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심증후군
제스 로덴버그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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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 제이컵으로부터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을 들은 순간 심장이 둘로 쪼개져 죽음을 맞은 브리. 엄청난 고통이 소녀의 몸을 휩쓸고 지나간 후 브리는 영혼으로서 눈을 뜨고 그녀의 죽음 이후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게 됩니다. 슬퍼하는 가족과 친구들, 추도식, 장례 절차. 그리고 버스를 타고 천국으로 향하죠. ‘천국 한 조각’이라는 피자집에서 만난 다양한 영혼들. 하지만 브리는 여전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듭니다. 부디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지만 시간은 어느 새 일주일을 넘어갑니다. 그런 브리에게 다가오는, 역시 영혼인 남자아이 패트릭. 패트릭은 브리에게 다양한 경험과 조언을 건네죠. 영혼이 되어서야 알게 된 친구들과 가족들의 비밀. 그리고 자신의 전생과 패트릭의 존재가 갖는 의미를 알게 된 브리는, 이제 서서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비록 영혼이지만 한 발 내딛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마치 브리가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구조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그러나 초반에 단순한 틴에이저 소설로서만 다가옵니다. 남자친구의 폭탄고백에 심장이 둘로 쪼개져 죽고, 그런 남자친구에게 복수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여주인공과 그녀를 곁에서 도와주는 또 다른 남자 패트릭. 이건 영혼들끼리의 삼각관계인가-라는 추측을 하기 쉽죠. 또 브리의 친구와 미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제이컵을 보면서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라는 노래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일견 단순한 구조를 보이는 듯한 이야기지만 브리가 살아있었을 때는 결코 보지 못했던 주변 사람들의 비밀이 하나씩 벗겨지면서, 과연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하는지,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보며 가장 돌아가고 싶은 그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고찰하게 하는 면이 있어요.

열여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고 처음에는 충격에 휩싸였으나 서서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별을 준비하는 브리. 죽음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사랑과 배려를 깨우칠 수 있었지만,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행운의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진부하고 상투적일지 몰라도 브리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하며 살기를,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항상 돌보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는 조언을 남기네요.

행복이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슬픔이나 기쁨 속에서도

즐거움이나 고통 속에서도

옳은 일을 하면 평화를 찾을 것이요

삶에서 평화보다 더 좋은 선물은

사랑뿐이니

늘 사랑하며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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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7
나가오카 히로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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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홋카이도에 갔을 때 저의 발목을 많이 붙잡았던 곳 중 하나는 서점이었습니다. 마음만큼 책을 사가봤자 분명히 쌓아놓기만 하고 제대로 읽을 시간도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자꾸 욕심이 생기는 거에요. 여러 가지 먹거리도 사야 하고, 정해진 무게를 넘으면 추가요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지만 결국 가방 여기저기에 책을 꾹꾹 눌러 넣는 형국이 되었답니다. 그렇게 몇 권의 책을 고르기 위해 서점을 휩쓸고 다니던 그 때, 나가오카 히로키의 [교장]도 서점 한쪽 면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무척 인기 있는 도서를 소개하는 코너 같은 곳에서요. 그 때 구입했던 책들도 1년쯤 지나자 한국어판이 나오기 시작했고, 제 기억 속 아스라이 존재하던 [교장]도 요렇게 만나게 됐네요.

사실 나가오카 히로키라는 작가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귀동냥]을 통해서였는데, -지난 20년간 최고의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은 작품치고 저는 그저 그렇다는 인상을 받았었거든요. 그래서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는데 웬걸, [귀동냥]보다 훨씬 재미있었어요! 급박한 사건이나 롤러코스터에 비유할 수 있는 스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내면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에피소드들이 흥미로웠습니다. 그 중에는 제가 개인적으로 품고 있는, 어쩐지 이건 일본작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일본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분위기와 사건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이야기들도 있어서 조금 섬뜩함을 느끼기도 했지만요.

6편의 에피소드에 에필로그까지, 총 7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배경은 경찰학교지만 경찰을 꿈꾸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청춘소설이 아니라, 마치 그 내부를 고발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다소 음울한 작품이었어요. 생도들 사이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경쟁의식, 그로 인해 비롯되는 고발과 복수, 부적절한 거래 등. 우리나라에서 경찰학교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나온다면 그 안에서 맞게 되는 위기를 뛰어넘고 누구와 누구는 우정으로, 누구와 누구는 사랑으로 이어지는 내용이 전개되겠지만, 나가오카 히로키가 보여주는 경찰학교의 내부는, 마치 이런 저런 음울한 사회가 있다는 것, 졸업하고 현장에 뛰어들면 이보다 더 가혹한 세계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각오를 단단히 하고 사회 속으로 나아가라는 메시지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이 감탄스러웠던 것 같아요. 작가 자신이 어중간한 마음으로는 계속할 수 없는 일이 바로 경찰이라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

각각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도 잘 살아있지만 역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가자마 기미치카일 겁니다.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보고 있다는 느낌이 잘 나지 않는, 그러면서도 상대를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을 가진 백발의 남자. 그의 교육법은 뭐랄까, 상당히 과격한 편입니다. 물리적인 힘을 가한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그는 생도들이 어디까지 행동을 취하는지, 그리고 그 행동을 통해 무엇을 느끼는지를 관찰합니다. 극한의 위기의 순간에도요. 그런 그를 의식하게 된 생도들은 그를 존경하기도,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결국 나름대로 무언가를 느끼고 얻게 되죠. 다른 작품들에서 보기 쉽지 않은, 정말 독특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작품은 연작단편집이지만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한 장편도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나가오카 히로키가 쓴 장편. 단편과는 다른 어떤 맛을 낼지 궁금합니다. 그 작품에 이 가자마 기미치카가 등장한다면 더 반가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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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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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블로그에 들어왔더니 정신이 없는 와중에 남기는 리뷰입니다. 그러나 책 내용은 잘 기억하고 있어요!-라고 믿고 싶네요. 오랜만에 읽은 아멜리 노통브입니다. 그녀의 초기 작품들을 꽤 읽었던 것 같은데, 너무 어렸을 때 읽었기 때문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뭔가 어렴풋이,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들은 아니었다는 느낌만 남아있어요. 그래서 한 동안 읽지 않았었는데 저를 그녀에게 인도한 것은 <푸른 수염>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는 것. 자신만의 비밀의 공간을 만들어두고 그 방에 발을 디딘 여자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푸른 수염 이야기요. 그 이야기를 통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지, 그녀는 어떻게 푸른 수염 이야기를 자신만의 색채로 그려냈을지 오랜만에 궁금해졌습니다.

친구 집 불편한 소파에서 살던 사튀르닌.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싼 값에 빌릴 수 있는 방 한 칸이었지만 그녀와 함께 면접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많은 여인들의 관심은 그 집의 남자, 돈 엘레미리오였습니다. 그 집에 살던 많은 여자들이 실종되었다는 소문을 들려주며 돈 엘레미리오는 굉장한 매력남이라고 일러주죠. 그 말에 콧방귀를 끼고! 오로지 이 집의 방 한 칸만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그녀의 바람대로 돈 엘레미리오는 그녀에게 방을 빌려줍니다. 절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심지어 신부마저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개인미사를 드리고, 자신이 굉장히 고귀한 존재라는 자부심 속에 살아가는 남자. 그는 사튀르닌이 황금색 그릇에 담긴 노란 달걀 크림이 아름답다고 말하자마자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며 열렬히 마음을 고백하는 엉뚱함을 보이기도 해요. 그와의 몇 번의 저녁식사를 통해 자꾸만 그에게 향하는 마음을 느끼지만, 명석한 사튀르닌은 그의 비밀을 알아채고 그를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책이 생각보다 두껍지 않아 더 읽기가 편했던 것 같아요. 마치 하나의 공을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튕기듯 대화를 이어가는 돈 엘레미리오와 사튀르닌의 대사는 읽는 맛이 살아있습니다. 초반의 엉뚱함과 수상함을 걷어내는 다정함과 세심함을 보이는 돈 엘레미리오 앞에서 그의 행적을 의심하던 사튀르닌의 마음은 어느 새 ‘사랑’이라는 감정을 생각하게 되죠. 결국 자신의 편의에 따라 많은 여자들의 실종은 그와 관계가 없고, 여자들은 어딘가에 잘 살아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지만 똘똘한 사튀르닌은 상황을 잘 살피고 모든 정황을 끼워맞춘 후 결국 하나의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선택을 하기까지의 그녀는 괴로웠을까요? 잠시나마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통통 튀는 프랑스식 유머를 맛본 듯한 기분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가볍지도 않고요. 무척 인상 깊은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래, 이게 아멜리 노통브였어’라는 추억을 되새기게 해주네요. 유머와 철학이 겸비된 아멜리 노통브 판 푸른 수염. 그 비밀의 방에 발을 들여보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저는 이제 발을 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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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 고 백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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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으로 잭 리처의 세계에 입문한 저는 그 후 말 그대로 <잭 리처 시리즈>를 끌어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소장하고 있었으나 책장 깊숙이 잠들어있던 두 권도 꺼냈고, 인터넷 서점에서 나머지 작품들을 사들였어요. [1030],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다른 이야기들을 읽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잭 리처는 원래 혼자 움직여서 사건을 해결하는 쪽이었나봐요. 그런데 [1030]에서는 그의 특수부대원들이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여럿 등장해서 각각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죠. 물론 잭 리처의 매력을 나타낸 장면들도 -궁극의 청각까지-대단했고요. [1030]에 비해 [네버 고 백]은. 음..[1030]과 같은 큰 감흥은 없었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잭 리처는 여전한 것 같고, 그는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짧은 전화 통화로 호감을 느낀 수잔 터너 소령을 만나고자 버지니아로 향한 잭 리처. 하지만 그녀는 뇌물수수 혐의로 영창에 갇혀있는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자리에 임시로 부임한 모건 중령은 잭 리처에게 16년 전 사람을 때려 숨지게 했다는 죄목과, 예전 한국에 나가있었을 때 만난 캔디스라는 여자가 그의 딸을 낳았으며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낮도깨비같은 말을 듣게 되죠. 그 와중에 수잔이 아프가니스탄에 보낸 대원 두 명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잭 리처는 모종의 음모가 있음을 감지합니다. 결국 수잔 터너와 같은 영창에 갇히게 된 잭 리처. 육중한 몸과 뛰어난 두뇌로 수잔 터너와 탈옥하는 데 성공하고, 그녀의 대원 두 명이 죽기 전 남긴 메시지를 따라 진실을 밝히기 위해 먼 길을 떠납니다.

[네버 고 백]에 대한 전반적인 저의 감상은 ‘지루하다’입니다. [1030]에서 맛보았던 스릴도, 기승전결의 구조를 따라 절정 부분에서 느낄 수 있는 뭔가 팍 터지는 느낌도, 잭 리처가 가진 궁극의 능력에 대한 감동도 부족한 느낌이었어요. [네버 고 백]에서 잭 리처는 수잔 터너를 구해내기 위해 기지를 발휘하고, 그녀와 긴 여정을 시작하고, 비행기 안에서 그들을 괴롭히고 미행하는 사내 둘을 훌륭하게(?) 제압하지만 뭔가 아주 많이 부족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1030]에서는 특수부대원들에게 덤빈 악당들에게 복수하는 통쾌한 장면도 있었는데, 이번 이야기에서는 뭔가 모두 흐지부지 된 그런 허탈한 마음이었어요. 어째서 톰 크루즈가 <잭 리처 시리즈> 영화 속편으로 이 작품을 선택했는지 잘 모르겠는 심정. 수잔 터너라는, 마치 본드걸같은 여성이 등장하기 때문인 걸까요.

문득 이미 끌어모은, 그러나 아직 읽지 않은 다른 잭 리처 이야기들로 의심의 눈길이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고보니 <잭 리처 시리즈>에도 호불호가 갈리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네버 고 백]이 그에 해당하는 걸까요. 부디 <잭 리처 시리즈>를 읽으며 ‘지루하다’는 느낌을 다른 작품에서는 받을 수 없기를, 이미 책을 사모았으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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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맨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6
오리하라 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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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맨션, 아파트라는 공간은 참 오묘한 곳입니다. 같은 건물에서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임에도 자신만의 공간에서 독자성을 인정받아요. 마음먹기에 따라 누군가와 어울릴 수도, 완벽하게 혼자인 삶을 살 수도 있는 곳. 저는 지금 사는 곳에서 10년 넘게 살아서인지 앞 호수에 사시는 어른들과 인사도 하고 안부도 묻곤 하지만, 그 외 다른 층에는 누가 사는지, 설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쳐도 이 사람이 우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인지 아니면 손님인지 알 수 없는 때가 많습니다. 최근 들어 우리가 이웃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경우는 어떤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아닐까요. 층간소음이나 담배연기 등의 불편함을 호소하거나 무언가를 부탁하기 위해서만 마지못해 얼굴을 마주하죠. 그로 인한 다툼과 상해사건 등이 뉴스에서도 심심찮게 보도되기도 해요. 저희 아파트에 사시는 분 가운데에도 위층의 소음이 거슬린다며 긴 막대기로 천장을 치시는 분, 직접 올라가 문을 두드리며 고함을 지르는 분이 계셔서 가끔 가슴을 졸이곤 한답니다. 이런 현실의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킨 작품이 [그랜드맨션]인 것 같습니다.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은 지 30년 된 그랜드맨션.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우리 주위에서 금방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지만 그들이 간직한 사연 하나하나는 다소 기괴합니다. 202호에 사는 사와무라 히데아키는 종일 집안에서 지내는 터라 위층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거슬리고, 303호에 사는 아가씨 마쓰시마 유카는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느낌에 불안합니다. 206호에 사는 다카다 에이지는 그 동안 몰래 마음속에 품어온 윗층 아가씨 아야카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프고 그 집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에 신경이 곤두섰죠. 203호에 사는 세누마 도미오는 월세 낼 돈이 없던 차에 옆집 할머니가 장롱에 거금을 쌓아두었다는 말을 듣고 양심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105호에 거주하는 할머니 다가 이네코는 보이스 피싱을 당합니다. 103호에 사는 무토 도메코는 이른 아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낯선 노인을 주먹으로 때려 기절시켰고요.

요렇게만 보면 흔하지는 않더라도 한 번쯤 본 적 있고, 들어본 적 있는 사연들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이야기들이 서술트릭의 대가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이라는 걸 기억하셔야 해요. <도착(倒錯) 시리즈> 로 저의 뒤통수를 한없이 얼얼하게 만들었던 오리하라 이치. 한동안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아서 순간 잊고 있었지만 읽다보니 역시 오리하라 이치!-라는 마음이 들더군요. [도착(倒錯)의 론도]를 읽으며 날밤을 새웠던 기억도 나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일부러 한 편씩 야금야금 아껴 읽었습니다. 일곱 편의 에피소드와 에필로그를 한꺼번에 읽기에는 뭔가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문장 한 줄 한 줄에 주목하게 만들고, 속아넘어가는 재미와 그가 만들어놓은 작은 트릭을 풀었을 때의 묘한 쾌감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에요.

사연과는 별개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조금 비뚤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온정적인 관심은 환영하지만 흥미 위주로 남 일에 개입하고 싶어 하는 이웃,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스토커 이웃, 모녀임에도 타인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 서술트릭으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오리하라 이치이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트릭뿐만 아니라 그가 던지는 메시지-고령자 문제, 보이스 피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그랜드맨션 안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주네요. 예전 작품들에 비해 조금 힘이 빠진 듯한 느낌은 있지만 저는 오히려 그 점이 부담없이 읽기 좋았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루어서인지 친밀감마저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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