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흄 -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자 한 철학자 클래식 클라우드 25
줄리언 바지니 지음, 오수원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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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려는 나의 심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막막하다-이다. 그동안 이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에 대해 예찬론을 펼쳐온 나라면, 항상 그랬듯 감탄을 연발하면서 신나게 리뷰를 써 내려갔을텐데 이번만큼은 철학의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평범한 사람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는 중이다. 읽는 동안에도 막막했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글을 읽었고, 간간이 메모도 했지만 당췌 이 데이비드 흄이라는 인물에 대해 종잡을 수가 없다. 그저 지금 떠오르는 문장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을 주장한 사람-정도일까.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어떤 가능성이라도 열어놓고 사유의 세계를 희희낙락 즐겼던 철학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것이 그가 말한 적절한 중도라는 것이었을까.

 

흄은 종교 비판과 인과론에 대한 개념으로 가장 유명하다고 평가받는다. 난해해보이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사유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일상의 문제를 사유하는 방식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현실 문제를 사유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철학자. 흄은 교육을 통해 문필가가 되었고,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당시 문필가의 관심사였던 경제학, 과학, 심리학, 역사, 정치 이론을 넘나들며 배움을 구했다. 흄의 사유가 지향하는 바는 언제나 '인간 본성'이었다.

 

흄은 [인성론]에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선행적 회의주의'라 평가하면서 그 어떤 추론으로도 사유 대상에 관한 확신을 애초부터 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데카르트의 근본적 오류는 철학의 기반을 인간 본성이 아니라 추상적 원리에 둔 것으로, 흄은 '인간을 아는 것이 유일한 기초이며, 인간을 알기 위한 기초는 경험과 관찰'이라고 주장한다. 자연과학의 영역을 철학에 도입한 것으로 이를 경험주의라 하지만, 그는 관찰조차도 불확실한 기반이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회의론을 무너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실의 확실한 기반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느 것이지만, 흄은 이 문제에서만큼은 데카르트와 동일하게 확고한 지식의 기반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흄은 자연계를 상세히 탐구한 적이 없고, 그의 실험은 '사고실험'에 그쳤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실험이 없다는 것이 그의 약점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피론식의 완전한 회의주의에 빠져들지도 않는다.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고 말한 피론의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의 모든 삶이 사라져버리게 되기 때문에 올바른 이성은 '확실성의 창조자와 파괴자 사이에 서 있다'고 이야기하는 흄의 이성을 '온건한 회의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이성에 대한 태도와 이성 추론의 방식에서 극단을 지양했던 흄. 그는 독단적 의견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적 한계를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을 주장하고, 철학하려는 자들에게 오만을 경계하라고 경고한다. 합리는 논리와 다르며, 모든 이성 추론에서 특정 논증의 질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은 그 논증이 자신에게 강력하게 느껴지느냐 아니냐의 여부라면서, 그는 철학의 힘과 그 철학의 도구인 이성을 행사하는 자신조차 의심하며 믿지 못했던 것이다.

 

[인성론]의 목적은 경험에 기반을 둔 잠정적이고 불확실한 결론을 내리는 일을 철학의 과제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모든 추론은 관념들의 관계와 사실 문제, 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도출한 결론은 사실 문제에 절대적인 확실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또한 그 유명한 '귀납의 문제'를 주장하면서 '과거의 경험은 미래에 벌어질 일의 증거가 될 수 없고, 둘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하리라는 추정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의 사상에서 빠진 것은 논리적 타당성으로, 인과에 대한 믿음을 이성이나 관찰로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인과의 궁극적 타당성을 포기해도 인과를 믿을 수밖에 없으며, 결국 흄의 회의론은 인과에 대한 믿음을 합리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오만한 확신에 대한 숙명론적 의심-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런 그의 철학들이 담긴 [인성론]은 런던에서 푸대접을 받게 되는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리드는 [인성론]을 가리켜 뭐든 모조리 의심하려는 아주 부정적인 시도라며 깎아내렸다. 이에 대해 흄은 자신은 이성을 묵살한 것이 아니라 현실화했을 뿐이고,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중용과 겸허함'이라는 것을 확실히 한다. 심지어 크게 부유하거나 가난하지도 않았고, 그리 유명하지도 않았던 그의 삶 또한 중용의 길을 의미하는 듯하다. 또한 도덕성에 대한 위협이 오적 종교적 도덕에 대해서만 제기된다고 보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이용해 거짓교리를 퍼뜨리는 교회를 맹렬히 비판한다.

 

종교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두려움이라면서 종교의 불관용을 늘 개탄했지만 흄은 무신론자는 아니었다. 그의 표적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 내의 미신과 광신으로, 종교의 주장이 진실이라고 생각할 증거, 혹은 거짓이라고 입증할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믿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에 가까웠는데, 불가지론자에게 신의 존재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문제였다. 무신론자라는 노선을 취하기에는 지나치게 이성적이었고, 교회의 말을 덜컥 믿어버리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결함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그래서 온건파 종교인들은 존경하고 그들과는 자주 교류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흄의 종교적 회의론은 심오한 부분에까지 이르러, 인간은 존재의 궁극적 원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현대의 무신론이 존재하는 것은 자연계 뿐이라고 주장한 것과는 달리, 그에게 자연계는 우리가 아는 전부라고 말한다.

 

또한 루소와의 만남을 통해 계몽주의 시대의 두 거장의 철학의 차이를 알 수 있는 부분도 등장한다. 감정을 훨씬 신뢰했던 루소와 인간 본성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정을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흄.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감정과 이성이 별개가 아니며, 우리의 감정 중 많은 것이 이성적 판단을 포함한다는 것이었다. 흄이 루소에게 보여준 공감과 연민은 인간 본성에 관해서 지나친 낙관이나 비관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그의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 보여진다. 흄은 '도덕적 다원주의'를 표명하면서 좋은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이며 하나의 삶이나 한 사회가 그것들을 다 가질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관심사는 개인의 도덕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답을 찾는 일에까지 뻗어나간다.

 

이 책 전체에서 느껴지는 흄의 이미지는 '세상에 놀러온 사람'같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의심해보고, 저것도 의심해보고, 책도 한 번 써보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면서 인생을 즐기는 사람. 그런 그는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이한다. 그 자신은 삶과 철학을 즐겼을지도 모르지만 후대에는 너무나 많은 과제를 남겨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어찌 리뷰를 마무리하지만 여전히 머리속은 혼란스럽다. 철학의 세계에 심신이 풍덩 잠겼으나 아무것도 손에 잡힌 것은 없는 듯한 기분. 어쩌면 이것도 중도의 하나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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