선택한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세상과 단절된 집 안에서만 칩거하면서 딸에게 오염된 세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초인이 되는, 불가능한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아버지의 계획하에서 어린 딸이 겪어야 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삶이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위치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이를 대표하는 상징적 공간이다. 우리가 꿈꾸는 삶에서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은 집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와 같은 노래 가사처럼 저마다 그리는 이상향에는 저마다의 취향과 가치관이 투영된 ‘집‘이 있다. 우리가 집에 가진 고집들은 단순한 취미나 기호에 머물지 않는다. 개인의 가치관과 숨겨진 욕구가 드러난다. 또한, 그것은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 과거에 뿌리내리고 있다. 과거의 지나온 삶이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는 것이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세상과 완벽히 단절된 벽을 쌓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것을 택한 것은 아버지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반추하며 결정한 그 자신만의 유토피아라 할 있다. 직접 보지 않아도 신산했을 그의 삶에 일정 부분 동정이 가면서도 인격이 형성되지도 않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구축한한 세계 안에 갖혀 삶을 박탈 당한 주인공 '모드'의 삶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나 자신의 결점들과 싸운다." (P. 38)

"진짜 슬픔은 다른 데 있다. 아무도 모르게, 나는 초라한 삶을 동경한다. 나는 아버지를 배신한 딸이다." (P. 183)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토피아를 꿈꿀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현재의 삶을 딛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서 바람직한 사회나 미래에 달성해야 할 모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토피아니즘은 기본적으로 희망의 철학이다. 하지만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의하는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는 절망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이 주장하는 유토피아를 사회가 추구해야할 유일한 대안으로 강조할 때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변질될 수 있다. 누군가 바람직한 미래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것을 거부하는 타인에게 강요할 때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모드는 절대적인 아버지가 구축한 좁고 빈틈없는 세계 안에서 앞에서 아무런 의지와 생각 없이 지체없이 땅에 구멍을 파야하는 나사송곳이었다. 모드가 내릴 수 있었던 유일한 결정은 밤마다 자신 스스로를 학대할 때 언제, 얼마동안 자신에게 벌을 줄 것인지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삶은 유지될 수 있었다. 인간적인 삶이 불가능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모드의 영혼은 잠식 당하지 않았다. 기형적인 가족관계와 그 자신 조차 피해자인 어머니,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게 불가능한 상황... 그 텅빈 침묵 속에서 모드는 동물들에게서 놀라운 위안을 얻는다. 인간적인 교류와 유대관계는 없었지만 모드는 절망적인 유년기 동안 자신과 함께했던 개, 조랑말, 오리와 조건 없는 사랑을 주고 받았다. 또한, 책과 음악을 통해 아버지가 구축한 세계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에드몽 당테스와 <변신>의 그레고리 잠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고 용기를 얻었고,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를 들으며 다른 세상을 꿈꿨다. 절망적 환경 속에서도 인간은 사랑과 무한한 상상력을 통해 인간성의 회복과 자유를 지향할 수 있다는 것을 저자 모드 쥘리앵은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해내었다.

삶은 예측불가능한 정글과도 같다. 정글은 인간의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거대한 세계이자 인간을 구속하고 제약하는 현실이다. 인간은 삶과 죽음을 모두 포용하고 있는 정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환경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절망 속에서만 머무르진 않는다. 때론 환경에 순응하고 적응하면서, 또 때론 맞서 싸우고 극복하면서 삶을 이어 나간다. 정글과 같은 삶을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상실과 결핍, 아픔들은 자연스럽게 삶의 한 부분으로 녹아 든다. 인생을 살아가는 간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씩 퇴보하고 소멸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죽음을 예정하고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삶 속에서 인간적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존재와 소멸의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정글과 같은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절망속이라 해도 함께 있다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과,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인정’ 그리고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다. 그것은 환경의 제약 속에서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삶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흐릿하게 잡힐 듯 떠오르는 희망에 대해, 삶의 온기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우리가가 그토록 잡고자 했던 불분명한 현실의 경계를 너머 표류하고 있는 진실의 조각은 이것 아닐까?

“나는 안다. 가능한 방법은 언제나 있다. 자유는 무엇이든 가능하게 한다. 정말로, 무엇이든 가능하다.“ (P. 321)

앞서 언급했지만 고리끼의 <밑바닥에서>를 읽고 난 후 '희망의 진정성'의 문제는 한동안 내 화두였다.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장밋빛 희망이나, 상대방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응원과 조언은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는 독이 되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완벽한 아이>에 등장하는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모드 쥘리앵의 믿을 수 없는 실화는 이런 내 생각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모드의 탈출은 극적인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삶에서 빚어지는 보일듯 말듯 한 틈을 작은 노력들로서 파고들어 만든 결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력들은 말 못하는 동물들의 사랑과 주위의 응원이 담긴 눈빛과 말 한마디, 더 나은 삶이 가능하다는 상상력과 용기로 비롯된 것이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인해 벌어지는 희망의 진정성에 대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현실과 꿈의 간극을 메우면서 희망의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건 이러한 작은 노력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멀리 보이는 지평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누구도 지평선을 빼앗긴 채 살아서는 안 된다." (P.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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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11-14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읽었는데 좋은 리뷰 덕분에 감동이 다시 새록새록 떠 오르네요!ㅎ 감사드립니다!

잭와일드 2021-11-15 09:05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홍범도 - 송은일 장편소설
송은일 지음 / 바틀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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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너스 (Cygnus)는 여름밤 한가운데에서 빛나며 여름철 별자리의 기준이 되는 백조 모양의 별자리다. 두 날개를 활짝 편 채 거대한 십자가를 그리며 우아하게 날아가는 새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2021815일 대한민국의 영공에는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시그너스가 찬란하게 빛났다. 청산리·봉오동 전투 101, 서거 78년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실은 수송기 '시그너스'를 대한민국 공군이 운영하는 6개 전투기종이 총출동하여 양쪽에서 호위하는 모습은 밤하늘의 시그너스 보다 더 아름답게 지켜보는 국민들의 마음을 수놓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홍범도 장군님의 귀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필승!"


 

간절한 의지와 불굴의 용기로 싸워 끝내 끝끝내 이김으로서 우리 손으로 해방과 자유를 누리고야 말겠다고 전의를 불태운 홍범도 장군이었지만 날로 거대해지는 현실의 적 앞에서 초인의 의지로 지탱해야하는 독립군의 삶이 얼마나 두렵고 외로웠을까? 하지만 종합군사력 세계 6위의 군사 강국이 된 조국으로 공군의 첨단 장비를 동원한 호위를 받으며 귀환하는 장군의 모습을 보면서 그에 대한 부채감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다. 후손들이 이루어 놓은 현재의 대한민국은 그가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 우리가 이리 사는 게지. (P. 374)'라는 소설 속 홍범도 장군의 말과 하늘에서 이를 흐뭇하게 지켜볼 그가 떠올라 가슴이 벅찼다.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우리는 그를 제대로 아는가?'라는 <나는 홍범도>의 저자 송은일의 질문을 마주하면서부터였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홍범도 장군이었지만 나는 봉오동 전투의 승장이었다는 것 외에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가 어떻게 독립군의 삶을 택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전투를 치루고, 어떻게 승리를 이끌어냈는지, 종국적으로 그는 인간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동안 역사적 사건의 연표로서 피상적으로만 기억했던 그의 삶에 대해 내가 관심을 갖고 찾아보게 된 이유이다.

 


홍범도 장군은 타인의 모범이 되라는 아버지의 소망이 담긴 이름 '범도(範圖)'에 걸맞는 삶을 살았다.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출산 후 7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9살에는 아버지마저 떠나보냈다. 그는 머슴, 군인, 제지공장 노동자. 승려, 포수였고, 독립군이 된 이후에도 군자금이 필요할 때는 솔선수범하여 광산과 부두 등 노동의 현장으로 향했다. 스탈린의 강제집단이주 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옮겨간 그는 극장 수위로서 말년을 보냈다. 이 수많은 삶의 형태 중 그의 삶을 가장 잘 대표하는 것은 독립군일 것이다. 그는 군림하지 않는 리더였다. 대의를 위해서는 직위를 구분하지 않았다.

 


독립군으로 살면서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을 모두 잃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오랜 시간 외롭게 삶을 이어왔던 그였기에, 가족을 이루고 남편과 아버지로서 느끼는 평범한 행복은 그가 절실하게 지키고 싶은 것이었을 것이다. 또한, 가족들의 헌신적인 희생이 독립군으로서의 그를 있게 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의 부인 단양 이씨는 적의 회유와 고문에 스스로 혀를 끊어내어 벙어리가 되었고, 굴복 보다는 죽음을 택했다. 장군의 두 아들도 독립전쟁 중 목숨을 잃었다. 한국 정부는 20213.1절 기념식에서 장군의 부인 단양 이씨와 장남 홍양순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만든 '승리와 희망의 역사'입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기 하나로 모여든 무명의 청년들과 동포들이 승리의 주역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추모사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는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응답했던 사람들, 그들의 투쟁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까지도 기꺼이 감수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현장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가족과 동료로서 그들의 삶을 지탱했던 이들이다. 독립운동의 진정한 주역은 어쩌면 민족과 국가를 위한 진심을 보이고 사라져간 민중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단양 이씨들'인지도 모른다. 독립운동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하나의 그림이 있다. 바로 윌리엄 터너의 명화 <전함 테메레르>.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빅토리호를 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그림 속에서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트라팔가 해전 승리후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이 조성되었고 광장의 중앙에는 승장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졌다. 넬슨이 승선했던 기함 빅토리호는 포츠머스 해군기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반면 1838년 영국 해군은 테메레르호를 런던의 운수업자에게 팔아넘겼고 배를 산 운수업자는 배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템즈 강가로 산책을 나간 터너는 이 위대한 선박의 마지막 항해를 그림으로 남겼다. 윌리엄 터너는 시대를 빛내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영웅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기억하는 넬슨 제독, 빅토리호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테메레르도 있었다고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라고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그를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이름 없는 민중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우리는 윌리엄 터너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들을 기억해주어야 한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은 <전함 테메레르>가 되기 충분하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고독한 걸음을 내디딘 이름 없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귀환이 중대한 기점이 되어 이름 없이 스러져간 영웅들의 삶이 다시 조명 받고,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빛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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