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없는 꿈을 꾸다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사상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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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는 일단 계획했던 일 하나를 다음 주 월요일에 시작하고 그 일에 맞추어서 다음 다음 일도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중에서 하나만 살짝 말씀드리자면, 새해가 되면 늘 결심하는 운동! 으아, 저 그렇게 끈기 없는 사람 아닌데 이 운동에 한해서는 그 끈기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쁘고 중요한 해가 될 것 같아서 체력을 좀 기르려고요! 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모두 원하는 일 그대~로 다 이루어지시길. 독서 계획을 잘 지키는 일도 목록에 포함되어 있겠죠? 저처럼.

 

2012년의 마지막을 일본문학으로 장식했는데 2013년의 처음도 일본문학으로 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은 히가시노 게이고, 처음은 츠지무라 미즈키. 일본에서 가장 핫!하다고 할 수 있는 두 작가지만,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나이로 보나 세대로 보나 약간 지고 있는 해라고 한다면 츠지무라 미즈키는 힘차게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6년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흐른다]가 출간된 이후 [밤과 노는 아이들], [얼음고래] 이후 잠깐 뜸했던 그녀의 작품이, 2011년 [츠나구]로 인해 기지개를 폈고 2012년 [오더 메이드 살인 클럽], [물밑 페스티벌], [달의 뒷면은 비밀에 부쳐], [열쇠 없는 꿈을 꾸다]까지 무려 네 편이나 출간되었습니다. 그 중 이번에 읽은 [열쇠 없는 꿈을 꾸다]는 제 147회 나오키상까지 수상했어요. 요즘에는 대중적 흥미까지 고려한 나오키상이다 보니, 작품성과 대중성 둘 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총 5편의 이야기를 묶은 단편집입니다. 일본문학 중 단편집을 자신있게 권할 수 있는 작가가 딱 두 명 있는데 마쓰모토 세이초와 미미 여사입니다. 이제 셋이 될 듯 합니다만. 다섯 편 모두 여성을 중심으로 일상 속에 자리한 미묘한 심리를 굉장히 날카롭게 그린 수작입니다. 저 또한 여자이다 보니 여기에 실린 이야기들에 흠칫흠칫,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어요.  <니시노 마을의 도둑>, <쓰와부키 미나미 지구의 방화>, <미야다니 단지의 도망자>, <세리바 대학의 꿈과 살인>, <기미모토 가의 유괴>인 챕터들의 제목을 보고 일견, 유쾌한 풍자극이거나 유머러스한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음흉한 마음이나 공포스러운 살의, 절실한 애정 등 인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마지막 이야기인 <기미모토 가의 유괴>였어요. 결혼을 하고 그토록 아기를 갖기 원했던 한 여성이, 아기가 태어난 후 육아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게 되는 하나의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츠지무라 미즈키, 그녀도 2008년 결혼을 하고 2011년에는 첫아이를 얻은 엄마라는 점입니다. 아기 엄마인 그녀가 역시 아기 엄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소설, 어쩐지 그녀의 이야기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설사 자신의 이야기일지라도 내보이기를 주저하지 않는 용기,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지만 쉽게 말로 표현하지 못할 심리를 세심하고 정확하게 그려냈다는 점이 감동입니다.

 

제목에서 나타내는 '열쇠'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야기에 등장하는 각 여성들은 자신만의 망상 속에서 현실과는 전혀 다른 꿈을 꿉니다. 착각도 하죠. 타인이 보기에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바보스러울 때도 있고 안타까울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녀들이 원한 것은 행복, 마음의 평온함 등이었습니다. 환상 속에 안주하며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은 우리 모두 가지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환상은 환상으로 남겨둘 때 아름다운 게 아닐까요? 환상 속에서 위안을 찾되,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겁내지 말기. 작가는 당당하고 씩씩하게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고 헤쳐나갈 길을 모색할 것을 당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오키상까지 수상한만큼 이제 츠지무라 미즈키, 그녀의 가치는 상당히 높아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학원 미스터리로 유명한 그녀지만 지금까지 읽은 작품들로 미루어볼 때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줄 작가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어쩌면 히가시노 게이고보다 더 높이 날아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녀의 다음 행보를 주시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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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집사를 믿지 마라 스펠만 가족 시리즈
리저 러츠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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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유쾌한 작품 한 편 만났습니다. [네 가족을 믿지 마라]를 시작으로 <~믿지 마라> 시리즈를 펴낸 리저 러츠의 신작이에요. 이 [네 가족을 믿지 마라]와 얽힌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요, 택배가 왔을 때 미리 뜯어 본 동생이 제목을 오해하고는 '제발 이런 거?) 읽지 말라'며 험악한 눈초리로 저를 쳐다봤었더랬죠. 사실 이 작품도 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책장에만 꽂혀있는 터라 그 장르를 감히 짐작도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인 줄 알았으면 진작 읽을 걸 그랬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작품성이 엄청 뛰어나다거나 문장이 무지 아름답다거나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제가 누누히 밝힌 저만의 독서의 목적은 재미. 재미 면에서는 저는 확실히 만족했어요.

 

주인공은 원래도 그러했는지는 모르는 이자벨 스펠만입니다. 서술되는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학창시절 엄청난 사고뭉치에 지금도 자신의 앞가림을 하기에는 조금 부족해보이는 32세 아가씨에요. 하지만 지금은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탐정사무소에서 가족사업을 돕고 있고 언젠가 가업을 물려받을 당찬 각오 정도는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자벨 주위에 사건사고는 왜 이리도 많은지요. 오랜 세월 스펠만 사의 고객인 윈슬로씨의 부탁으로 그의 고용인들 중에 있을 지도 모르는 불량분자를 색출하기 위해 친구 렌에게 집사 역할을 떠맡겨야 하고, 예전에 고백했던 형사 헨리 스톤과의 미묘한 관계하며, 아일랜드 억양을 사용하지만 술을 무한정 리필해주는 전 남자친구가 될 코너에, 엄마는 자꾸만 변호사와 선을 보라며 난리, 여동생 레이는 부당하게 감옥에 갇힌 레비를 위해 이자벨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나마 정상인이라고 생각한 오빠 데이비드와 그의 여자친구 매기의 관계까지 염탐해야 하는, 그런 일상인 것입니다, 네.

 

매우매우 산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크흣. 책을 읽다가도 대체 이 내용들을 어떻게 정리하려고 이러나-하는, 걱정 아닌 걱정까지 해줘야 할 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두 세가지는 하나로 모아지고, 또 한 두가지는 한 줄기를 이루며 대체적으로 무난한 결말을 맺으니 이것이 또 신통방통합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미국 시트콤을 보는 것 같았어요. 절대 현실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한 가족을 중심으로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만든 시트콤. 그런데 이런 분위기가 절대 싫지 않은 거에요. 우린 너무 진지하게 살아가는 인생들이니까요. 가끔은 이렇게 엉뚱하고 유쾌한 가족들을 바라보며, 비록 실현시키기에는 어려울지 몰라도 실제로 이런 가족을 만들어보면 좋겠다, 하는 망상 한 번 꾸면서 즐거워하면 그 뿐!!

 

엄마로부터 자꾸만 선을 보라는 강압 아닌 강압을 받는 모습에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고, 결혼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서양문화에 약간의 부러움을 느끼기도 하면서, 또 열 세살이나 연상인 헨리 스톤과의 미묘한 감정들에 괜힌 두근거리고, 진짜 내 동생이라면 몇 대 쥐어팰 정도의 말썽꾸러기지만 소설이니까 귀여워보이는 레이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즐겁게 읽었습니다. 문장들이 길지도 않고 톡톡 끊어지는 맛이 의외로 읽는 재미가 읽는 작품이었어요. 재치있는 대사와 개성있는 캐릭터들로, 오랜만에 순수하게 빠져들어 읽었던 것 같습니다.

 

아! 한 가지 칭찬하자면요, 굉장히 친절한 작품이라는 점. 앞에 나온 시리즈를 읽지 않았어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고 이자벨이 간단히 가족소개와 그 외 알 필요가 있는 부분은 착실하게 설명을 해주거든요. 뭐 먼저 나온 시리즈를 읽고 읽으셔도 괜찮지만, -나는 최신간이 좋다!-하는 분들은 요 책 먼저 읽어도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것을 미리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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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독스 1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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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웅!! 2012년의 마지막 날, 마지막 밤입니다. 한 2년 전부터는 새해가 되어도 -어제처럼 열심히 살자!!-를 목표로 하고 있는 지라 그다지 새해 기분이 나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 속에 존재하는 거니까요. 그런 생각을 하니 올해는 이상하게 마음이 몽실몽실 해요. 그런 마음과는 달리 저는 그저 평범하게 오늘을 보냈어요. 원래 연말연시는 가족과 함께. 치과 진료 다녀오고, 어무니랑 시장 가서 장 봐오고, 낮자도 자고요. 아, 히가시노 게이고의 [패러독스 13]도 읽었네요. 올해의 마지막 리뷰를 이 작품이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책이 재미가 있었다면 훨씬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오랜만에 읽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이에요. 주변 분들의 평이 괜찮은 듯 하여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저는 읽는 내내 느무느무 지루했습니다. -아니, 이게 정말 히가시노 아저씨의 작품이란 말야?-하면서요. 문장이 어려운 편은 아니라서 570 페이지의 분량을 읽어내는 데 무리는 없었지만, 으아, 저 중간에 이 책 던져버릴 뻔 했어요. 소재는 참신합니다. 블랙홀의 영향으로 엄청나게 거대한 에너지파가 지구를 덮치고 그 결과 시공간의 뒤틀림에 의해 13초 간의 시간 공백, 즉 p-13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죠. 그 사이에는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나서는 안 되고 죽은 사람이 생겨서도 안 됩니다. 조그만 차이로도 역사가 바뀔 수 있으니까요. 정부는 혼란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주 기관에 단순히 3월 13일 1분 13초부터 약 20분 동안은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하지만. 그 시각 곳곳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발생해요. 경찰인 세이야와 후부키는 범인을 쫓다가 총에 맞았고, 정신을 차린 후부키가 마주한 세상은 사람이 모두 사라져버린 도쿄입니다. 화재와 지진이 발생하고 세찬 비로 인해 도심에서 쓰나미를 마주하게 된 세상 속에서 후부키는 형 세이야, 노부부, 여고생, 소녀와 그 어머니, 갓난 아기, 간호사, 취업 준비생, 회사원, 야쿠자 등을 만나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여야 해요. 그 와중에 세이야는 p-13 현상에 대해 알게 되고, 자신들이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됩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조그마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 어느 때보다 약해진 사람들은 하나 둘 죽음을 맞이합니다.

 

소재 면에서는 굉장히 귀가 솔깃할만한 작품이었어요. 가뜩이나 2012년, 종말론이 대두되던 시기에 등장한 작품이니 많은 독자들의 기대를 받았을 겁니다. 문제는 제가 이 작품을 통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는 점이에요. 좋은 이야기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전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원래의 세상이 무너진 후 생기는 갈등,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버려서는 안 될 가치들에 대해 느끼게 하기 보다는 설명해서 이해시키려 한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느껴야 할 것을 글로 읽다보니 감동은 반감되고, 설명이 길어지다보니 분량은 많아져서 지루하게 느껴졌던 게 아닐까 합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등장인물들이 너무 판에 박혀 있다고 할까요. 마치 아주 오래 된 일본 재난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작가는 -세상이 바뀌면 선악도 바뀐다. 살인이 선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그러한 이야기다-라고 밝혔지만, 이 작품이 그런 심오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저의 머리에는 단순한 생존에 관한 이야기, 억지로 짜맞추려는 듯한 감동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어쨌든 2012년이 이렇게 지나가고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습니다. 올 1월부터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그리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렇게 무사히, 건강하게 1년을 보낸 것이 참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내년에도 건강하시고 늘 행복하세요~* 2012년의 마지막을 기념하며 올린 리뷰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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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5
우타노 쇼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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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봄에서 여름인데 어째서 가을이 빠지고 '이윽고' 겨울인지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라는 단 한 작품으로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독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작가 우타노 쇼고의 신작인데요, 후반부 단 몇 페이지로 세상이 바뀐다는 평에 역시 반전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반전을 위해 읽혀질 소설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심오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름에서 얼마쯤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찾아오는 계절은 가을. 그 가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마치 사라져버린 것처럼, 빨간빛으로 채색된 겨울이란 단어에 가을이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쩐지 가슴 뭉클하게 몇 번을 되뇌어보게 만드는 제목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봄. 히라타, 그 이름처럼 평범하게 자라 평범하게 대학에 가고 평범하게 취직해서, 비록 뜨거운 연애는 아니더라도 한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하루카라는 딸을 얻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직장에서도 좋은 자리에 올랐죠. 매일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 밤 12시까지 일하고 4시간 정도 쉰 후 다시 출근하는 일상. 토요일 출장도 마다하지 않았고 접대에서도 빠지지 않았어요. 그것이 평범한 히라타가 평범하다 믿는 인생이었고 남자로서 최고의 자리라 생각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아내와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고 딸 하루카와의 의견차이로 인해 벌이는 입씨름조차 행복이라 여겨질만한 나날들.

 

여름. 하루카가 뺑소니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히라타와 아내의 세상은 단숨에 무너지죠.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히라타는 견딜 수 있었을 겁니다. 그는 평범한 샐러리맨, 일을 하다보면 하루카의 죽음도 서서히 희미해질 것이라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그의 아내는 하루카가 사고를 당하던 날, 테니스클럽 송년모임에 갔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죄책감에 홀로 허덕입니다. 그나마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공소시효가 끝나는 순간 끊어져버리고, 결국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고 말죠. 그렇게 히라타의 여름이 지나가고 그는 지금, 혼자입니다.

 

가을. 직장에서 좌천당해 한 마트의 보안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히라타 앞에 딸 하루카와 태어난 해가 같은 마스미가 나타납니다. 단순한 좀도둑이라 생각했던 그녀 앞에서 히라타의 마음과 생각은 다시 하루카가 사고를 당했던 그 때를 정처없이 떠돌고, 자꾸만 신경쓰이는 그녀를 처참한 인생에서 구해보고자 노력하죠. 그런 그의 사정을 알게 된 마스미는, 그 때까지는 굉장히 연약하고 비루했으며 가엾은 여자였던 그녀는, 조금이라도 그에게 보답하기 위해 일생일대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겨울. 그 때까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병은 때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히라타라를 잠식해오고, 그는 현재,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교적 담담한 문체지만 내재된 슬픔과 고독은 굉장히 깊고 큽니다. 딸아이의 죽음으로 순식간에 붕괴된 가정, 그리고 절망. 그리고 그런 절망 속에서 순순히 죽음을 기다리는 이가 아무 조건 없이 크고작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죠. 그래서 하게 된 고백이, 그러나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과오. 결국 마스미는 부족했던 거에요. 히라타가 안고 있는 슬픔과 괴로움을 전부 이해하기에는. 매일 남자친구에게 맞고 비열하게 이용당하면서도 이 남자가 나 없이 어떻게 살까를 염려하는 바보같고 부족한 그녀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선택으로 인해 히라타가 남은 얼마를 홀가분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세상에 존재하기 어려운 '구원'이라 부를만한 것이 아닐까요.

 

어떻게 쓰여졌느냐에 따라 순문학이라고 부르는 작품이 될 수도 있었던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살인범의 공소시효와 뺑소니범의 공소시효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목숨에 대한 고찰, 법제도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고요. 유치하고 조금 낡은 느낌이지만, 한 사람의 운명이 다른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고 인력으로는 끊을 수 없는 우연이 반복되어 맞게 된 결말이 주는 가슴싸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럴 수도 있구나, 안타까움과 함께 나의 인생의 남아있는 계절들은 부디 평안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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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명작 스캔들 - 도도한 명작의 아주 발칙하고 은밀한 이야기
한지원 지음, 김정운.조영남, 민승식 기획 / 페이퍼스토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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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스캔들]이라는 이름의 책을 두 권 읽은 후 새롭게 접하는 또 다른 [명작 스캔들]입니다. 출판사에서도 타 출판사의 앞선 두 권을 의식했는지 제목 앞에 'KBS' 표시를 붙여 놓았네요.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토요일 아침, 우연히 일찍(?) 일어나게 되면 가끔 시청하곤 했던 프로인데 입담 넘치는 조영남님과 김정운 교수 덕분이었는지 꽤 흥미로웠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신지 모르겠는데 전 이 두 분, 얼굴만 봐도 이상하게 웃음이 나더라고요. 김정운 교수님은 모 방송국의 강의 프로를 통해 그 입담과 재치를 알게 되었고 얼마 전 [남자의 자격]이라는 책도 쓰셔서 꽤 유명해지신 듯 합니다. 제 동생도 그 책, 좋아하던걸요. 아직 저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사실 다른 예술이나 미술 서적들처럼 서술형식이 아니라 대화 형식으로 풀어나가주길 바랐습니다. 방송을 보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을 받고 싶었거든요. 그러나 이 책 역시 다른 서적들처럼 서술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처음 작품들을 소개할 때마다 조영남님과 김정운 교수님의 그에 대한 대화가 약간 소개되어 있다는 것, 글을 쓰신 분의 능력이 탁월한 덕분인지 읽는 데 크게 무리가 없었다는 겁니다. 간혹 미술서적들을 읽다보면 번역 자체가 어려워서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었는데 이 책은 번역본도 아니고, 문장 자체가 쉽고 재미있어서 술술 읽혀졌어요. 재미를 위해 읽는 책도 물론 그렇지만 뭔가 지식을 얻고 싶어서 읽을 때의 문장은,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총 20편의 작품들이 실려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그림 뿐만 아니라 사진, 음악, 건축물 등도 포함되어 있어요. 폭넓은 분야를 소개해준다는 점도 장점이지만 익숙했던 것들을 재조명해준다는 것도 이 책의 커다란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면 비틀즈의 <예스터데이>. 이 음악이 탄생하게 된 계기부터 제목인 '지난날'이라는 단어가 주는 힘, 원래는 '스크램블드 에그'였던 이 곡이 멤버들에게 비웃음을 사다가 완성된 비화 등 재미있는 이야기로 '명품'을 더욱 가깝게 만들어주죠. 또한 서양의 작품들 뿐만 아니라 우리 것, 조선 중기 화가 김명국의 <설중귀려도>나 신윤복의 <월하정인>,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도 실려 있어 반갑고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답니다.

 

전체적으로 볼거리가 풍성한 책이에요. 그림이나 사진도 풍부하고 설명도 유익하고, 무엇보다 읽는 기쁨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두고두고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정운 교수님, 안식년이라 지금 유학 중이라고 하시던데 어서 돌아오셔서 다시 <명작 스캔들> 진행해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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