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어렸을 때 나는 무척이나 까무잡잡했다. 부모님은 무조건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하셨지만 어렸을 때 내 별명은 한 때 시커먼쓰였다. 악의가 없는 친한 친구들의 장난이었음에도, 나는 꽤 상처 받았었다. 같은 반에서 함께 공부하는 유난히 피부가 하얗던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체질이 변해서 그런지 지금은 많이 옅어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길을 가다가도 마주치는 새하얀 피부의 여성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눈이 간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하얀 피부의 아이가 부러웠던 것일까.

<패싱>은 백인과 유사한 신체적 특징을 지닌 흑인들이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으로 행세하는 것을 뜻한다. 주로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들에게 해당하는 현상으로 흑인 작가들의 중요한 주제였다고 한다. 할렘 르네상스의 대표 작가라고 일컬어지는 넬라 라슨의 대표작 [패싱]은 그러한 혼혈인들의 패싱 행위와 그럼에도 벗어날 수 없는 '종족'이라는 개념을 두 여자 주인공을 앞세워 그려낸다. 아이린 레드필드는 친정 집에 쉬러 갔다가 어렸을 적 친구 클레어 켄드리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흑백 혼혈인 클레어는 놀랍게도 자신의 남편에게, 자신에게는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멀리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독특한 감정에 사로잡힌 아이린은 결국 자신의 생활에 클레어를 받아들이게 되고, 어느 날 남편과 클레어의 부적절한 관계를 눈치챈다. 결국 안정감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여기는 아이린과, 흑인 사회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클레어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다.


 레드필드 부인, 그 점에 관해 저를 잘못 아신 겁니다. 전혀 그런 게 아녜요. 난 그들을 싫어하는 게아니라 증오해요. 우리 검둥이도 그래요. 자신이 검둥이로 변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말이지요. 이 여자는 애정 때문이든 돈 때문이든 주위에 검둥이 하녀를 두지 않아요. 나도 그녀가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것들은 나를 오싹하게 해요. 소름 끼치는 그 검은 악마들....언제나 도둑질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그리고 그보다 더 끔찍한 짓도 하는.-p74, 75

클레어의 남편 잭은 클레어에게 흑인의 피가 흐르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아이린과 그녀들의 친구 거트루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장면이야말로 클레어가, 아이린이 어째서 패싱을 하는지 그 이유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흑인이라는 것을 숨기지는 않지만 필요할 때는 패싱을 하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흑인과 백인의 대립에 관한 사항을 알려주길 꺼려하는 아이린의 모습은 결국 그녀 자신이 '종족'이라는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나타낸다. 

백인과 흑인이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흑인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되어왔다. 식민지 경영과 신대륙의 발견으로 새로운 종족간의 접촉이 증가했고, 그 와중에 상대적으로 편리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던 백인이 피부색이 다른 종족을 멸시하는 인종차별이 발생했다. 아프리카의 주민들이 예전에는 미국으로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다니, 어째서 피부색만으로 사람의 우위를 결정할 수 있었는지 새삼 헛웃음이 나온다. [패싱]이 발표된 것은 1929년. 지금은 2008년. 약 80년의 세월의 차가 나는데도 세계 곳곳에서는 여전히 백인우월주의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인종차별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도 국제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많은 혼혈 아이들이 살아간다. 잘 적응하고 즐겁게 생활하는 아이도 있지만, 그 중에는 피부색으로 인해 놀림당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국제화와 세계화의 진정한 의미가 인간을 피부색으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어렸을 때 피부가 하얀 친구를 부러워했던 것도 이미 정해져있던 상대적인 기준에 영향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까맣지도 않지만 하얗지도 않은, 조금 까무잡잡한 내 피부를 두고 다른 사람의 피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얀 피부도 아름답지만, 까만 피부도 아름답다는 것을 TV와 책으로 배웠다. 오히려 골격이 아름답고, 피부결이 좋은 것은 흑인이 백인보다 뛰어나다니 피부색이 아니라 골격과 피부결로 따졌다면 백인이 흑인에게 괴롭힘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말은 어떻게 된 일인지 지금도 얼떨떨하다. 클레어가 선택한 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선택이었는지..다만, 흑인의 피를 숨기고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았던 클레어보다도, 아이린에게 더 애틋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안정감'이라는 줄 하나를 힘겹게 잡고 있던 그녀에 대한 연민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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