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맨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6
오리하라 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맨션, 아파트라는 공간은 참 오묘한 곳입니다. 같은 건물에서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임에도 자신만의 공간에서 독자성을 인정받아요. 마음먹기에 따라 누군가와 어울릴 수도, 완벽하게 혼자인 삶을 살 수도 있는 곳. 저는 지금 사는 곳에서 10년 넘게 살아서인지 앞 호수에 사시는 어른들과 인사도 하고 안부도 묻곤 하지만, 그 외 다른 층에는 누가 사는지, 설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쳐도 이 사람이 우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인지 아니면 손님인지 알 수 없는 때가 많습니다. 최근 들어 우리가 이웃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경우는 어떤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아닐까요. 층간소음이나 담배연기 등의 불편함을 호소하거나 무언가를 부탁하기 위해서만 마지못해 얼굴을 마주하죠. 그로 인한 다툼과 상해사건 등이 뉴스에서도 심심찮게 보도되기도 해요. 저희 아파트에 사시는 분 가운데에도 위층의 소음이 거슬린다며 긴 막대기로 천장을 치시는 분, 직접 올라가 문을 두드리며 고함을 지르는 분이 계셔서 가끔 가슴을 졸이곤 한답니다. 이런 현실의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킨 작품이 [그랜드맨션]인 것 같습니다.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은 지 30년 된 그랜드맨션.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우리 주위에서 금방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지만 그들이 간직한 사연 하나하나는 다소 기괴합니다. 202호에 사는 사와무라 히데아키는 종일 집안에서 지내는 터라 위층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거슬리고, 303호에 사는 아가씨 마쓰시마 유카는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느낌에 불안합니다. 206호에 사는 다카다 에이지는 그 동안 몰래 마음속에 품어온 윗층 아가씨 아야카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프고 그 집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에 신경이 곤두섰죠. 203호에 사는 세누마 도미오는 월세 낼 돈이 없던 차에 옆집 할머니가 장롱에 거금을 쌓아두었다는 말을 듣고 양심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105호에 거주하는 할머니 다가 이네코는 보이스 피싱을 당합니다. 103호에 사는 무토 도메코는 이른 아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낯선 노인을 주먹으로 때려 기절시켰고요.

요렇게만 보면 흔하지는 않더라도 한 번쯤 본 적 있고, 들어본 적 있는 사연들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이야기들이 서술트릭의 대가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이라는 걸 기억하셔야 해요. <도착(倒錯) 시리즈> 로 저의 뒤통수를 한없이 얼얼하게 만들었던 오리하라 이치. 한동안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아서 순간 잊고 있었지만 읽다보니 역시 오리하라 이치!-라는 마음이 들더군요. [도착(倒錯)의 론도]를 읽으며 날밤을 새웠던 기억도 나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일부러 한 편씩 야금야금 아껴 읽었습니다. 일곱 편의 에피소드와 에필로그를 한꺼번에 읽기에는 뭔가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문장 한 줄 한 줄에 주목하게 만들고, 속아넘어가는 재미와 그가 만들어놓은 작은 트릭을 풀었을 때의 묘한 쾌감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에요.

사연과는 별개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조금 비뚤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온정적인 관심은 환영하지만 흥미 위주로 남 일에 개입하고 싶어 하는 이웃,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스토커 이웃, 모녀임에도 타인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 서술트릭으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오리하라 이치이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트릭뿐만 아니라 그가 던지는 메시지-고령자 문제, 보이스 피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그랜드맨션 안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주네요. 예전 작품들에 비해 조금 힘이 빠진 듯한 느낌은 있지만 저는 오히려 그 점이 부담없이 읽기 좋았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루어서인지 친밀감마저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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