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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게 (반양장) -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작가 기시미 이치로의 말처럼 산다는 건, 나이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장의 시간이 될 수도, 어떤 이에게는 노쇠의 길을 걷는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거겠죠. 성장과 노쇠는 신체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일 뿐, 내적인 성장은 누구라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기시미 이치로의 견해입니다. [마흔에게]를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이것. 나이를 먹어 신체적으로는 약해졌을지라도 마음만은 풍요로울 수 있다는 것, 인생을 누구보다 잘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를 생산성으로 재단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공헌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뭔가 더 충실히 보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미련은 남지만, 저 또한 지난 시간들로 되돌아갈 수 있다 해도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저는 지금의 제가 좋거든요.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보내온 시간과 함께 축적된 삶의 지혜가 제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의 마음과 양식으로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한 번 생각해볼만 하겠습니다만, 순식간에 지나온 시간들이 아쉽기는 해도 지금의 시간들이 무엇보다 소중해요.
책 속에서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불교학자 스즈키 다이세쓰와 관련된 일화였습니다. 그의 나이 아흔에 신란스님이 지은 [교행신증]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했다고 하는 부분에서 그만 제 눈을 의심했거든요. 아흔이라니요. 그 부분에 밑줄 쫙 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흔이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자리보전을 하는 데 그치는, 어찌보면 삶의 희망이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는 그런 나이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아흔이라는 나이에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을 시작했다니, 마음속으로부터 감탄이 우러나왔습니다. 작가 또한 60이 되어서야 한국어 공부에 입문했다고 해요.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질만능주의, 로 들어선지 오래된 세계입니다. 집을 사고, 차를 사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망하고 남과 비교하며 사는 사회와 개개인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한탄을 불러일으키죠. 돈, 물론 중요합니다. 무척 중요하죠. 하지만 얼마나 소유했는 지와 상관없이 돈과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아요. 이런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중심을 잡고,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그것을 놓치지 않고 산다는 것. 성과와 결과에 관계없이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교토대학의 중세철학 연구실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읽습니다. 라틴어로 쓰인 책인데, 그 내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방대합니다.
“다 읽으려면 이백 년 정도 걸리겠지”
그렇게 말했던 교수님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연구실에서는 그 책을 읽고 있을 겁니다. 정신이 아득해질 듯한 이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것은 눈 앞에 있는 한 행 한 행과 마주하는 시간이고 거기서 얻은 것들입니다.
이 또한 묘한 울림을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여전히 두렵고 무섭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에 위안을 얻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저도 몇 년 후면 마흔이 될 겁니다. 30대인 제가 요즘 ‘마흔’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책들이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정말 잘 살아보고 싶은 욕심도요. 이 책은 ‘마흔’을 제목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세대를 아우르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마흔에는 무엇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런 내용들이 아니라서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감사해하면서, 요즘들어 자꾸만 스산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오늘’이라는 시간을 뜻깊게 보내야겠습니다. 그리고 항상 소망하는 세계일주의 꿈, 언제가 되든 꼭 이뤄보리라 다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