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의 의식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함정임 옮김 / 현암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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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정치적인 견해나 사상을 잘 모르더라도 그들의 독특한 관계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을까. 결혼이라는 사회적 계약을 벗어나 50여 년 동안 동반자적 삶을 함께 이끌면서 서로의 다름을 일치시켜 공생해 온 두 사람. 함께 책을 읽고 대화를 하고 지식을 쌓으면서 처음 만난 이후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서로의 곁을 지켰다.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에게 청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보부아르는 결혼도 아이도 거부한 채, 부부로 살기를 원했다. 계약결혼이라는 독특한 틀 안에서 둘의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우연한 사랑도 인정하는 관계, 상호 평등한 위치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해 온 두 사람. [작별의 의식]은 보부아르의 시선에서 사르트르의 마지막 10년을 담은 책이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시들어가는 듯한 사르트르의 저물어가는 생의 끝자락을 그리고 있지만,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허물어져 가는 사르트르 뿐만은 아니다. 평생동안 그가 놓지 않았던 '이데올로기적 관심'. 그는 고전적 지식인에 반하는 새로운 지식인-스스로 세운 민중적 지위를 얻기 위해 애쓰며 지식인으로서의 순간을 부정하는 존재-을 설정하고, 대중과 융합하기 위한 길을 모색했다. <엥테르 뤼트: 상호투쟁>의 편집장을 맡았고, S.R.(스쿠르 루주, 붉은 구원대)을 창설했으며, 여러 시위에 참석하고, 청원서에 서명하고, 리베라시옹 신문사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다.

 

 

가끔 현기증을 느끼며 혈압이 높아지곤 했던 그의 병세가 위중해지기 시작한 것은 1973년. 요실금이 생겼고, 점차 시력이 악화되었으며 틀니를 해 넣어야 했고 당뇨 증세까지 보였던 사르트르는 말년에는 급기야 정신마저 혼미해지기에 이른다.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게 되고, 바로 앞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것도 어려워했던 사르트르. 지켜보는 보부아르도 무척 고통스러웠겠지만, 자신이 다시 책을 읽을 수 있을지, 글을 쓸 수 있을지, 제대로 생각을 하게 될지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했던 사르트르 본인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50여년 동안 지속되어 온 동반자적 관계가, 이제는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돌봐야 하는 피보호자와 보호자의 관계로 전환된 것이다. 생의 대부분을 공유하고 함께 책을 읽고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한 상대를 잃는다는 것.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로 슬프고 가혹한 일이다.

 

 

중간중간 슬프고 가슴이 아프다는 표현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보부아르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르트르의 생의 마지막을 전달하려 애쓴다. 사르트르의 죽음에 관한 내용 뿐 아니라 활동한 내용, 함께 여행을 떠났던 내용 등 사르트르의 철학적 견해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나라도 몇 가지만 검색하면 비교적 쉽게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이 그렇게 비참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그가 무너져가고는 있었지만 냉철한 그의 지성은 여전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보부아르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책의 제목인 [작별의 의식]은 1971년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에게 우연히 뱉은 작별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보통 프랑스어에서 헤어질 때 하는 인사말은 aurevoir 이지만 제목에 쓰인 adiex는 연인 관계의 끝, 혹은 생사의 갈림길 등 영원히 헤어질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어쩌면 사르트르는 10년도 되지 않아 보부아르와 영원히 이별하게 될 것을 무의식적으로 예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다. 나의 죽음이 우리를 결합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의 생이 그토록 오랫동안 일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름답다.

p283

 

이제 다시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보부아르의 마지막 고백을 통해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충만된 것이었는지 전해진다. 그녀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걸로 되었다.

 

** 출판사 <현암사>를 통해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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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김열규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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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숨이 멈춰지고, 이승이 아닌 저승으로 가는 것. '저승'이라는 곳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저 세상의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이 삶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 배울 수 있는 많은 것들과는 달리 죽음은 예습할 수 없다. 아무리 죽음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묘사한 책이나 영상을 접해도 죽음의 순간이 아니면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갖는 두려움의 원천이 아닐까.

 

저자에 따르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죽음이라는 것은 부정적으로 여겨졌고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불안하다며 꺼려지는 대상이다. 오죽하면 어지간한 빌딩에서는 3층 다음이 4층이 아니라 5층이거나 숫자 4가 아닌 F로 표기되었겠는가. 죽음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죽은 이의 영혼에 대해서도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가족의 영혼이라 해도 유령은 유령인 것이다. 그리하여 초상을 치를 때 입관하기 전에 염을 하고 수의를 입히고 시신을 일곱 매듭을 지어 묶는 것은 사령에 대한 공포감으로부터 비롯된 행위다. 공포는 대상을 따지지 않고 심지어 자기 자식에게까지 옮겨진다. 예전에는 아기무덤의 일부는 땅에 묻힌 옹기 뿐으로, 그 속에 아기시신을 구겨서 넣고는 땅에 묻은 뒤 큰 바위로 눌러버렸다고 한다. 아기, 처녀, 총각. 아이들과 미성년의 죽음을 무서워한 어른들. 저자는 그들을 애처롭다 여겼다.

 

죽음에 대한 이런 공포와 두려움의 이유를, 저자는 삶과 죽음을 따로 떨어트려 놓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살아있는 동안에는 되도록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풍조 때문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인간은 죽음과 화해해야 한다' 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 안에 바로 죽음이 있다. 이런 생각은 비단 저자만의 견해가 아니라 조상들의 풍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동남은 예전부터 삶의 방향, 서북은 죽음의 방향이라고 특정지어져 왔다. 그런데 옛신라인은 죽은 이의 머리 방향을 구태여 동남으로 잡아주었는데, 저자는 이를 죽음을 삶의 연장선이라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생과 사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속에서 바라본 죽음에 대한 생각들. 용어들이 다소 낯설어 어렵게 다가온 부분도 있었지만 지금도 생활 곳곳에 남아있는 풍습들을 읽어가며 과연 죽음이란 무엇이고 사는 내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었다. 결국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죽음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잘 살고 어떻게 하면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지 고민하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웃음을 들이키소서. 죽음 앞에서, 부디 부디.
p 370

 

여든이 넘은 나이에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지금의 삶에서도 배울 것이 많다고 '몇 년간 까불고 살았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이셨다는 저자. 죽음에 대해 오랫동안 깊게 사색해온 어르신은 과연 죽음을 앞두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본인이 말씀하신대로 죽음 앞에서 웃음을 들이키면서 한평생 잘 살았다고 편안하셨을까. 여전히 죽음을 생각하면 무섭고 두렵지만, 우리 모두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며' 겸허히, 후회 없이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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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들이키소서, 죽음 앞에서, 부디 부디.

p 370

 

죽음 앞에서 저자는 미소를 지으셨을까. 위중한 병을 얻고 보니 여든이 넘은 삶에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하셨다는 분.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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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소위 '님비 현상'은 죽음 및 죽음을 위한 시설을 대상으로 해서도 말썽을 빚고 있다. 신체부자유자나 고아들을 위한 사회 시설에 대해서조차 님비 현상이 야기될 때, 이미 우리 사회는 인간사회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진배없다.

p334

 

묘역을 철거하고 싶은 욕망은 죽음 자체를 기피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직결된다. 죽음에 대한 혐오감이 묘역에 대한 혐오감으로 번진 것이다. 초상집에 갔다가 묻어오는 살을 '상문살'이라고 하는데 이런 말이 생겨난 것만 보아도 우리 사회가 죽음을 얼마나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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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박혁거세의 죽음을 변란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하는 이유. 그의 죽음 또한 귀천의 죽음을 맞는 것처럼 보였지만 시신이 다섯 토막으로 나뉜 채 낙하한다.

샤먼의 영혼이 우주 여행을 하는 사이에 그의 육신이 뼈 마디마디까지 산산조각조각으로 토막이 났다가 그의 영혼의 귀환과 입신에 즈음해서 새로이 재통합되는 절차야말로 성무식의 가장 중요한 궤적이다.

p 250

 

혁거세의 시신의 재수습의 실패는 탈신혼의 입신하기의 실패에 따른 죽음이다. 여기에서 몸은 집이고 영혼을 생명이라고 여기는 저자의 관점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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