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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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작가의 책을 접하게 될 때는 항상 호기심과 두려움이 앞선다. 나에게 어떤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해줄 것인가에 대한 기대가 호기심을, 한 작품으로 인해 그 작가의 모든 작품에 대해 일관된 인상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약간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게다가 [암스테르담]같은, 비교적 얇은 책은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을 더 갖게 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이야기를 작가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써 놓은 게 아닌가 해서. 

이야기는 '몰리'라는 한 여자의 장례식에서 시작된다. 과거 그녀의 애인이었던 작곡가 클라이브 린리와 신문사 편집국장인 버넌 핼리데이. 그리고 그녀의 정부였던 외무장관 줄리언 가머니와 그녀의 남편 조지 레인.  클라이브와 버넌은 몰리의 옛 애인들이었음에도 친한 친구사이다. 어느 날, 몰리의 장례식 이후 충분히 그녀를 애도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버넌 앞으로 조지가 가진 사진 3장이 공개된다. 버넌이 자신의 적이라고 공공연히 외치고 다니는 가머니의 성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사진들이 그녀들의 여인 몰리에 의해 찍혀 있었던 것. 사형제도와 징병에 찬성하는 가머니를 사회적, 개인적으로 매장시키기 위해 버넌은 동부서주하지만 클라이브와 의견마찰을 빚는다. 게다가 가머니의 아내가 미리 그 사진을 인간적인 감정에 호소하며 공개해버리는 탓에 오히려 버넌은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그 모든 일의 원흉이라 생각하는 클라이브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부을 준비를 시작한다. 한편, 클라이브는 악상을 떠올리기 위해 떠난 여행 도중 일어난 한 사건으로 인해 생애 최대의 작품이 될 교향곡 완성에 실패하고, 그 또한 그 모든 일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버넌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에서 버넌과 마주한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순간적으로 멍해진 나를 발견했다. 이 작품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앞으로 우리의 기억에 깊이 남을 사람은 누구인가. 이야기는 클라이브와 버넌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그들은 단지 경주마에 지나지 않는다. 정작 그들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고 방향제시를 하고 있는 인물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허탈한 웃음이. 한 사람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얼마나 눈 깜짝할 사이인가. 그 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을 잃게 되기까지의 시간이 단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인생의 허무함도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은 한 편의 코메디를 보는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순간의 분노에 사로잡혀 잘못된 선택을 한 클라이브와 버넌의 운명은 고삐를 쥔 다른 자의 의도였을까, 아니면 명백한 그들의 선택의 결과였을까. 나는 그들의 선택의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계기를 제시한 인물은 따로 있었지만 클라이브와 버넌에게 윤리적, 도덕적 양심과 배려와 연민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이 남아있고, 자신과 자신의 일에만 주의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좀 더 바깥세상을 넓게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면 결말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몰리와 관계된 남자들 거의가 몰리의 부재로 인해 삶이 망가져버리니, 몰리의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 삶의 방어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결말 부분에서 몰리의 환상을 보는 클라이브와 버넌의 모습에서 몰리라는 여자가 그들 삶에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책 안에 숨겨진 '나홀로 복선'(말 그대로 나 혼자 복선이라 생각하는) 이라 생각되는 문장들을 되새기고,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느껴가며 꽤 흥미롭게 읽었지만, 이 책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사람들도 있을 듯하다. 이를테면 가머니의 성정체성에 관계된 문제라든가, 클라이브와 버넌이 한 여자의 애인들이었으나 친한 친구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나는 어떤 일이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만 아니라면 '뭐ㅡ어때?'라는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얇지만 재미있고, 독특한 분위기를 맛보는 기회를 잃게 되어버린다면 그것 또한 아까운 일이다. 

얇은 책이라 은근 무시도 했더니, 생각지 못한 의문 속으로 나를 잡아끈다, 이 책. 작가는 이 책을 통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인간이 추락해 가는 과정? 친구였던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내면에 숨겨진 인간의 이기심? 우리의 운명은 순간의 선택으로 결정될 수도 있다는 것? 나중에 다시 읽는다면 어쩌면 지금과는 다른 해석을 내놓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 한 가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이언 매큐언이라는 작가가 대단히 흥미롭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나올 그의 작품을 통해 그가 가진 생각을 좀 더 연구(?)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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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1 - 아프리카.중동.중앙아시아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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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얼굴을 내민 지 한참 된 이 책을, 나는 개정판이 나오고 난 지금에서야 손에 들었다. 유명하다고, 좋다고 하면 할수록 어쩐지 청개구리 심보가 생겨서 더 멀리하게 되는 나의 이상한 버릇 탓도 있겠지만, '여행'은 직접 해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지, 여행기를 읽었다고 해서 그 여행이 내것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할 만한 시간과 자금이 부족한 생활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자꾸만 여행서적을 찾게 되었고, 결국 이 책도 돌고 돌아 나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다른 여행서와 다른 점은 오직 육로여행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과, 우리가 쉽사리 찾을 수 없는 아프리카, 중동, 그 중에서도 오지를 주로 여행했다는 것이다. 

책의 저자 한비야씨는 잘 다니던 회사에 과감히 사표를 내고 세계일주를 떠난다. 그 때까지 그녀가 이룩한 사회적 지위와 경력,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맞이한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세계 여행을 동경하던 소녀가 자라 그 꿈을 실현시키려 한다.(이미 했다.) -목표는 높게, 계획은 치밀하게, 실천은 확실하게-해야 한다는 그녀의 최선을 다하는 방법은 여행에 있어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여행을 계획할 때 어느 날 갑자기 떠나고 싶어하고, 수중에 있는 돈을 점검하고, 주변상황이 맞으면 출발하지만, 한비야씨는 어디를 다닐지, 그 때까지 돈은 얼마를 모을지, 얼마나 많은 기간 동안 여행할지를 처음부터 계획했다. 모든 일을 시작부터 철두철미하게 계획한 그녀의 모습에서부터 내 탄성은 시작되었다. 

베낭 두 개를 앞뒤로 짊어지고 육로로, 그것도 여자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나같이 겁이 많은 사람이 길을 떠날 때는 아마도 있는 짐, 없는 짐 다 지고 떠날 것이기 때문에 육로 여행은 엄두도 못낼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직접 보여주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나라와 나라를 건너다닐 수 있다는 것, 여자 혼자 얼마든지 용감하게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 책을 읽으면서 나도 자꾸만 떠나고 싶어졌다. 가슴 떨리는 사람을 만난 테헤란, 신드바드의 나라 페르시아, 내 계획 속에도 들어있는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은 터키, 동물의 왕국 아프리카, 그 밖에도 요르단, 시리아, 러시아까지 그녀의 여행이 마치 내 여행인 양 마음 속 내 발도 같이 따라 움직였다. 

어떤 나라에 갔을 때는 그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한비야씨의 말은 과거 내 모습을 부끄럽게 했다. 일본에 어학연수를 갔을 때 식사시간만 되면 김치를 싸들고 다녔던 내 모습이 바로 미성숙한 모습이었음을 절실히 느낀다. (그렇다고 내가 일본음식을 멀리했던 것은 아니지만;;) 맨손으로 밥을 먹고, 함께 어울리고, 아랍권 나라를 여행하기 위해 언어를 공부하고, 적어도 일주일은 현지인들과 어울리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진정한 자연인의 모습을 보았다. 사진 한 장, 한 장에 찍혀있는 그녀의 웃음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디에 가든, 그 곳의 사람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여행을 떠났을 때, 그리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고 들었다. 그로부터 7년을 세계를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의 힘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그녀의 삶이 있어 우리는, 적어도 나는 힘이 난다. 가슴에 희망을 품고, 계획을 세워 언젠가는 나도 떠나리라는, 긴급 구호 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처럼 언젠가는 나도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는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다. 나이가 몇이든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녀가 있어 책과 함께 한 이 여행이 참으로 즐거웠다.


홀로 떠나는 여행, 그것은 나 자신과의 여행이다. 여행이란 결국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나를 만나는 일이다.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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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 몸, 마음, 영혼을 위한 안내서
아잔 브라흐마 지음, 류시화 옮김 / 이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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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중간 정도 읽었을 때, 친구와 만날 약속이 생겼다. 나는 약속시간 전에 서점에 들러 이 책을 한 권 더 구입해서 그 친구에게 선물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다 읽은 책을 누군가에게 나눔 한 적은 있어도, 책을 끝까지 읽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선물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책을 읽는데 그 친구가 생각난 것은 나와 그 친구가 너무나 비슷하게 여겨졌기 때문일까. 나도, 그 친구도 마음이, 정신이 많이 아플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어쨌든 책을 받아든 친구가 너무나 기뻐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술취한 코끼리- 이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집착, 분노, 두려움, 행복 등을 나타낸다. 사람들이 쉽게 빠져들지만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감정들에 대한 상징. 내가 이 책을 집어들었을 때 나는 집착과 앞날에 대한 불안함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집어든 이 책은 영국 런던의 노동자 계급 집안에서 기독교인으로 태어난 아잔 브라흐마가 태국에서 수행승이 되어 절에서 행한 법문을 모은 것이다. 천주교, 기독교, 불교, 개신교..명명되는 이름은 모두 다르지만, 깨달음의 끝에 있는 것은 하나라고 생각한다. 천주교에서는 -네 이웃을 미워하지 말라-라고 가르치고, 불교에서는-네 이웃을 미워하라-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만, 자신의 종교에 대해 사람들의 욕심이 작용해서 종교 간 분쟁이 일어나는 것일 게다. 그 욕심 또한 술취한 코끼리에 다름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마음을 빼앗겨 주위의 모든 것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던 나는 내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 기회를 통해 좀 더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 믿음을 준 이야기가 바로 <벽돌 두 장>이다. 아잔 브라흐마가 절을 짓기 위해 벽돌을 쌓았다. 나름대로 잘 쌓았다고 자신을 칭찬하며 쌓아올려진 벽을 본 순간, 그는 잘못 놓여진 두 개의 벽돌을 보게 된다. 그 때부터 그의 눈에는 그 벽돌들만 보이고, 이 벽을 허물고 다시 쌓아올릴까 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어느 날, 한 방문객이 그 벽을 보고 "매우 아름다운 벽이군요"라고 말한다. 그 방문객은 잘못 쌓인 벽돌 두 개가 아니라 잘 쌓여진 다른 벽돌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것과 같다. 특히 나는 내 과거 중 잘했던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잘못했던 것만 반추하며 시간을 허비했다. 그로 인해 내가 잘했던 것들도 빛을 잃게 되었고, 나는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벽돌 두 장이 우리 삶에 있어서 얼마나 작은 부분인지 깨닫고, 잘 쌓아올려진 다른 벽들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 삶은 더 풍요로워질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책을 읽는 순간은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금방 또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 때마다 한 번, 두 번 책을 넘겨가면서 내 마음과 영혼을 다스리고 싶다. 

책에는 108가지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불교의 법문이라고 해서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나도 불자는 아니다) 이 편견이나 거부감을 가지고 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 속 이야기들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겪을 수 있는 생활의 지혜와 관련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너무나 주옥같은 말들이 넘쳐나서 내가 가지고 있던 북다트를 거의 다 사용해버렸다. 한 동안 이 북다트들이 이 책에 끼워져있을 것 같다. 천주교 신자든, 기독교 신자든, 불교 신자든 우리가 지향하는 삶은 언제나 같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p140

 

 그대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 그대의 온 존재를 바쳐라-p149

 

우리 모두는 종종 실수를 저지른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갈수록 덜 자주 실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내가 머물고 있는 절에서는 수행승들이 실수를 하도록 허용하는 정책을 쓰고 있다.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덜 실수하기 마련이다-p237

 

'삶에서 어떤 것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생각 때문'이라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교훈..-p245

 

1.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2.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3.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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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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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어렸을 때 나는 무척이나 까무잡잡했다. 부모님은 무조건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하셨지만 어렸을 때 내 별명은 한 때 시커먼쓰였다. 악의가 없는 친한 친구들의 장난이었음에도, 나는 꽤 상처 받았었다. 같은 반에서 함께 공부하는 유난히 피부가 하얗던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체질이 변해서 그런지 지금은 많이 옅어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길을 가다가도 마주치는 새하얀 피부의 여성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눈이 간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하얀 피부의 아이가 부러웠던 것일까.

<패싱>은 백인과 유사한 신체적 특징을 지닌 흑인들이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으로 행세하는 것을 뜻한다. 주로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들에게 해당하는 현상으로 흑인 작가들의 중요한 주제였다고 한다. 할렘 르네상스의 대표 작가라고 일컬어지는 넬라 라슨의 대표작 [패싱]은 그러한 혼혈인들의 패싱 행위와 그럼에도 벗어날 수 없는 '종족'이라는 개념을 두 여자 주인공을 앞세워 그려낸다. 아이린 레드필드는 친정 집에 쉬러 갔다가 어렸을 적 친구 클레어 켄드리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흑백 혼혈인 클레어는 놀랍게도 자신의 남편에게, 자신에게는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멀리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독특한 감정에 사로잡힌 아이린은 결국 자신의 생활에 클레어를 받아들이게 되고, 어느 날 남편과 클레어의 부적절한 관계를 눈치챈다. 결국 안정감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여기는 아이린과, 흑인 사회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클레어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다.


 레드필드 부인, 그 점에 관해 저를 잘못 아신 겁니다. 전혀 그런 게 아녜요. 난 그들을 싫어하는 게아니라 증오해요. 우리 검둥이도 그래요. 자신이 검둥이로 변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말이지요. 이 여자는 애정 때문이든 돈 때문이든 주위에 검둥이 하녀를 두지 않아요. 나도 그녀가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것들은 나를 오싹하게 해요. 소름 끼치는 그 검은 악마들....언제나 도둑질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그리고 그보다 더 끔찍한 짓도 하는.-p74, 75

클레어의 남편 잭은 클레어에게 흑인의 피가 흐르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아이린과 그녀들의 친구 거트루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장면이야말로 클레어가, 아이린이 어째서 패싱을 하는지 그 이유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흑인이라는 것을 숨기지는 않지만 필요할 때는 패싱을 하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흑인과 백인의 대립에 관한 사항을 알려주길 꺼려하는 아이린의 모습은 결국 그녀 자신이 '종족'이라는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나타낸다. 

백인과 흑인이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흑인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되어왔다. 식민지 경영과 신대륙의 발견으로 새로운 종족간의 접촉이 증가했고, 그 와중에 상대적으로 편리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던 백인이 피부색이 다른 종족을 멸시하는 인종차별이 발생했다. 아프리카의 주민들이 예전에는 미국으로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다니, 어째서 피부색만으로 사람의 우위를 결정할 수 있었는지 새삼 헛웃음이 나온다. [패싱]이 발표된 것은 1929년. 지금은 2008년. 약 80년의 세월의 차가 나는데도 세계 곳곳에서는 여전히 백인우월주의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인종차별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도 국제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많은 혼혈 아이들이 살아간다. 잘 적응하고 즐겁게 생활하는 아이도 있지만, 그 중에는 피부색으로 인해 놀림당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국제화와 세계화의 진정한 의미가 인간을 피부색으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어렸을 때 피부가 하얀 친구를 부러워했던 것도 이미 정해져있던 상대적인 기준에 영향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까맣지도 않지만 하얗지도 않은, 조금 까무잡잡한 내 피부를 두고 다른 사람의 피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얀 피부도 아름답지만, 까만 피부도 아름답다는 것을 TV와 책으로 배웠다. 오히려 골격이 아름답고, 피부결이 좋은 것은 흑인이 백인보다 뛰어나다니 피부색이 아니라 골격과 피부결로 따졌다면 백인이 흑인에게 괴롭힘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말은 어떻게 된 일인지 지금도 얼떨떨하다. 클레어가 선택한 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선택이었는지..다만, 흑인의 피를 숨기고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았던 클레어보다도, 아이린에게 더 애틋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안정감'이라는 줄 하나를 힘겹게 잡고 있던 그녀에 대한 연민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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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하라,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권태현 지음, 조연상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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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무리 책이라도, 누군가 나에게 "~다, ~은 ~이다,~해야 한다"라고 강요하는 듯한 책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책은 다른 사람의 생각은 어떠한가를 알기 위해 읽는 것이지, 그 사람의 생각대로 내가 살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떤 한 주제에 관해 마치 세상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사람마냥 말하는 사람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한 내 생각도 그저 나의 아집에 지나지 않았나 보다. 그저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라며 넘어가면 될 것을. 그렇게 생각하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책을 만나서인지 나는 생각보다 편하게 글을 읽어내려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나운서이고, 개그맨 유재석의 연인으로 유명한 나경은 아나운서가 심야 라디오에서 낭송했던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한참 사람의 감성이 살아 움직이는 새벽, 고요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읽혀지는 이 글들을, 그 밤에 깨어있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들었을까. 나는 한창 내 마음이 격한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이 글을 읽었다. 마음이 허해서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제외하고, 무언가 내 마음을 움켜쥐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억하지 못하는 나경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 자신의 목소리로. 

나는 과거를 계속 되감기 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스타일이다. 내가 실수했던 것, 잘못했던 것,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여긴 것을 끊임없이 반추하면서 내 자신을 고문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거들이 제발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주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도 알고 있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좋은 기억이든, 싫은 기억이든 과거는 우리 삶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반석이 되어준다는 것을. 언젠가는 과거가 될 현재를 내 마음 안에 꼭꼭 다져 넣고 싶다. 

작가는 말한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만이 패배자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말은 쉽다!-라고. 나는 용기가 부족하다. 될 수 있으면 내가 성공할 수 있는 일에 도전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한 삶이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없는지를 나는 또 알고 있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막연한 생각만으론 안 된다. 두려워하지 않고 그 순간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용기는 그 동안 자신이 노력하며 쌓아온 저력과 잠시도 멈추지 않는 도전 정신이 함께 만났을 때 제대로 그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실패하는 순간에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축적해둘 수 있어야 한다. -p165

책은 나의 모습들로 가득하다. 거절 못하는 나, 오해하는 나, 내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나, 습관적으로 생활하는 나, 상상을 즐기는 나,  미소짓는 나.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들.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키워드들이 우리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들이라 내 자신의 모습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삽화들이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해서 외롭고 갈 곳 없는 내 마음을 가만히 껴안아 주는 것 같아서 그 순간만큼은 내 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공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내 옆의 누군가가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껴준다는 것. 내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 그럼으로써 서로를 인정하게 되는 것. 책을 읽는 그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표지에서 새 두 마리가 서로를 응시하며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내가 다른 누군가와 공감할 수 있게 되기를. 그래서 이 책이 나에게 준 든든함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내가 당신의 편이라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공감지대를 형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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