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5
우타노 쇼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봄에서 여름인데 어째서 가을이 빠지고 '이윽고' 겨울인지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라는 단 한 작품으로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독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작가 우타노 쇼고의 신작인데요, 후반부 단 몇 페이지로 세상이 바뀐다는 평에 역시 반전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반전을 위해 읽혀질 소설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심오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름에서 얼마쯤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찾아오는 계절은 가을. 그 가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마치 사라져버린 것처럼, 빨간빛으로 채색된 겨울이란 단어에 가을이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쩐지 가슴 뭉클하게 몇 번을 되뇌어보게 만드는 제목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봄. 히라타, 그 이름처럼 평범하게 자라 평범하게 대학에 가고 평범하게 취직해서, 비록 뜨거운 연애는 아니더라도 한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하루카라는 딸을 얻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직장에서도 좋은 자리에 올랐죠. 매일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 밤 12시까지 일하고 4시간 정도 쉰 후 다시 출근하는 일상. 토요일 출장도 마다하지 않았고 접대에서도 빠지지 않았어요. 그것이 평범한 히라타가 평범하다 믿는 인생이었고 남자로서 최고의 자리라 생각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아내와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고 딸 하루카와의 의견차이로 인해 벌이는 입씨름조차 행복이라 여겨질만한 나날들.

 

여름. 하루카가 뺑소니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히라타와 아내의 세상은 단숨에 무너지죠.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히라타는 견딜 수 있었을 겁니다. 그는 평범한 샐러리맨, 일을 하다보면 하루카의 죽음도 서서히 희미해질 것이라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그의 아내는 하루카가 사고를 당하던 날, 테니스클럽 송년모임에 갔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죄책감에 홀로 허덕입니다. 그나마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공소시효가 끝나는 순간 끊어져버리고, 결국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고 말죠. 그렇게 히라타의 여름이 지나가고 그는 지금, 혼자입니다.

 

가을. 직장에서 좌천당해 한 마트의 보안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히라타 앞에 딸 하루카와 태어난 해가 같은 마스미가 나타납니다. 단순한 좀도둑이라 생각했던 그녀 앞에서 히라타의 마음과 생각은 다시 하루카가 사고를 당했던 그 때를 정처없이 떠돌고, 자꾸만 신경쓰이는 그녀를 처참한 인생에서 구해보고자 노력하죠. 그런 그의 사정을 알게 된 마스미는, 그 때까지는 굉장히 연약하고 비루했으며 가엾은 여자였던 그녀는, 조금이라도 그에게 보답하기 위해 일생일대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겨울. 그 때까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병은 때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히라타라를 잠식해오고, 그는 현재,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교적 담담한 문체지만 내재된 슬픔과 고독은 굉장히 깊고 큽니다. 딸아이의 죽음으로 순식간에 붕괴된 가정, 그리고 절망. 그리고 그런 절망 속에서 순순히 죽음을 기다리는 이가 아무 조건 없이 크고작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죠. 그래서 하게 된 고백이, 그러나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과오. 결국 마스미는 부족했던 거에요. 히라타가 안고 있는 슬픔과 괴로움을 전부 이해하기에는. 매일 남자친구에게 맞고 비열하게 이용당하면서도 이 남자가 나 없이 어떻게 살까를 염려하는 바보같고 부족한 그녀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선택으로 인해 히라타가 남은 얼마를 홀가분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세상에 존재하기 어려운 '구원'이라 부를만한 것이 아닐까요.

 

어떻게 쓰여졌느냐에 따라 순문학이라고 부르는 작품이 될 수도 있었던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살인범의 공소시효와 뺑소니범의 공소시효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목숨에 대한 고찰, 법제도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고요. 유치하고 조금 낡은 느낌이지만, 한 사람의 운명이 다른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고 인력으로는 끊을 수 없는 우연이 반복되어 맞게 된 결말이 주는 가슴싸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럴 수도 있구나, 안타까움과 함께 나의 인생의 남아있는 계절들은 부디 평안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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