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 2014 서점 대상 2위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3
기자라 이즈미 지음, 이수미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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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실려 있는 <무무무> 파트를 읽을 때는 조금 싱겁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른 나이에 남편 가즈키를 병으로 잃은 데쓰코는 처음 결혼했을 때와 변함없이 시아버지인 ‘시부’와 함께 살고 있어요. <무무무>에서는 데쓰코의 그런 사정, 그리고 남자친구 이와이로부터 청혼스럽지도 않은 청혼을 받지만 거절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나와있지 않지만 친정과도 사이가 별로인 데다 가즈키를 잃은 상처가 깊은 탓인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런 내면의 상처들로 인한 고통이나 아픔들도 7년이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인지 생각보다는 담담하게 흘러갑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내심 뭔가 좀 더 애틋하고 아련한 에피소드들을 기대했던 탓인지 <무무무>를 읽고는 ‘에잉’ 했지만,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들을 읽을수록 점점 빠져드는 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이 작품은, 떠난 사람이 남기고 간 자리를 추억하는 남은 사람들의 추모를 소재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총 8명이 서로 다른 시각으로 가즈키를 생각합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어쩐지 가족을 만드는 것이 무섭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가 어려운 데쓰코, 어린 시절 친구이자 <무무무>에도 잠깐 등장하는 다카라, 등산을 하면서 생명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시부, 가즈키의 사촌동생인 도라오는 가즈키의 언행과 가즈키의 차를 통해 그를 생각합니다. 여기에 데쓰코와 그녀의 남자친구인 이와이의 소소한 이야기, 가즈키의 어머니 유코의 시부와 결혼 전 이야기, 어쩌다보니 이와이와 결탁하게 된 시부의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즈키가 <어젯밤 카레>를 발견하게 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마지막에 가즈키의 이야기가 등장했을 때는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기분이 이상했어요. 이미 세상에 없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즈키가 발견한 <어젯밤 카레> 소녀가 데쓰코인지는 명확히 나와 있지 않지만, 분명 데쓰코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일본소설 특유의 담담한 문체가 오히려 더 와닿는 경우가 있어요. 감정을 마구 분출하지 않고 그저, 아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럴 수도 있지 넘어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단련시켜준다는 느낌이랄까요. 분명 슬픔과 고통, 애정과 기쁨들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알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줘요.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은 사실 무슨 빵과 관련된 따뜻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론 빵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빵이 주된 소재는 아니고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슬픔을 치유하면서 절대 잊지는 않는, 그러면서 한발한발 내딛으며 또 다른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누군가를 통해, 무엇을 통해 -나는 살아있구나!-를 느끼는 사람들의 이야기요.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한숨 돌리고 싶을 때 편안한 마음으로 읽기 좋은 작품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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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오키나와 여행 - 오키나와에서 꼭 가보고 싶은 특별한 공간 45곳 새로운 여행 시리즈
세소코 마사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꿈의지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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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여름의 기운을 느끼기 시작하게 되니 여행을 가고 싶어 몸과 마음이 들썩들썩한 요즘입니다. 7월 말, 혹은 8월 초에 떠나려고 했던 오키나와 여행을 눈물을 삼키며 힘겹게 접은 후유증 탓인지 신나게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동생에게 괜히 심술이 나기도 해요. 사실 떠나려면 얼마든지 훌쩍 떠날 수 있지만 내년이 아부지 환갑이셔서 준비해야 한다는 마음이 큰 탓에 올해는 과감하게(?) 여행을 접었습니다. 작년 이맘 때 홋카이도 여행을 준비하면서 활기차게 하루하루를 보냈던 걸 생각하면, 여행이란 하는 도중도 즐겁지만 준비할 때, 돌아와서 추억할 때 모두 생활에 활력을 주는 요소가 아닌가 싶어요. 올해 조금 더 열심히 자금을 끌어모아서 내년 부모님 여행도 보내드리고, 저도 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겠습니다.

대지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일본여행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그래서 저도 차마 도쿄 근교에는 가지는 못하지만 일본은 지역에 따라 각각의 매력이 풍부한 곳인 것 같아요. 그래서 목표로 했던 곳을 다녀오면 또 다른 목적지가 생기고, 그 곳을 다녀오면 또 다른 목적지가 생기는 듯 합니다. 작년에 홋카이도를 다녀오고 나서는 이제는 일본에 그만 가도 되겠지 했는데, 올 상반기부터 오키나와가 자꾸 저의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일본 본토와는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덕분인지 우리나라 사람들도 오키나와는 꾸준히 찾고 있는 것 같아요. S본부에서 방영되는 예능 프로그램에 이 오키나와에 있는 추라우미 수족관이 등장해서 그 인기가 더 높아졌다는 이야기도 들리고요. 본래 류큐왕국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미국에 점령당했다가 일본의 패전과 함께 일본으로 귀속된 오키나와. 때문에 아직도 오키나와 사람들 중에는 -우리는 일본인이 아닌 류큐왕국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지닌 사람들이 꽤 존재한다고 합니다. 일본 패전 시 강제로 죽음을 강요당한 사람들도 많았다네요. 오키나와 출신인 일본의 국민가수 아무로 나미에가 천황 생일파티에 초대받았는데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죠.

그런 오키나와의 가장 큰 매력은 아무래도 푸른 하늘과 바다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아서, 어쩐지 이곳에 가서는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지 않고 바닷가 근처에 앉아있기만 해도 힐링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책을 읽어야지’라고 생각했던 때는 아직 오키나와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렌터카 부분이 가장 궁금했었어요. 보통은 자동차를 이용해서 관광을 한다고 들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운전하는 걸 두려워하는 제가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 [새로운 오키나와 여행]은 제목 그대로 ‘새롭게’ 오키나와를 여행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반적인 여행안내 책들과는 달리, 이 책에는 숙소, 관광지 등이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아요.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오키나와에 와서 어떻게 자신의 꿈을 이루었는가-에 관한 부분입니다. 공방을 운영하는 사람, 맛있는 빵을 만드는 사람, 향기로운 커피를 내리는 사람, 신간도서와 중고서적을 같이 다루고 낭독회를 여는 사람들이 등장해요. 그 중에는 대지진을 겪고 난 뒤 오키나와로 이주해온 사람도 있고, 고향이 오키나와였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키나와로 이주한 이유, 각각의 취향은 모두 다르지만 제가 그들을 ‘하나’처럼 느끼게 된 것은 그들 모두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일, 중요하죠. 하지만 그 일을 생활 속에 어우러지게 만든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책에 등장한 사진이나 이야기만 들어서는 무척 손쉽고 간단하게 이루어진 생활같지만 분명 그들에게도 나름의 고민과 어려움이 존재했었겠죠. 그런 시간들을 뛰어넘어 자신이 원하던 삶을 손에 넣은 사람들. 진심으로 부럽습니다.

오키나와로 이주를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일과 삶이 서로 나눠진 게 아니라 하루하루 삶이 곧 일이고, 일이 다시 나다운 삶이 되는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오키나와에서라면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여러 가게들을 소개해놓은 책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지만, 저는 이 책을 읽고 나니 더 오키나와에 가고 싶어졌어요. 혹시 아나요? 오키나와에 여행 갔다가 저도 그 곳에서 눌러살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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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담은 배 - 제129회 나오키상 수상작
무라야마 유카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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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번역되었던 책이 다시 번역되어 출간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면, 그 책에 대한 번역가의 애정이 남달라서일까요, 그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찬사와 사랑이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일까요. 한 쪽에만 해당될 수도, 양쪽 모두의 이유일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작품이 재번역된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작가가 있다는 것도,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지나갔을테니까요. [별을 담은 배]는 129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그것이 2003년이니 벌써 11년도 더 전의 일이네요. 좋은 작품은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죠. 이 작품도 부디 그렇게 되길 바라봅니다. 가족들의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다루고 있는 일본인의 눈으로 본 전쟁과 위안부 소재는 하나의 살아있는 역사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총 여섯 편의 연작 단편집입니다. 각각의 주인공은 한 가족이에요. 의붓동생인 줄 알았다가 사랑에 빠진 사에가 사실은 이복동생이라는 충격에 집을 나간 아키라, 집안의 막내로서 힘겨움을 감내하고 명랑한 척 지내온 미키가 감추고 있던 어둠, 한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아키라를 마음에서 지우지 못한 사에, 집안의 장남으로서 살아왔고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50대를 맞이한 미쓰구가 겪는 고뇌, 그의 딸인 사토미가 맛보는 청춘의 쌉싸름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일이 일어난 시작을 만들어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아버지 시게유키가 노년을 맞이하여 과거를 되돌아보는 감회가 그려져 있어요. 그 때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고통들-10대인 사토미가 느끼는 친구에 대한 동경과 약간의 질투, 30대를 갓 넘긴 미키가 겪는 삶에 대한 불안함 등-이 마치 작가가 한 명 한 명의 캐릭터 안에 녹아있는 듯 그들의 입을 빌어 저마다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키라와 사에의 사랑도 가슴 아팠고, 미쓰구가 느끼는 허무함도 안쓰러웠지만 역시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아버지 시게유키가 등장하는 파트인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전쟁에 참가했던 시게유키는 그 곳에서 인간이 인간답지 못할 수 있다는 것, 사람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 몸으로 겪게 됩니다. 그 곳에서 만난 조선인 위안부 야에코, 한국이름 강미주.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이 조선인임을 잊지 않고 정체성을 지켜나가려했던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인 그녀를 사랑하게 된 시게유키는 참혹하게 그녀를 잃었고 현재에서는 그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인물로 비춰지죠. 겪어보지 못한 전쟁을 젊은 사람들이 뭘 알고 떠드는가 우습기만 하고, 그렇다고 전우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 때를 미화시키는 것도 고통스럽기만 한 시게유키. 작가는 전쟁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해버린 시게유키라는 인물을 통해 전쟁 그 자체의 참혹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일본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쉽게 이야기하지 못할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합니다. 일본 정부에 대해 우리국민의 불신이 깊어지는 요즘, 일본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라고 외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리고. 시게유키의 두 번째 부인 시즈코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을 듯 합니다. 지주막하출혈로 이미 작품의 처음부터 죽음을 맞은 그녀는 미쓰구와 아키라를 키워내고, 사에와 미키를 낳은 후처입니다. 미쓰구와 아키라의 어머니였던 하루요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미 시게유키와 관계를 맺어왔고 그로 인해 사에를 덜컥 갖게 된 그녀는, 작품 안에서 그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가족들에게 그 누구보다 강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자리잡고 있어요. 아키라가 사에와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토록 분노하고 절망했던 이유는 사에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하루요보다 키워준 어머니 시즈코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몇 십년의 세월을 자신의 죄를 비는 마음으로 인내하고 한 가정을 이끌어온 그녀. 그녀의 부재는 가슴 아프지만 그 부재가 오히려 가족들이 서로를 살피고 보듬으며 앞으로 한 발 내딛을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연작단편집이지만 작품이 가진 서사의 매력이 대단합니다. 작가의 냉철한 시각은 물론 마음을 울리는 감성이 공존하고 한 인간의 삶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보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나오키상을 받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야기로서의 재미와 전달하려는 메시지, 모두 훌륭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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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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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작품발표로 독자들과의 만남을 주저하지 않는 히가시노 게이고-라고 생각합니다. 국내에만 출간된 작품이 벌써 몇십 권, 얼마 전에는 일본에서 또 다른 신작이 출간되었다고 하니 이 작가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감탄스러울 정도에요. 그 에너지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한 작가입니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독자의 입장에서는 입맛에 맞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이 혼재하기 마련인데요, 개인적으로 제가 베스트로 꼽는 그의 작품은 [방황하는 칼날]과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입니다. [방황하는 칼날]은 사회파 미스터리로서 얼마 전 국내에서도 배우 정재영과 이성민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어 상영되었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소소한 일상 미스터리지만 굉장한 감동이 내포되어 있는 수작입니다. 책읽기를 멈추는 날 <내 인생의 책>으로 추켜세워도 부족함이 없을만한 작품을 벌써 두 편이나 남겨주었네요. 짝짝짝!!

 

[몽환화]는 아침 출근 시간에 벌어진 어떤 -묻지마 살인-으로 시작됩니다. 평화로운 일상,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와 아기의 행복한 시간을 피로 물들인 한 남자의 광기는,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 비극성이 더욱 극대화됩니다. 그 사건이 뒤에 벌어지는 일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짐작도 되지 않은 채 시간은 흐르고, 주인공 아키야마 리노는 사촌 나오토가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후 장례식에 참석합니다. 그 곳에서 오랜만에 뵙게 된, 늘 인자한 미소로 자신을 응원해주던 할아버지. 수영선수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갑자기 찾아온 심인성 장애로 수영을 그만둔 뒤 방황하는 그녀의 마음을 다독이는 할아버지에게 의지하게 된 리노는 장례식 후 할아버지 댁을 방문하고, 꽃을 기르는 할아버지의 취미를 블로그를 만들어 관리하기 시작해요. 어느 날, 그 꽃이 피어납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노란 빛깔의 꽃이. 뒤이어 일어난 할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함께 사라진 노란색 꽃 화분. 혼란스러운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 그 꽃과 관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남깁니다.

 

이 작품은 노란색 나팔꽃을 등장시켜 에도시대부터 이어져 온 인연을 이야기하는 역사소설이기도 하고, 주인공 아키야마 리노와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융합되지 못하는 느낌을 받고 자란 가모 소타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며, 나오토의 자살과 할아버지의 죽음을 파헤치는 미스터리 소설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작품 안에 여럿의 장르가 혼재된다면 제법 산만할 법도 한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환상의 꽃이라 불리는 노란색 나팔꽃에 얽힌 사연들과 그 꽃의 출현을 경계하며 여러 각도에서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려는 사람들의 동선이 다음 페이지, 또 그 다음 페이지를 기대하게 만들어요.

 

하나 아쉬운 점은 기대했던 것에 비해 결말이 약하다는 정도랄까요. -진상은 이랬어, 그리고 사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야-라고 밝혀지는 마지막은 조금 오래된 닌자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어설픈 히어로물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때문에 미스터리 장르라기보다는 사건을 추적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숙고해나가는 아키야마 리노와 가모 소타의 성장소설이라는 기분이 더 강하게 듭니다. 살인사건과 초반에 등장한 -묻지마 살인-은 그들의 성장을 돕기 위한 양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그냥 내버려둬서 사라진다면 그대로 두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받아들여야 해. 그게 나라도 괜찮지 않겠어?

하지만 <노란 나팔꽃> 자체가 지닌 메시지는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나팔꽃에 노란색은 없다고 해요. 하지만 에도시대에는 존재했다고 합니다. 존재했었던 노란 나팔꽃이 사라진 이유-그것에 대해 고찰하는 작가의 정신에 공감합니다. 없어졌다면 없어질만한 이유가 있다. 대단히 인공적인 생활을 영위해나가고 있는 우리 인생에 경종을 울릴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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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명 신청합니다. 일본어 전공자입니다. 우리문화유산 답사기가 아니라 일본편부터 접해 살짝 부끄럽기도 하지만 강연과 함께 교수님의 일본을 보는 시각도 느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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