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부신 친구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0년지기 릴라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의 아들 리노로부터 연락을 받은 레누는 30년 전부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싶다고 이야기해 온 릴라의 이야기를 상기하면서, 이 친구가 말 그대로 66년의 삶을 통째로 지워버리려 한다고 생각한다. 릴라는 대체 어디로,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어느덧 과거의 시간 속에서 그녀의 발자취를 더듬는 레누.

 

 

릴라가 레누의 인생에 등장한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릴라는 못된 아이였다. 아이들이 누구나 조금씩 못된 구석을 가지고 있는 차원을 넘어서서, 정말로 언제나 못된 아이였다. 누구나 쉽게 죽고 다치는 그런 시대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일종의 축복이자 기적이자 지옥과 같은 것. 몸은 왜소하고 못된 릴라였지만 머리는 영리했고 근성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릴라에게, 레누는 곧 사로잡혀버린다. 이제 릴라가 삶이자 전부가 되어버린 세상. 똑똑하기는 했지만 릴라만큼은 아니었던 레누는 릴라에게 때로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도 쳐보지만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이렇게 성장시킨 것은 릴라와의 시간들이었음을.

 

 

비록 학교에 진학하지는 못했지만 학업에 대한 열정으로 혼자서도 공부를 계속하는 릴라, 그런 릴라를 우러러보면서도 때로는 그녀보다 우월감도 느끼고 싶었고 여자아이들의 관계에서 오는 특유의 질투심으로 한때는 멀리하고 싶기도 했지만 레누 주변의 그 어떤 사람도 릴라보다 더 대단하지도, 더 중요하지도 않았다. [작은 아씨들]을 함께 읽으며 유년시절의 꿈을 키웠고, 공포의 대상이었던 돈 아킬레 앞에 당당히 맞서서 유대도 맺었다. 평생의 라이벌이자 놓을 수 없는 상대. 이제 소녀들은 성장해서 여인의 몸을 갖게 됐고, 릴라는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며 스테파노와 결혼식을 올리지만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가시지 않는다.

 

 

나폴리의 열악한 마을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속에서 릴라와 레누의 변하지 않는 우정에 대해 그린 [나의 눈부신 친구]는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의 1편이다. 그저 한없이 좋기만 한 친구가 아니라 사랑과 미움, 질투와 연민 등이 어우러진 릴라와 레누의 관계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쿨함'은 찾아볼 수 없다. 삶의 끈적끈적함이 묻어나온다. 경제적 빈곤과 폭력이 일상화된 삶의 순간 속에서 아무리 긍지를 가진 여인이라 해도 자존감은 쉽게 무너져내린다. 스스로를 붙잡기 위해 레누가 선택한 것은 학업이었고, 릴라가 선택한 것은 결혼을 통한 부의 획득이었다. 둘 중 누구의 선택이 조금은 더 나았던 것일까. 휘청이는 결말에 2권이 기대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넌 공부를 계속하도록 해.

2년이면 고등학교를 졸업해. 그러면 끝이지.

아니. 절대로 멈추지 마. 필요한 돈은 내가 줄게. 넌 항상 공부해야 해.

고마워. 하지만 언젠가는 학교 공부를 마칠 수밖에 없어.

넌 아니야. 넌 내 눈부신 친구잖아. 너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해. 남녀를 통틀어서 말이야.

p416

당연히 릴라가 레누의 '눈부신 친구'일줄 알았는데, 릴라는 레누를 향해 '자신의 눈부신 친구'라고 이야기한다. 스스로를 공부밖에 할 줄 모르고 별 볼일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는 레누를, 릴라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패키지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울에서 부산을 거쳐 대마도로 향하는 저렴한 패키지여행의 관광버스 짐칸에서 어린 아이의 토막 시체가 발견된다. 처음부터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이던 김석일과 그의 아이 김도현. 다정한 아버지는 커녕 처음부터 무언가 석연치 않았던 그는 사라지고 아이만 남았다. 사건을 맡은 형사 박상하는 이번 사건을 통해 자신의 과거사를 다시 떠올리게 되고, 장애를 안게 된 아들 은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더욱 사건에 몰입한다. 이 와중에 김석일의 가정폭력을 피해 도망치듯 집을 떠났던 그의 전처 정지원이 아이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오고, 그녀에게 남모를 감정을 느끼는 박상하는 김석일과 정지원의 결혼생활에 무언가 비밀이 있었음을 짐작한다. 끔찍하고 잔혹한 사건 뒤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대체 무엇이 아이를 학대하고 죽이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그들을 몰아갔던 것일까.

 

가정폭력과 관련된 기사가 심심치 않게 매스컴을 오르내린다. 때리고 가방에 가두는 것은 물론, 아무 거리낌 없이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이야기들. 공포스러운 것은 그런 아동학대의 주범이 아이의 부모라는 사실이다. 태어난 아이를 아낌없이 사랑해주고 세상의 모든 풍파로부터 지키기 위해 발버둥을 쳐도 모자랄 부모라는 사람들이, 사실은 아이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이들을 때리고 학대하는 무서운 현실.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기 전까지는 부모 모두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들을 내려놓고 모든 신경을 아이에게 쏟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어쩌면 떠오를 생각 하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자유롭고 싶다-는 것. 대부부의 부모가 이런 생각들을 떠올려도 픽 웃으며 흘려보내는 것과 달리 누군가는 한 번 올라온 생각에 붙잡혀버린다. 급기야는 자신의 삶이 자유롭지 못하고 나의 삶이 짓눌리게 된 것은 이 아이 탓이라며 결국 모든 잘못을 아이에게 덮어씌워버리게 되는 것이다. 아이에게 향하는 폭력은 쉽다.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할 뿐더러, 엄마고 아빠니까 그래도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에 매달려 금방 그 죄를 용서해주니까.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나도 아이 때문에 산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 인생이 우선이지, 아이가 나보다 우선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할 거라고. 하지만 곰돌이 두 명을 돌보고 함께 뒹굴다보니 내가 얼마나 무책임한 생각을 했었는지 깨달았다. 부모라면 태어난 아이에게 책임이 있다. 아이가 태어난 뒤의 삶이 어떻든 그 아이가 커서 자신의 삶을 책임지게 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삶을 뒷전으로 미룰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부모로서의 숙명이다. 아니, 자신의 삶을 뒤로 미뤄둘 것도 없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 속에서 또다른 행복을 찾으면 된다.

 

하지만 한 가지. 박상하의 아내 채연희가 나약했기 때문에 아이를 향한 학대가 발생했다는 작가의 관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를 향한 폭력과 학대는 용납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어쩌면 모든 엄마들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의 병은 혼자서는 고칠 수 없고, 그 벼랑 끝에 선 엄마들에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커다란 차이일테니까.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가정 전체,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의 문제다.

 

내 아이이든 아니든 온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한다. 그것이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다. 아이러니하게도 잘 다듬어진 육아서가 아니라 이런 작품들을 통해 나의 육아를 되돌아보게 된다. 때리지는 않아도 나는 아이들을 잘 돌보고 있는 것인가. 오늘의 말 한 마디, 시선 하나가 혹여나 내 아이를 아프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것들도 정신적 학대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가. 쉽지 않다.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아서 이번 작품이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러니 더 응원한다. 나 스스로를, 그리고 지금도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듬고 있을 세상의 모든 부모들을.

 

** 출판사 <황금가지>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아로 산다는 것 - 워킹푸어의 시대, 우리가 짓고 싶은 세계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의 모든 책 미스터리
제프리 디버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특별히 생각나는 시리즈가 있다. 바로 <크리스마스 미스터리 시리즈>. 출판사 북스피어에서 출간된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화이트 크리스마스 미스터리], [우아한 크리스마스의 죽이는 미스터리] 도서들이다. 독특하게도 출간된 월일이 모두 12월 25일로 딱 크리스마스를 겨냥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올해에는 [세상의 모든 책 미스터리] 가 더해져 총 네 권의 <크리스마스 미스터리 시리즈>가 완성된 것이다. 이 중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세상의 모든 책 미스터리] 부터 먼저 만나보았다. 미스터리 소설계의 명 편집자이자 뉴욕에서 미스터리 서점을 운영하는 오토 펜즐러와 스릴러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들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작품집. 출간 이후 25만부 이상 판매되었으며 에드거 앨런 포 상을 수상했다.

 

총 여덟 편의 '치명적인' 책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도난당한 책들이 어떻게 변모했는 지 알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책들>, 사망한 뉴욕의 마피아와 거래했던 정치인들의 치부가 담긴 장부를 찾기 위해 수사를 진행하는 탐정의 하드보일드 스릴러 <모든 것은 책 속에>, 희귀 도서를 애정하는 멕시코의 미스터리 사업가를 처리하기 위해 작전을 계획하는 <용인할 만한 희생>, 복수를 위해 상대의 책들을 모두 없애버리기로 결심한 <제3제국의 프롱혼>, 한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스스로 만들어낸 책의 유령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이야기 <유령의 책>, 유산을 좀 더 빨리 물려받기 위해 삼촌을 살해한 <죽음은 책갈피를 남긴다>, 자신조차 의도했는지 모를 일을 저질러 버린 남자 앞에 밝혀진 진실을 그린 <망자들의 기나긴 소나타>, 그리고 아버지이기 '이전'의 아버지의 업적에 대해 알게 되는 <이방인을 태우다> 까지 한 번에 읽어내리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각각의 작품들에서 '책'이 갖는 의미는 다양하다. 누군가에게 책은 책꽂이에만 꽂혀있어서는 안될 정도로 소중한 것이며, 어떤 이에게는 희생을 불사하고라도 손에 넣어야만 하는 타인의 약점이 된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폭탄으로 이용할만한 도구지만,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서재를 마련하고라도 소장하고 싶은 희귀한 물건이며, 자신의 삶 전부를 짓누르는 죄책감의 표상이자, 살인도구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알지 못했던 부모의 과거를 알려주기도 하며, 한 권이라도 얻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도 있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스릴러라는 형식을 빌려 각각의 이야기에서 책이 가지는 다양한 이미지를 맛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작품집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재미있는 점은 내가 이 여덟 편의 작품들 중 특히 '와, 이런 반전이!!' 라며 생각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스릴러 거장이라 불릴만한 제프리 디버의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역시-라고 생각할만한 짧지만 완벽한 스릴러. 이 작품집에서 [오픈 시즌]으로 만난 적이 있는 C.J. 박스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도 반가웠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어떤 책이 주인공일까, 상상하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

 

이 책을 읽다보면 결국 '나에게 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당신에게 책이란 무엇인가. 그 책을 위해 당신은 어디까지, 무엇까지 허용할 수 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이비드 흄 -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자 한 철학자 클래식 클라우드 25
줄리언 바지니 지음, 오수원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뷰를 쓰려는 나의 심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막막하다-이다. 그동안 이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에 대해 예찬론을 펼쳐온 나라면, 항상 그랬듯 감탄을 연발하면서 신나게 리뷰를 써 내려갔을텐데 이번만큼은 철학의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평범한 사람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는 중이다. 읽는 동안에도 막막했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글을 읽었고, 간간이 메모도 했지만 당췌 이 데이비드 흄이라는 인물에 대해 종잡을 수가 없다. 그저 지금 떠오르는 문장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을 주장한 사람-정도일까.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어떤 가능성이라도 열어놓고 사유의 세계를 희희낙락 즐겼던 철학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것이 그가 말한 적절한 중도라는 것이었을까.

 

흄은 종교 비판과 인과론에 대한 개념으로 가장 유명하다고 평가받는다. 난해해보이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사유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일상의 문제를 사유하는 방식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현실 문제를 사유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철학자. 흄은 교육을 통해 문필가가 되었고,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당시 문필가의 관심사였던 경제학, 과학, 심리학, 역사, 정치 이론을 넘나들며 배움을 구했다. 흄의 사유가 지향하는 바는 언제나 '인간 본성'이었다.

 

흄은 [인성론]에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선행적 회의주의'라 평가하면서 그 어떤 추론으로도 사유 대상에 관한 확신을 애초부터 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데카르트의 근본적 오류는 철학의 기반을 인간 본성이 아니라 추상적 원리에 둔 것으로, 흄은 '인간을 아는 것이 유일한 기초이며, 인간을 알기 위한 기초는 경험과 관찰'이라고 주장한다. 자연과학의 영역을 철학에 도입한 것으로 이를 경험주의라 하지만, 그는 관찰조차도 불확실한 기반이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회의론을 무너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실의 확실한 기반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느 것이지만, 흄은 이 문제에서만큼은 데카르트와 동일하게 확고한 지식의 기반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흄은 자연계를 상세히 탐구한 적이 없고, 그의 실험은 '사고실험'에 그쳤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실험이 없다는 것이 그의 약점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피론식의 완전한 회의주의에 빠져들지도 않는다.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고 말한 피론의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의 모든 삶이 사라져버리게 되기 때문에 올바른 이성은 '확실성의 창조자와 파괴자 사이에 서 있다'고 이야기하는 흄의 이성을 '온건한 회의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이성에 대한 태도와 이성 추론의 방식에서 극단을 지양했던 흄. 그는 독단적 의견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적 한계를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을 주장하고, 철학하려는 자들에게 오만을 경계하라고 경고한다. 합리는 논리와 다르며, 모든 이성 추론에서 특정 논증의 질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은 그 논증이 자신에게 강력하게 느껴지느냐 아니냐의 여부라면서, 그는 철학의 힘과 그 철학의 도구인 이성을 행사하는 자신조차 의심하며 믿지 못했던 것이다.

 

[인성론]의 목적은 경험에 기반을 둔 잠정적이고 불확실한 결론을 내리는 일을 철학의 과제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모든 추론은 관념들의 관계와 사실 문제, 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도출한 결론은 사실 문제에 절대적인 확실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또한 그 유명한 '귀납의 문제'를 주장하면서 '과거의 경험은 미래에 벌어질 일의 증거가 될 수 없고, 둘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하리라는 추정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의 사상에서 빠진 것은 논리적 타당성으로, 인과에 대한 믿음을 이성이나 관찰로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인과의 궁극적 타당성을 포기해도 인과를 믿을 수밖에 없으며, 결국 흄의 회의론은 인과에 대한 믿음을 합리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오만한 확신에 대한 숙명론적 의심-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런 그의 철학들이 담긴 [인성론]은 런던에서 푸대접을 받게 되는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리드는 [인성론]을 가리켜 뭐든 모조리 의심하려는 아주 부정적인 시도라며 깎아내렸다. 이에 대해 흄은 자신은 이성을 묵살한 것이 아니라 현실화했을 뿐이고,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중용과 겸허함'이라는 것을 확실히 한다. 심지어 크게 부유하거나 가난하지도 않았고, 그리 유명하지도 않았던 그의 삶 또한 중용의 길을 의미하는 듯하다. 또한 도덕성에 대한 위협이 오적 종교적 도덕에 대해서만 제기된다고 보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이용해 거짓교리를 퍼뜨리는 교회를 맹렬히 비판한다.

 

종교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두려움이라면서 종교의 불관용을 늘 개탄했지만 흄은 무신론자는 아니었다. 그의 표적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 내의 미신과 광신으로, 종교의 주장이 진실이라고 생각할 증거, 혹은 거짓이라고 입증할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믿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에 가까웠는데, 불가지론자에게 신의 존재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문제였다. 무신론자라는 노선을 취하기에는 지나치게 이성적이었고, 교회의 말을 덜컥 믿어버리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결함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그래서 온건파 종교인들은 존경하고 그들과는 자주 교류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흄의 종교적 회의론은 심오한 부분에까지 이르러, 인간은 존재의 궁극적 원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현대의 무신론이 존재하는 것은 자연계 뿐이라고 주장한 것과는 달리, 그에게 자연계는 우리가 아는 전부라고 말한다.

 

또한 루소와의 만남을 통해 계몽주의 시대의 두 거장의 철학의 차이를 알 수 있는 부분도 등장한다. 감정을 훨씬 신뢰했던 루소와 인간 본성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정을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흄.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감정과 이성이 별개가 아니며, 우리의 감정 중 많은 것이 이성적 판단을 포함한다는 것이었다. 흄이 루소에게 보여준 공감과 연민은 인간 본성에 관해서 지나친 낙관이나 비관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그의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 보여진다. 흄은 '도덕적 다원주의'를 표명하면서 좋은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이며 하나의 삶이나 한 사회가 그것들을 다 가질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관심사는 개인의 도덕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답을 찾는 일에까지 뻗어나간다.

 

이 책 전체에서 느껴지는 흄의 이미지는 '세상에 놀러온 사람'같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의심해보고, 저것도 의심해보고, 책도 한 번 써보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면서 인생을 즐기는 사람. 그런 그는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이한다. 그 자신은 삶과 철학을 즐겼을지도 모르지만 후대에는 너무나 많은 과제를 남겨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어찌 리뷰를 마무리하지만 여전히 머리속은 혼란스럽다. 철학의 세계에 심신이 풍덩 잠겼으나 아무것도 손에 잡힌 것은 없는 듯한 기분. 어쩌면 이것도 중도의 하나인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