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주민들에게 사랑 많이 받아서 사람을 피하지 않는 고양이가 있는데 

어느 날 새벽 산책하다가 그 고양이를 그 고양이 구역에서 제법 멀리 (적어도 3-40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갑자기 마주쳤었다. 고양이 보고 말하고 그러는 편 아닌데도 갑자기 마주치니까 

저절로 고양이에게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 어. 야 너 여기서 뭐해. (....) 내가 고양이에게 이렇게 말했는데 


그 때 고양이 표정이 

"앗, 그러니까...."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러는 넌(!) 여기서 뭐하냐, 이기도 했다. 

.... 아 이거 표현이 잘 안된다. 내게 경이로운 체험이었는데, 이렇게 쓰고 있어서야 그 경이 따위 

전해지지 않을 거 같다. 그 경이의 정체: 고양이도 나를 바로 알아보았다. 이상한 시간대에 

갑자기 마주치자 고양이도 그 사람이 자기가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드러냈다.............. 


뜻밖에도 오래 오래 신기했던 일이다. 고양이의: 그러는 니는 여서 모하는데?: 

앨런 라이트먼의 책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 그는 어떤 새를 자기집 정원에서 정성껏 돌보았다. 

그 새는 알도 낳았고 새끼가 태어났다. 새끼가 제 힘으로 날 수 있게 되었을 때 새끼들을 데리고 

새가 날아오르면서, 날아오르는 도중에, 바깥에 나와 새들을 보고 있던 그의 눈 바로 앞으로 정주행했다. 

아마 본능에 따랐다면 그는 바로 몸을 피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라이트먼은 그러지 않았고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새들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그는 새들의 눈과 마주쳤다. 자기를 향해 많은 말들을 하고 있던 눈들을. 

새들은 그를 향해 날아오다가 그와 눈을 마주친 다음 위로 솟구쳤다. 


이 얘기도 내가 옮겨 적으니 ㅎㅎㅎㅎ 

'어쩌라고'가 될 뿐이긴 하다. 라이트먼의 글에서도 사실 아주 조금은 그랬는데, 그랬긴 한데 동시에

그가 전하려 하던 그 신비감 '나도 압니다'이기도 했다. 




동물 심리학 주제로 나온 신간 중에 

"우리가 동물을 이해할 만큼 똑똑하긴 한가" 같은 제목 책이 있었던 거 같다. 

Are we smart enough to understand animals? 같은 제목. 


유튜브에서 베프 허스키인 Key와 Sherpa. 

Key는 "오늘 Sherpa가 올 거야"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일어난다. 

바로... 즉각 반응하고 즉각 즐거움에 가득차 뛰어 다닌다. 동물의 이런 기쁨, 그걸 우리가 이해할만큼 똑똑하긴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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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0-31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해할만큼 똑똑한지도 의문이지만, 자극에 즉각 반응할 정도록 몸이 부지런한걸까요? ㅋㅋ

몰리 2020-10-31 10:29   좋아요 0 | URL
인간도 한때는 재차, 삼차 생각하기보다는
몸이 먼저 반응하는 시절이 있었던 게 분명한 거 같기도 해요. 근데 저 허스키 Key는 어린 시절 ㅎㅎㅎ 처음 만난 중요한 개가 Sherpa이긴 했는데 그 점 감안해도 Sherpa를 참으로 순수하고 강렬하게 좋아하고, Sherpa 말 들으면 바로 반응하는게 참 웃깁니다.
 





"블랙홀. 

무에서 유가 나왔다는 것. 

존재의 문제. 철학과 물리학의 접경 지대. 

철학은 너무 중요해서 철학자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


존 휠러 인터뷰 찾아보았는데 이 클립, 7분 지점에서 저런 말씀 하신다. 

특히 마지막 문장. Philosophy is too important to be left to the philosophers.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특히 물리학자들이, 철학에 우호적이지 않은 태도로 비슷한 얘기를 

많이 해왔던 거 같긴 하지만 오늘 아침 들으면서는 (......) 그냥 몰표. 이런 말을 하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해도 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클립이 업로드 되었을 때 

메릴랜드인지 델라웨어인지에서 60대의 존 휠러라는 남자가 피살되어 쓰레기 매립지에서 발견되고 

그게 연방정부를 향한 어떤 메시지가 담긴 살인이었고 ..... 이런 사건이 있었나 보았다. 댓글들이 ㅎㅎㅎㅎ 

60대 피살당한 존 휠러 얘기들을 하고 있음. "사람들아 야 이 바보들아. 다른 사람이야! 이 분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학자였다. 양자 우주론의 아버지시다." 이러는 댓글 나오고. 이런 미친 스레드는 

처음 본다는 댓글도 나오고. 




여름 동안 오래 산책하기가 힘들었는데 

10월 시작하면서 다른 건 몰라도 산책하기가 훨씬 즐겁고 쉬워져서 좋다. 

아침에 늦게까지 어둡다는 것. 시원하다는 것.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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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 의자들마다에 너는 앉았어. 

이런 건가. 


앨런 블룸과 그의 아내. 이 두 사람이 중요 인물인 것인데 

블룸에 대해서, 그와 함께면 못하는 얘기가 없었다, 무엇이든 우리는 말할 수 있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랬다고 같은 얘기가 (그리 대단해 보이는 내용도 아닌) 계속 반복되지만 

미묘한 변주가 있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그가 무얼 말하든 나는 이해한다. 모두. 다.  

내가 무얼 말하든 그는 이해한다. 모두. 다. (...) 위대하다고 느껴진다. 구체적인 사례는 기억을 못하지만 

이 노인들 진짜 별의별, 사소하고 중요한, 멀고 가까운, 자기 전부를 얘기했구나 실감하게 된다. 

그렇게 다 얘기하고 그 모두를 이해하고. 이런 것에 아무 환상 없다고 생각했던 거 같은데 

이들 보면서는 아 재밌었겠다.  


그의 아내 이름은 재니스인데 

이 책에서 그녀 이름은 로자몽(로자몽드). 재니스도 로자몽도 혹시 유태인들에게 흔한 이름인가? 


로자몽. 이 이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 같다. 

어쩐지 웃기게 들리기도 한다. 


인간에게 언어와 사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언어와 사유. 

이것들이 막 신선하게 재출현하는 느낌. 


생전에 나르시스트로 악명이 높았다는데 

아니 이 정도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이해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르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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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전된다 느껴졌던 리 시걸의 문장들은 

벨로우 전기 비평하던 글보다는 다른 글에 있었던 거 같다. 

두 개의 글 같이 읽으면서 두 글이 섞이는 효과가 있었던 듯. 


벨로우 전기 비평하던 글에서 그래도 기억에 남았다 느꼈던 마지막 문단. 

찾아보니 그 문단은 이렇다. 


My father had died a few years before, without my being aware of it until over a year after he died. That is a long, sad, different story. Something caught in my throat as I stood there thinking of Bellow and my father. I had loved many people, but whom did I ever love in the same way that I loved them? Yet I fled from both of them. I wished — almost — that Bellow was there to tell me why.


(내 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1년 넘게 지난 후에야 나는 그 사실을 알았다. 이건 길고 슬프고 다른 때에 해야 하는 얘기다. 벨로우와 내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서 있던 동안 목이 메었다. 내가 사랑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누굴 내가 내 아버지와 벨로우를 사랑했듯이 사랑했는가? 그럼에도 나는 두 사람 모두에게서 도망쳤다. 그게 왜인지 벨로우가 여기 있어 내게 말해주기를 나는 소망했다.) 


내가 왜 아버지와 벨로우 둘 다에게서 도망쳤는지 

벨로우에게서 이유를 듣고 싶다. : 이 마지막 문장이 강한 유인이었던 건데,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로 

뒤죽박죽 기억함. 이 마지막 문장에서, 벨로우가 어떻게 독자의 강한 사랑을 유발하고 그리고 떠남도 유발하고 

그리고 어떻게 그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해설할 사람..... 인가, 나도 갑자기 조금 안 거 같았던 것이었었던 것이었다. 더 잘 알고 싶어졌었다.  


리 시걸의 글들은 "tough-minded yet generous"라 평가된다는데 

저 조합도 꿈의 조합인 듯. 저 조합을 언제나 실현하는 비평가라면 .... 시간의 시험을 견딜 듯. 


읽었던 다른 글의 제목은 

Seize the Day Job. 인데 

벨로우 책 Seize the Day로 하는 말장난. 

day job. 작가, 예술가들이 생계를 위해 하는 낮 동안의 일. 

얄팍한 말장난 좋아하는 나는 이 말장난에도 웃었고 지금 쓰면서도 다시 웃게 된다. 

울고 싶게 만들던 문장들은 이 글에 더 있었던 거 같다. 


오늘 목표로 했던 작업을 조금 전 끝냈다. 

어디서 울고 싶었나, 천천히 다시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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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웃긴 대목들도 꽤 있다. 

제목의 라벨스타인은 앨런 블룸을 모델로 한 작중 인물. 

그러니까 형식적으로는 소설로 제시되는 책이긴 하다. 그런데 다 바로 화자 "나"는 솔 벨로우로, 라벨스타인은 

앨런 블룸으로 여겨진다. 책이 나왔을 때, 이걸 회고록으로 보면 안되고 소설로 봐야 하지 않는가, 그게 벨로우의 의도였다. 두 사람의 생애를 책 속으로 읽어넣지 마시라.. 얘기하는 이들 있었던 거 같다. 지금은, '거기 이름 빼고 허구가 있음?'이 대세인 듯. 


아무튼 다시 생각해도 웃긴 대목이 있는데 

병든 블룸에게 지상에 남은 시간이 실제로 셀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시간의 문제지 죽음이 그의 아주 가까이에 왔음이 확정됐을 때. 이때 블룸은 갑자기 

아무에게나 성욕을 느끼게 된다. 갑자기 아무에게나 sexual feeling이 일게 된다. 


블룸이 벨로우에게 말한다. 

"죽음이 이토록 기묘한 최음제일줄이야." (기묘한 최음제: weird aphrodisiac.) 


저 영어 구절도 웃김에 조금 기여하는 거 같다. 죽음과 최음제(aphrodisiac)의 연결을 죽어가는 사람 자신이 

한다는 게 그 자체로 참 웃기기도 한데, 최음제라는 말도 웃김. 


이 두 사람이 실은 15년 나이차 나는 사이라는 걸 기억하면서 

"형"을 넣어 생각하면 조금 더 웃겨지기도 한다. 형. 죽음이 얼마나 이상한 최음제인줄 알아? 


죽음이 이토록 기묘한 최음제일줄 몰랐다고 하더니 

"그런데 내가 왜 이 얘길 형에게 하고 있지? 형이 알아두면 좋을 거 같다 생각했나 봐." 




이미 죽은 친구를 기억하면서 

자기 죽음도 가까이 있음을 자각하는 노인이 쓴 책이라 

죽음이 중요한 주제일 수밖에 없겠기도 하다. 이 주제에, 30대의 나였다면 별로 마음가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귀기울여 듣게 되는 여러 대목들이 있다. 죽음의 한 (존엄한?) 방식을 "legit"하게 제시하는 책일 거 같다. 순전히 농담의 연속 같기도 한데 그러나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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