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종의 요리책
카를로스 발마세다 지음, 김수진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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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느껴지십니까? 제목에서부터 뿜어져나오는 이 강렬한 포스가! 네, 저는 그 포스를 느끼고 한참이나 읽기를 망설이고, 또 읽다가 한숨을 푹푹 쉬며 내려놓고, 또 뭔가 이상해져오는 속을 달래기 위해 한참이나 쉬엄쉬엄 읽을 수밖에 없던 작품이었습니다. 식.인.종. 게다가 요.리.책. 뜨아! 예전에 [금단의 팬더]라는 일본소설을 읽은 적이 있어요. 그 책 표지에는 귀여운 팬더가 풀을 먹고 있었습니다. 먹고 있는 곳이 음식그릇 위이기는 했지만요. 귀여운 팬더이기는 하지만 온갖 것이 음식의 재료가 될 수 있는 마당에 징그럽기는 하지만 팬더라고 예외이겠더냐! 하는 마음으로 읽었답니다. 하지만 내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제 속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식인종의 요리책]은 정말 적나라하게도 식.인.종의 요리를 다루고 있죠.

 

이야기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가 제 어미의 가슴을 물어뜯으면서 시작됩니다. 엄청난 고통과 충격으로 어미는 심장마비를 일으켜 그 자리에서 사망. 오래된 건물에 살고 있던 쥐들이 나타나 시신을 처리하는 가운데 아기는 해맑게(?) 살아남습니다. 아기의 이름은 세사르 롬브로소. 그리고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세사르 롬브로소의 가족사와 그가 태어난 건물, 정확히 말하자면 레스토랑 '알마센'에 얽힌 역사를 들려줍니다. 레스토랑의 창시자 카글리오스트로 형제가 지은 전설의 요리책 '남부 해안지역의 요리책'이 중심에 있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죠. 어찌보면 알마센과 롬브로소 가문의 기나긴 역사는 이 책과 함께 해 온 것이 될테니까요.

 

처음 예상했던대로 작품에서 잔혹성과 기괴함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책의 제목만 봐도 유추할 수 있듯, 세사르 롬브로소의 요리는 상상이상었습니다. 아기였을 때부터 풍기던, 피부를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는 것 같은 어둠의 기운을 풍기던 세사르 롬브로소의 독특한 요리장면은 매우 적나라했거든요. 하지만 예상 외로 롬브로소 가문에 얽힌 역사와 사건들은 무척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단순히 폭력과 살인만으로 포장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알마센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알마센을 이어받아온 롬브로소 가문의 다른 이들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를 읽는 재미가 좋았다고 할까요. 한편으로는 안타까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평범한 음식을 요리할 때의 감칠맛도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인 [향수]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두 작품은 닮아 있습니다. 세사르 롬브로소가 제 어미의 젖가슴을 물어뜯은 후 그 맛을 음미하며 그에게 미각에 관한 한 비범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장면은, [향수]의 주인공 그루누이가 시장통 생선가게 쓰레기들 틈 사이에서 코를 벌름거리며 천재적인 능력을 타고났음을 암시하는 장면과 오버랩되죠. 마지막 장면 또한 그루누이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루누이는 오직 자신만의 향수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성들을 살해했다면, 세사르 롬브로소는 자신에게 해를 가할 것 같은 사람들의 목숨을 취했다는 것일까요. 그들 모두에게 죄책감은 없었지만요.

 

지금까지 한 번도 '요리'라는 행위 안에 폭력성이 숨겨져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요리하는 그 행위 자체가 엄청난 폭력성을 띠고 다가옵니다. 아름답고 친근한 장면인데 말이죠. 읽는 동안 속이 많이 좋지 않기는 했지만, 잔혹한 장면들 외에 롬브로소 가문의 가족사에 중점을 두고 읽으면 나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만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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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
후지와라 신야 지음, 강병혁 옮김 / 푸른숲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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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세상에 대해 섬세한 눈길을 가진 사람을 존경합니다. 타인의 기쁨, 타인의 슬픔, 타인의 고독에 귀기울이고 눈여겨 볼 수 있는 사람이요. 자신의 생각과 감정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간직한 사연을 존중할 줄 알며 그 깊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갈 수 있는 것도 탁월한 능력 중 하나일 겁니다. 특히 요즘처럼 오로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길을 달려가느라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세상에서요. 달리기를 멈추고 뒤돌아보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 자부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정확한 답은 없겠지만 결국 위로받을 수 있는 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를 열고 그 하루를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으니까요.

 

사진작가로 유명한 후지와라 신야의 에세이, 14편입니다. 그 어떤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고 물을 가득 머금은 꽃잎처럼 촉촉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지하철 한 정거장을 지나칠정도의, 딱 그만큼의 시간을 할애하면 읽을 수 있는 짧은 이야기들이지만 그 이야기들 속에 담긴 감동과 설레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일본 지하철에 놓이는 무가지 [메트로 미니츠]에 6년 동안 연재한 일흔한 편의 글 가운데에서 골라 수정한 것이라고 해요.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14편의 이야기를 제외한 다른 에피소드들은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을지 궁금하네요.

 

아마추어 모델과 아마추어 사진작가의 한 순간의 교감, 서늘한 도시에서 느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어렸을 적 추억을 발판으로 다시 뿜어져 나오는 삶에 대한 의지, 행복했던 시절을 세상의 마지막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부부, 상처받은 동물과 인간의 애정, 우연히 들른 찻집에서 발견한 소소한 감정들, 지하철 한 정거장을 지나는 사이에 일어난 사건, 노화가의 황혼에 찾아온 희생적인 사랑 등. 과연 현실에 이렇게 영화같은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는가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의 가슴 따뜻한 에피소드들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것은 찰나, 아주 짧은 순간이에요. 아주 작고 짧은 시간 속에서 인생을 좌우할 선택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면 삶의 오묘함에 가슴이 찌릿해져 옵니다.

 

책의 내용들도 그렇지만 서정적인 사진과 한 줄의 시같은 소제목들도 인상적이에요. 코스모스 그림자 뒤에는 늘 누군가 숨어 있다, 오제에서 죽겠습니다, 당신이 전철의 다른 방향을 보았을 때, 거리의 소음에 묻혀 사라질 만큼 작고 보잘것없는 것, 예순두 송이와 스물한 송이의 장미 등 소제목 자체에도 일본 특유의 감성이 전해져오는 듯 합니다. 노작가의 따스한 세상 바라보기에 비 내리는 오늘, 제 마음도 촉촉히 젖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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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선인장 - 사랑에 빠졌을 때 1초는 10년보다 길다
원태연.아메바피쉬.이철원 지음 / 시루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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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아이들이 있습니다. 외로워와 땡큐라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와 선인장.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와 손도 못댈만큼 많은 가시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아이가 만났어요.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아이와 한 곳에서 그 아이가 찾아와주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아이. 그런데 사랑은 그런 것일까요?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아이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아이의 마음도 정확히 모르면서 그 아이 곁을 지키기를 소망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겁을 내면서요. 그런 고양이에게 외로워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선인장 땡큐였습니다. 외로워는 그저 땡큐가 지어주었다는 사실 하나에 기뻐하면서 그 이름을 받아들이죠. 말 하나에도 조심조심, 행동 하나에도 조심조심. 그렇게 그들의 종(種)을 뛰어넘은 사랑은 시작되었습니다.

 

원태연 작가의 시집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관해 많은 시를 써온 그이지만 저와는 취향이 맞지 않는다고 할까요. 너무 감성적이라 그 감성이 철철 넘쳐흐를 것 같은 그의 시를 읽다보면 온 몸을 옭아매는 듯한 답답함이 느껴졌어요. 분명 그는 시를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었지만 저는 갑갑함에 '정확히 말로 해! 말!' 을 외치고 싶어질 정도였거든요. 편견인지도 모르지만 그의 시는 저에게 '답답한 사랑'이라는 주제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글을 다시 접해보니, 어쩌면 저는 그의 글 안에서 답답한 저를 발견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고양이 외로워와 선인장 땡큐는 서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사이지만 그들의 사랑도 남들처럼 평범합니다. 한 자리에서 가만히 외로워가 찾아와주기만을 바라는 땡큐는 어쩌면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소심해요. 내 말 한 마디에 외로워가 그렇게 훌쩍 가버렸을까,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외로워는 지금 어디에서 몸을 피하고 있을까, 다시는 나를 찾아와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지만 고양이 외로워의 마음도 선인장 땡큐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갔는데 땡큐가 자고 있으면 어쩌지, 괜히 깨우는 것은 아닐까, 땡큐의 곁에서 매일 얘기하고 친하게 지내온 비누 쓸쓸이에게마저 질투를 느끼고 자신을 초라하게 여길만큼 땡큐를 사랑해요. 

 

사랑하기 힘든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참 간단한 것이 사랑이고 인연인 것 같은데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운 걸까요.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몇 번이나 꺼내려던 이별의 말들도 그 사람의 미소 하나, 따뜻한 말 한 마디, 생각지도 못한 배려심에 쏙 들어가 버리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터져나오는 자신의 마음에 때로는 자신이 더 놀라게 되는 경우도 있죠. 어쩌면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외로워와 땡큐처럼 겁쟁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상처도 두렵지만 그를 상처받게 할까봐 무서워서요. 아니, 어쩌면 그것도 핑계일까요? 사실은 자신의 상처가 더 두렵기 때문인지도.

 

외로워와 땡큐의 이야기 속에 간간히 등장하는 비누, 쓸쓸이가 있습니다. 쓸쓸이의 사랑은 그 이름만큼이나 쓸쓸해요.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며 포용해가는 외로워와 땡큐는 행복한 커플입니다. 쓸쓸이는 자신의 존재도 그에게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없으니까요. 늘 그의 손길을 받지만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쓸쓸이. 비가 와서 그런지 외로워와 땡큐보다 쓸쓸이의 마음이 더 아프게 와닿습니다.

 

오디오-그래픽-노블이라는 문구처럼 음악과 그림과 글을 한 번에 접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전 음악없이 책을 한 번, 음악을 들으면서 또 한 번 읽었는데 느낌이 많이 달랐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음악이 없을 때 조용히 읽었을 때가 좋았어요. 총천연색의 색감과 독특한 그림들이 한층 글을 풍요롭게 한 책입니다. 고양이와 선인장, 그들의 사랑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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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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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친구와 이 작품의 영화를 보러 갔다가 <트랜스포머 3> 군단에 밀려 결국 그냥 돌아왔습니다. 너무 강력한 군단 탓일까요, 아니면 저희의 게으름(?) 탓일까요? 엄밀히 말하자면 게으름은 아니었습니다. 저희가 맞출 수 있는 시간은 오늘 뿐이었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영화명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팬더와 그의 친구들+ 로보트들만이 온 극장가를 차지하고 있더이다. 뒤늦게 다른 곳에서는 아직 상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움직이기에는 우린 너무 지쳐있었답니다. 책을 읽고 그 희열에 몸을 부르르 떨었던 저로서는 로보트군단도 흥미롭긴 했지만 어쩌면 좋은 영화 한 편을 놓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영화는 확실히 극장에서 보는 맛과 집에서 DVD로 감상하는 맛이 다르다는 것이 저의 생각.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제가 이 책을 읽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읽고 나서 또 '아구, 안 읽었으면 아까워서 어쩔 뻔 했어!'를 외칠 거라는 것도요. 작품에 대해 아무 정보도 없었지만 표지가 주는 첫인상만 보고 제 맘대로(그야말로 제 맘대로!)  '으흥, 마피아나 갱단이 나오는 소설 아냐? 이런 건 관심없어!'라며 일찍부터 한 구석으로 치워두었기 때문이죠. 그건 어쩌면 주인공 탓인지도 모릅니다. (에헴!) LA의 뒷골목 범죄자들을 주로 변호하면서 그들의 너저분한 돈을 받아 부를 챙기려는 변호사 미키 할러가 등장하기 때문이죠. 죄를 정말 지었는지 어쨌는지는 관심없고 오로지 어떤 판결을 받느냐에만 온 관심을 쏟아붓는 그에게, 어느 날 일생일대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역시나 거대 돈을 찾아 오늘도 눈을 희번득하던 미키 할러 앞에 할리우드의 초거대 부동산 업자 루이스 룰레가 찾아옵니다. 여성을 강간, 폭행했다는 이유로 붙잡힌 그는 미키에게 변호를 요청해요. 또 역시나 그가 했는지 어쨌는지는 둘째고 그가 가진 부를 통해 한밑천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미키는 증거를 모아 재판준비를 합니다. 그런 그 앞에 드러난 과거 어느 사건의 진실. 어쨌거나 법정소설인만큼 다른 스릴러에 비해 액션은 조금 약한 편이지만 법정에서 '치고 빠지기' 전술을 구사하는 상황은, 가슴이 두근두근할만큼 긴장감 있었습니다. 과연 무엇으로 범인을 무릎꿇게 만들고 이 상황을 타개할 것인가도 중점이 되겠지만, 빠른 속도로 읽히는 재판장면은 정말 재밌었어요.

 

미키 할러는 깨끗한 변호사는 아니에요. 법과 정의보다 자신이 벌어들일 수 있는 돈과 현재 살고 있는 집에 집착하는 속물 중의 속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말 죄를 지었는지 아닌지에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얄미운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죠. 하지만 어쩌면 그와 같은 변호사도 세상에는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약간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변호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악하지 않아, 매기. 유죄이긴 하지만 그래도 악한 건 아니라고. 무슨 뜻인지 알지? 차이가 있어. 그 친구들의 말을 듣고 노래를 들으면,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이해하게 돼. 그 사람들은 그저 살아가려고 한 것뿐이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거라고. 그 중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이 태어난 치들도 있고.    -p274

정확히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대목을 보는 순간, 어쩌면 미키 할러도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지금같은 변호사의 모습을 설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키 할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고한 의뢰인, 그리고 그 무고한 의뢰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한 자신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가 변호해온 주 고객은 가볍든 무겁든 죄를 저지른 사람이었어요. 뒷골목 범죄자들. 그런 그들에게서 검은 돈을 받아냄으로써 무고한 의뢰인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봉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또한 마음 한 구석에서는 더러운 돈을 받는 자신의 모습과 그들의 모습을 비교하며 어떻게든 삶을 살아내려 하는 인간의 본질에 눈뜬 것일지도 모르죠. 돈에 눈이 멀어 받아들인 루이스 룰레 사건도 있었지만. 그가 실제인물이 아니니 뭐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러했답니다.

 

매튜 매커너히가 등장한 영화는 많이 보지 못했지만 이 영화만큼은 나중에 DVD로라도 꼭 보고 싶습니다. 처음엔 원래 라이언 필립에 쪼콤 더 관심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과연 매튜가 검은 돈을 받는 미키 할러의 뺀질함과 법정에서의 멋진 장면을 어떻게 연기했을지 확인해보고 싶어요. 더불어 그가 집착해 마지 않던 그의 저택. 그의 저택 앞에서 보이는 장관 또한 어떻게 묘사했을지 궁금합니다. 어쨌거나저쨌거나! 무더운 여름을 개시하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재미를 선사해주었습니다. 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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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 스무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여행의 의미
박정석 지음 / 시공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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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느끼면서 새삼스레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면, 여행서에 관한 평점은 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읽는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어하는 지, 읽을 때의 심리는 어떠한 지, 손에 든 여행서의 내용 중에서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할 것인 지 등이 그 여행서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책장의 두 칸을 꽉 채울 정도로 수많은 여행서를 읽어왔지만, 그 중에서 평점으로 별 다섯을 준 여행서는 손에 꼽을 정도다. 맛집이나 유명 관광지 정도만 나열되어 있어서도 안 되고, 너무 자신의 감상에 젖어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부담을 느껴서도 안 되며, 그렇다고 또 너무 딱딱한 여행서도 읽고 싶지 않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딱 동유럽에 까무러칠 정도로 가고 싶었지만 여행계획의 틀어짐으로 2년 후에나 가게 될 것 같은 상황에 불만 가득한 상태였다. 또한 10일동안 터키로 여행을 떠나신 부모님 대신 집을 지키며 다소 불안한 심리상태까지 보이고 있었다고 할까. 이 여행서에서 무엇을 가치있는 것으로 판단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가고 싶던 폴란드, 터키, 거기에 발트 3국과 핀란드까지 둘러볼 수 있으니 이보다 훌륭한 책이 어디 있으랴. 너무 감상적이지도 않고 너무 쿨하지도 않게 담담한 서술방식도 마음에 들었고, 남자라 생각했던 저자가 (표지에서 가방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남잔지 여잔지 알 수 없는 상태인 데다 저자의 이름을 보고 처음부터 여자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을까;;) 사실은 여자라는 점도 확 와 닿았으니 저 평점은 '개인'적인 '만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으시라.

 

동해안의 시골 마을에 집을 짓고 산 지 1년 반. 점점 식물화되어 가는 모습에 염증을 느낀 그녀, 터키에서 시작하고 핀란드로 끝내는 여행을 시작한다. 내가 이 책을 특히 마음에 들어한 이유 또 한 가지는 여행을 떠나기 전 그녀의 심리상태가 나와 무척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정복할 듯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그토록 갈망하고 원했음에도 자신이 있던 공간이 어느 순간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해 보이는 탓에 쉽게 발을 내디딜 수 없는 여행.

 


 터키, 동유럽, 핀란드, 모두 까마득하다. 지루하던 마당일이 갑자기 할 만하게 느껴지고 밥 주기 귀찮던 닭들도 새삼 통통하고 장해 보였다. 밤이 되어 침대에 누울 때마다 이런 아늑한 곳이 세상에 또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My sweet, sweet home...     -p25

그러나 그대로 정체되어 있을 수는 없는 법. '구구거리는 닭들을 뒤로한 채' (구구거리는 건 비둘기가 아니었나;;) 이스탄불로 날아간다. 친절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 스무 살 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여유로움을 가지고 시작한 여행. 루마니아에서 만난 친구 줄리안과의 즐거운 추억과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당한 강도사건. 아름다운 발트 3국과 고요한 호수와 오두막의 나라 핀란드에서 접한 아름다운 자연 경관들은 내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어느 새 머릿속으로 여행 경로를 짜보는 것이다. 나는 두 달은 시간을 낼 수 없으니 한 달로 계획한다면 어디를 갈 수 있을까, 영어를 못해도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아, 짐은 많이 필요없고 강도의 위험이 있으니 카메라는 잘 가지고 다녀야지.

 

스무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여행의 의미-라는 부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든, 나는 이 문구에서 경제적인 여유로움을 느꼈다. 저자의 다른 책들은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어떤 독자도 그녀의 다른 책에서 비슷한 점을 느꼈던 듯 하다. 그녀가 돈이 많은 사람일 것 같다, 비싼 호텔에서 편히 자고 쉬엄쉬엄 여행하는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을 나도 받았지만 그런 그녀의 여행도 크라쿠프에서 카메라를 도난당함과 동시에 막을 내린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도 여행의 묘미?!

 

그녀의 여행 자체도 부럽지만 그 여행동안 만난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가장 부러웠다. 여행에서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것. 이것보다 더 멋진 일이 있을까. 친절하든 친절하지 않든 나와 얼굴을 마주대하고 대화를 나눈 사람이 있다는 것. 생각만해도 가슴이 부르르 떨린다. 그런데 이런 인연들에 더해 '두리틀'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사람과의 관계도 참 궁금하다. 단순한 친구? 아니면 조금 애매모호한 관계? 푸헤.

 

오랜만에 마음에 든 여행서를 읽어 기쁘기도 하지만 지나온 시간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싶어 알싸해지기도 한다. 나에게 다시 혼자 떠날 기회가 찾아올까. 그 때 나는 두려움에 주춤하지는 않으려나. 그 혼자 떠난 여행에서 소중한 인연을 맺을 수 있을까. 그 때가 되면 나도 저자처럼 나의 집을 가장 달콤한 공간으로 여기며 미적거릴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떠날 마음이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나는 사진으로만 보던 바로 그 곳에 그림처럼 서 있을 자신이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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