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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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음습한 지하 여인숙은 이 곳에 살고 있는 밑바닥 인생들의 이력만큼이나 어두운 무채색의 기운이 감돈다. 어느 날 이 곳 밑바닥 인생들 앞에 정체불명의 한 노인이 찾아온다. 노인은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버티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독려한다.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점차 그의 희망 섞인 말에 기대를 걸고 꿈꿔왔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노인은 사라지고 희망에 가득 차 있던 이들은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 꿈꾸던 삶과 현실의 간극 (間隙) 만큼의 충격을 안고 이전보다 더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때론 희망도 어떤 이들에겐 독(毒)이 된다.“

고리끼의 희곡 <밑바닥에서>는 희망과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 희망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노인 '루카'는 절망에 빠진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면서 궁극적으로 이들에게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희망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일까? 그 형태와 방식에 있어서 저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어도 힘든 현실에서 공감과 위로는 누구에게나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밑바닥에서>는 이에 동의하면서도 '희망'의 무게와 진정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희망은 ‘절망을 버텨내는 동력‘이 될 수 있는 반면 절망의 늪에 더 깊숙히 빠져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드는 ‘무책임한 거짓‘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 말이다. 희망은 때론 더 나은 삶을 위한 빛이 되지만 때로는 그 희망이 현실에 기반하지 않을 때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

모드 쥘리앵의 <완벽한 아이>는 김영하의 북클럽을 통해 접하게 되었다. <완벽한 아이>에는 인간은 더없이 사악한 존재이고, 세상은 더없이 위험한 곳이며, 이렇게 오염된 세상의 기운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후계자를 키워내 언젠가 세상을 구원할 존재로 만들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가진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은 전부 딸의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 라고 되풀이해 말한다. 중년 이후의 삶을 온전히 자신의 딸이 예외적 존재가 될 운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딸의 형체를 빚고 조각하고 키워내는 일에 바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살아온 삶과 개인적 체험에서 기반한 비뚫어진 세계관을 딸에게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오염된 세상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아버지가 선택한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세상과 단절된 집 안에서만 칩거하면서 딸에게 오염된 세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초인이 되는, 불가능한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아버지의 계획하에서 어린 딸이 겪어야 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삶이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위치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이를 대표하는 상징적 공간이다. 우리가 꿈꾸는 삶에서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은 집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와 같은 노래 가사처럼 저마다 그리는 이상향에는 저마다의 취향과 가치관이 투영된 ‘집‘이 있다. 우리가 집에 가진 고집들은 단순한 취미나 기호에 머물지 않는다. 개인의 가치관과 숨겨진 욕구가 드러난다. 또한, 그것은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 과거에 뿌리내리고 있다. 과거의 지나온 삶이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는 것이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세상과 완벽히 단절된 벽을 쌓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것을 택한 것은 아버지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반추하며 결정한 그 자신만의 유토피아라 할 있다. 직접 보지 않아도 신산했을 그의 삶에 일정 부분 동정이 가면서도 인격이 형성되지도 않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구축한한 세계 안에 갖혀 삶을 박탈 당한 주인공 '모드'의 삶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나 자신의 결점들과 싸운다." (P. 38)

"진짜 슬픔은 다른 데 있다. 아무도 모르게, 나는 초라한 삶을 동경한다. 나는 아버지를 배신한 딸이다." (P. 183)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토피아를 꿈꿀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현재의 삶을 딛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서 바람직한 사회나 미래에 달성해야 할 모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토피아니즘은 기본적으로 희망의 철학이다. 하지만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의하는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는 절망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이 주장하는 유토피아를 사회가 추구해야할 유일한 대안으로 강조할 때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변질될 수 있다. 누군가 바람직한 미래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것을 거부하는 타인에게 강요할 때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모드는 절대적인 아버지가 구축한 좁고 빈틈없는 세계 안에서 앞에서 아무런 의지와 생각 없이 지체없이 땅에 구멍을 파야하는 나사송곳이었다. 모드가 내릴 수 있었던 유일한 결정은 밤마다 자신 스스로를 학대할 때 언제, 얼마동안 자신에게 벌을 줄 것인지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삶은 유지될 수 있었다. 인간적인 삶이 불가능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모드의 영혼은 잠식 당하지 않았다. 기형적인 가족관계와 그 자신 조차 피해자인 어머니,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게 불가능한 상황... 그 텅빈 침묵 속에서 모드는 동물들에게서 놀라운 위안을 얻는다. 인간적인 교류와 유대관계는 없었지만 모드는 절망적인 유년기 동안 자신과 함께했던 개, 조랑말, 오리와 조건 없는 사랑을 주고 받았다. 또한, 책과 음악을 통해 아버지가 구축한 세계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에드몽 당테스와 <변신>의 그레고리 잠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고 용기를 얻었고,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를 들으며 다른 세상을 꿈꿨다. 절망적 환경 속에서도 인간은 사랑과 무한한 상상력을 통해 인간성의 회복과 자유를 지향할 수 있다는 것을 저자 모드 쥘리앵은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해내었다.

삶은 예측불가능한 정글과도 같다. 정글은 인간의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거대한 세계이자 인간을 구속하고 제약하는 현실이다. 인간은 삶과 죽음을 모두 포용하고 있는 정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환경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절망 속에서만 머무르진 않는다. 때론 환경에 순응하고 적응하면서, 또 때론 맞서 싸우고 극복하면서 삶을 이어 나간다. 정글과 같은 삶을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상실과 결핍, 아픔들은 자연스럽게 삶의 한 부분으로 녹아 든다. 인생을 살아가는 간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씩 퇴보하고 소멸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죽음을 예정하고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삶 속에서 인간적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존재와 소멸의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정글과 같은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절망속이라 해도 함께 있다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과,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인정’ 그리고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다. 그것은 환경의 제약 속에서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삶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흐릿하게 잡힐 듯 떠오르는 희망에 대해, 삶의 온기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우리가가 그토록 잡고자 했던 불분명한 현실의 경계를 너머 표류하고 있는 진실의 조각은 이것 아닐까?

“나는 안다. 가능한 방법은 언제나 있다. 자유는 무엇이든 가능하게 한다. 정말로, 무엇이든 가능하다.“ (P. 321)

앞서 언급했지만 고리끼의 <밑바닥에서>를 읽고 난 후 '희망의 진정성'의 문제는 한동안 내 화두였다.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장밋빛 희망이나, 상대방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응원과 조언은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는 독이 되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완벽한 아이>에 등장하는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모드 쥘리앵의 믿을 수 없는 실화는 이런 내 생각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모드의 탈출은 극적인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삶에서 빚어지는 보일듯 말듯 한 틈을 작은 노력들로서 파고들어 만든 결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력들은 말 못하는 동물들의 사랑과 주위의 응원이 담긴 눈빛과 말 한마디, 더 나은 삶이 가능하다는 상상력과 용기로 비롯된 것이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인해 벌어지는 희망의 진정성에 대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현실과 꿈의 간극을 메우면서 희망의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건 이러한 작은 노력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멀리 보이는 지평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누구도 지평선을 빼앗긴 채 살아서는 안 된다." (P.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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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11-14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읽었는데 좋은 리뷰 덕분에 감동이 다시 새록새록 떠 오르네요!ㅎ 감사드립니다!

잭와일드 2021-11-15 09:05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