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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
후지와라 신야 지음, 강병혁 옮김 / 푸른숲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세상에 대해 섬세한 눈길을 가진 사람을 존경합니다. 타인의 기쁨, 타인의 슬픔, 타인의 고독에 귀기울이고 눈여겨 볼 수 있는 사람이요. 자신의 생각과 감정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간직한 사연을 존중할 줄 알며 그 깊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갈 수 있는 것도 탁월한 능력 중 하나일 겁니다. 특히 요즘처럼 오로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길을 달려가느라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세상에서요. 달리기를 멈추고 뒤돌아보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 자부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정확한 답은 없겠지만 결국 위로받을 수 있는 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를 열고 그 하루를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으니까요.
사진작가로 유명한 후지와라 신야의 에세이, 14편입니다. 그 어떤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고 물을 가득 머금은 꽃잎처럼 촉촉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지하철 한 정거장을 지나칠정도의, 딱 그만큼의 시간을 할애하면 읽을 수 있는 짧은 이야기들이지만 그 이야기들 속에 담긴 감동과 설레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일본 지하철에 놓이는 무가지 [메트로 미니츠]에 6년 동안 연재한 일흔한 편의 글 가운데에서 골라 수정한 것이라고 해요.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14편의 이야기를 제외한 다른 에피소드들은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을지 궁금하네요.
아마추어 모델과 아마추어 사진작가의 한 순간의 교감, 서늘한 도시에서 느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어렸을 적 추억을 발판으로 다시 뿜어져 나오는 삶에 대한 의지, 행복했던 시절을 세상의 마지막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부부, 상처받은 동물과 인간의 애정, 우연히 들른 찻집에서 발견한 소소한 감정들, 지하철 한 정거장을 지나는 사이에 일어난 사건, 노화가의 황혼에 찾아온 희생적인 사랑 등. 과연 현실에 이렇게 영화같은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는가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의 가슴 따뜻한 에피소드들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것은 찰나, 아주 짧은 순간이에요. 아주 작고 짧은 시간 속에서 인생을 좌우할 선택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면 삶의 오묘함에 가슴이 찌릿해져 옵니다.
책의 내용들도 그렇지만 서정적인 사진과 한 줄의 시같은 소제목들도 인상적이에요. 코스모스 그림자 뒤에는 늘 누군가 숨어 있다, 오제에서 죽겠습니다, 당신이 전철의 다른 방향을 보았을 때, 거리의 소음에 묻혀 사라질 만큼 작고 보잘것없는 것, 예순두 송이와 스물한 송이의 장미 등 소제목 자체에도 일본 특유의 감성이 전해져오는 듯 합니다. 노작가의 따스한 세상 바라보기에 비 내리는 오늘, 제 마음도 촉촉히 젖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