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크라이
헬렌 피츠제럴드 지음, 최설희 옮김 / 황금시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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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기를 잃은 엄마 조애나에 대한 첫인상은 별로였다. 비록 앨리스터가 만나고 4주가 지난 뒤에야 자신이 유부남이라는 것을 밝혔다고 해도 결과는 유부남과의 불륜으로 아이를 낳은 '애인'이니까. 심지어 그녀는 앨리스터의 집에서 그와 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의 침대 위에서까지 사랑을 나누다 알렉산드라와 그들의 딸 클로이에게 적발된다. 그 일로 알렉산드라는 그 다음 날 클로이를 데리고 호주로 떠났고, 지금 앨리스터와 조애나는 양육권 분쟁으로 클로이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길을 나선 참이었다. 남편이 있고 아이 둘을 키우는 내 입장에서 조애나는 당연히 최악의 여자였고, 그들이 알렉산드라로부터 클로이를 다시 데려오려는 시도는 최악의 행동이었다.

 

아직 9주밖에 되지 않은 아들 노아를 데리고 호주로 향하는 여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아이는 끊임없이 울었고, 앨리스터는 아주 우아하게 잠들어 있었으며 비행기 승객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길은 없었다. 노아가 태어난 후 세 시간 이상 연달아 자지 못한 조애나는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고, 좁은 공간에서 아무리 달래도 계속 우는 노아의 울음소리는 스트레스였다. 아이를 조용히 잠재우기 위해 약간의 약을 먹였고 아이는 잠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렌터카로 시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 위에서까지 노아는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잠든 것이 아니라 이미 숨을 거둔 아기. 패닉에 빠진 조애나를 겨우 진정시킨 앨리스터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아이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땅에 묻고, 누군가 아이를 납치했다며 연기를 시작한다. 자연히 앨리스터의 전부인인 알렉산드라에게 수사의 초점이 맞춰지는 가운데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지는 거짓말, 죄책감, 그리고 고개를 쳐드는 의심과 밝혀지는 진실.

 

최악의 여자라는 첫인상으로 시작했지만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조애나에 대한 연민을 거둘 수는 없었다. 같은 엄마로서 아이를 잃은 고통이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마치 현실인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감옥에 갈 것이 두려워 앨리스터의 계획을 수용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애나는 자신이 아이를 죽인 엄마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어진다. 노아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것이었으므로 차라리 죄를 고백하고 벌을 받고 싶었다. 그 와중에 앨리스터의 너무나도 침착한 모습이란. 정치에 적을 두고 있는 그는 이 상황마저도 이용하려 하고, 아이를 잃은 아빠답지 않게 슬프거나 절망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도 위선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전부인인 알렉산드라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밑작업까지 하고 있었으니, 어째서 조애나가 앨리스터에게 빠져들었는지 의문일 뿐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조애나도 금방 깨닫게 되었지만.

 

소설은 아이를 잃은 조애나와 클로이를 지키려는 알렉산드라의 시각으로 진행된다. 아이를 잃은 뒤에도 일상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어보이는 앨리스터와는 달리 무엇이 노아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져보고 죄책감에 빠져드는 조애나와 비록 부족한 엄마지만 딸 클로이를 향한 애정만은 강렬한 알렉산드라를 보면서 '모성'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이를 낳은 후 여성에게 부가되는 그 모든 책임감과 의무와 평가하는 시선들. 그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그녀들은 결국 주도권을 앨리스터에게 넘겼고, 앨리스터는 주도면밀하게 상황을 제어하고 모든 것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조종한다. 오직 자기 자시만을 사랑하는 남자. 아이의 죽음까지 자연스레 엄마에게 떠넘겨버리는 남자. 그래서 그가 맞이한 결말은 어떤 의미로는 매우 통쾌했다고 할까.

 

조애나는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한 '다른 사람의 고통 위에 너의 행복을 세울 수는 없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고 이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책임지고 주도권을 갖기로 한다. 이제는 모든 것을 바로 잡아야 할 때. 당당해진 조애나와 새로운 행복을 찾은 알렉산드라의 모습이 매우 고무적이다. 이 작품은 심리 스릴러이기도 하지만 아기를 잃은 엄마의 고통을 심도있게 그려내면서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이 되기 위한 여성들의 분투를 그린, 안타까우면서도 재미있는 소설이다.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 여정이 더 인상깊은 작품. 읽자마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 여성들의 마음을 되짚어보면서 한 번 더 읽고 싶게 만드는 그런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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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
라파엘 몬테스 지음, 최필원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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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로맨스, 나는 공포]

의대생인 테우. 그는 시체인 게르트루드에게 가장 친밀함을 느낄 정도로 사교성이 떨어지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어느 날 파티에서 만난 아름다운 그녀 클라리시. 영화 시나리오인 <퍼펙트 데이즈>를 집필 중이라는 그녀는 자유롭고 열정적인 영혼의 소유자다. 헤어질 때의 짧은 키스로 이미 그녀에게 빠져들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테우는 그녀의 휴대폰으로 자신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어 번호를 알아낸 후, 클라리시의 행적을 따라다니고 조사원으로 위장하여 그녀의 신상정보를 얻어낸다. 똑똑하고 당찬 클라리시는 이미 테우가 그런 수법을 썼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에게 그저 친구로만 지내자며 선을 긋는다. 잠깐의 말다툼. 그러나 감정이 격해진 테우는 클라리시를 공격하고, 급기야 그녀를 트렁크에 담아 길을 떠난다. 그 후 벌어지는 감금과 폭력의 나날들. 피해자의 입장에서 전개되다가 나중에는 속시원히 해결되는 스릴러가 아닌, 잔혹범죄로 점철되는 낯선 스릴러의 등장이다.

피해자의 입장, 그것도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상당히 읽기 괴로운 작품이다. 술김에 별 뜻 없이 건넨 한마디, 가벼운 키스가 상상도 못한 미래를 가져다 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호감에 대한 거절이 감금과 폭행, 죽음의 공포를 가져다주는 나날을 선사할 줄이야. 무서운 것은 테우는 그것을 정말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 있다.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고 잘 보살펴 주는데 뭐가 문제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데 감히 네가 나를 거절해?!-같은, 마치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밀어붙이기만 할 뿐 상대에 대한 배려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클라리시에 대한 집착과 광기는 또 다른 살인을 불러오지만, 테우는 그 살인에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사랑의 방해물이 하나 사라진 정도로만 여긴다. 그리고 클라리시를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행한 잔인한 형벌. 자신이 의대생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용한 잔혹한 처사에, 아우, 정말 소름이 돋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클라리시가 반격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고분고분하게 테우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척 했지만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찾아온 반격의 기회와 입장이 뒤바뀌게 된 두 사람. 하지만 그 반격이 너무 짧아 마음이 아팠다. 테우가 그녀를 위해 준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일격으로 클라리시는 이성의 끈을 놓고 만다. 과연 이 범죄행각이 언제까지 계속될 지 조마조마한 가운데 드디어 맞이한 결말! 마지막 한 문장 또한 의미심장하게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 동안에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서술되어 어떻게든 긍정적인 결말을 맞이했던 기존의 스릴러들과는 달리,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작품이라 더 무섭고 공포스러웠다. 특히 이런 일이 현실에서도 비일비재하다보니 그 생생함이 남달랐던 것 같다. 정말 이런 사람을 만나면 어쩌지, 내 의도와는 달리 나의 운명이 결정지어진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소름끼쳤던 점은 여성의 입장에서는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이 상황을 이 사이코패스는 꽤 안정적으로, 평온하게 즐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남자주인공을 '괴물'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할 정도다. 사이코 로맨스릴러가 아니라 그냥 사이코 스릴러. 제작이 확정된 영화 속에서는 누가 이 역할을 맡게 될지, 분위기를 어떻게 연출할지 궁금하지만 과연 관람할 수 있을까. 작품에 대한 충격이 너무 커서 영화까지는 못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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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디스커버리 3 : 독일 - 교양만화로 배우는 글로벌 인생 학교 어메이징 디스커버리 3
김재훈 지음, 조성복 감수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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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만화로 배우는 글로벌 인생학교-라는 부제로 출간되어 온 [어메이징 디스커버리]의 독일편이 나왔다. 앞서 출간된 덴마크나 부탄 편도 궁금했지만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것이 많은 독일편 먼저 보고 이 시리즈 전체를 탐독할 지 어떨지를 정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먼저 읽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깊이있고 전체를 통괄하는 방법이 아주 마음에 든다. [먼나라 이웃나라]를 읽을 때와는 또다른 느낌이라고 할까. 특히 독일편의 표지에는 '과거를 극복하고 다 함께 잘 사는 비결이 뭘까?'라는 말풍선이 덧붙여져 있어 눈길을 끈다. 흔히 독일과 일본을 많이 비교하는데 일본에는 없지만 독일에는 있는 그것. 그것을 한 번 찾아보자는 마음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여행의 시작은 요한 덕분이었다. 장미재단 영재학교의 바이올린 신동으로 요한이의 할머니는 유태인이었다. 나치 학살 당시 도움을 주었던 군터라는 사람을 할머니 대신 만나기 위해 장미그룹 회장에게 독일에 가고 싶다고 느닷없이(?) 제안한 것이다. 그런 요한이를 중심으로 홍설록, 강가영, 장화순, 백범영, 신수길, 장석대, 장장미가 독일 여행길에 오른다.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오늘날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위치에 서 있는 독일이, 과거의 수치를 어떻게 딛고 발전해왔고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는가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만큼 어떤 하나의 이론이나 의견에 치중하지 않고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게르만족의 대이동부터 베를린 장벽의 붕괴, 필하모니,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 나치, 그리고 참회의 자세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는데 역시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를 꼽으라면 빌리 브란트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서베를린 시장이었다가 서독의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부터 동독을 대결상대가 아닌 동반관계로 대했고, 동구권 나라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속적인 긴장 완화를 통해 평화를 추구하면서 동쪽을 향해 꾸준히 우호적인 입장을 표명했으며 그런 그의 '동방정책'은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방문했을 때 바르샤바 광장에 세워진 유대인 게토 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1970년 12월 겨울비가 내리던 날이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난데없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린 그의 모습은 전 세계 사람들이 독일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사건이었다. 항상 발뺌하거나 보상을 다 했다고 배짱인 어디의 무슨 나라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진지함과 유머를 오가며 전개되는 내용에 푹 빠져 읽었다. 특히 과거와 현재의 모습 모두를 다루고 있어 전혀 지루하지 않고 현실적인 모습들을 조망하고 있다는 점이 추천할만하다. 만화로 그려져 있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이미 출간된 스웨덴과 부탄에 대해서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을지, 앞으로는 어떤 나라들이 소개될 지 무척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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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막이 내릴 때 (저자 사인 인쇄본)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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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멋진 작품]

 

도쿄의 한 아파트에서 목 졸려 죽은 변사체로 발견된 중년 여인. 비슷한 시기 그 아파트 근처에서는 한 남자가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된다. 일견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사건처럼 보였으나 가가의 뛰어난 추리력으로 경찰은 두 사건이 어딘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수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렇다 할 단서가 없는 상황. 이 와중에 중년 여인의 시체가 발견된 아파트 달력에 적혀 있던 필체가 어머니 유품에 들어있던 메모와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된 가가는, 이 사건이 어렸을 적 집을 나간 어머니와 연관되었음을 직감한다. 어머니와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알려진 남자는 누구인가. 그가 어머니의 죽음에도 개입한 것은 아닌가. 달력에 수수께끼처럼 쓰여있는 다리들의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가 교이치로가 왜 신참자가 되어 니혼바시 일대를 맴돌았는지, <가가 형사 시리즈> 최대의 수수께끼이자 마지막 이야기가 마침내 베일을 벗는다.

 

1986년 시리즈의 첫 작품을 시작으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작가 인생 전반에 걸쳐 집필해 온 <가가 형사 시리즈>의 10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이야기 [기도의 막이 내릴 때]가 드디어 출간되었다. 정말 마지막인 것처럼, 그 제목도 작별을 의미하는 것 같아 작품을 읽기 전부터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하다. <가가 형사 시리즈>의 구판부터 최근 출간된 개정판까지 전부 소장하고 있지만, 정작 읽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처럼 친근함에,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작품에서 그를 만날 수 없다는 인사에 아쉬움까지 느껴진다. 뛰어난 능력으로 냉철하게 사건을 수사하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가슴을 가진 형사 가가 교이치로. 다른 시리즈를 건너 뛰고 읽어도 스토리 자체의 매력이 넘치지만 가가 형사와 그의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 [붉은 손가락]을 읽은 후 접한다면 한층 작품 속으로 빠져들기 쉽지 않을까 생각한다. [붉은 손가락]에서 등장한 고독사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기도의 막이 내릴 때]에서는 중점적으로 다루어져, 마치 마지막이기 때문에 더욱, 가가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을 어떤 감정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문제는 한 여성의 등장이었다. 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였음에도 돈을 모두 빼돌려 도망친 여자. 그 여자가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갑자기 '발견'되었다. 그 여성이 친구의 어머니인 것 같다고 추측한 오시타니 미치코. 친구가 연출가로 이름을 날리는 도쿄로 향해 어머니인 것 같은 인물이 경찰과 약간의 문제를 일으킨 것 같다고 알려준다. 전혀 상관없다고 이야기하는 친구 아사이 히로미. 그녀는 어머니가 가출한 후 빚독촉에 시달린 아버지가 투신자살한 후 시설에 맡겨져 힘든 시간을 보내왔다. 그리고 오시타니 미치코는 아사이 히로미와 헤어진 직후 실종, 살해당한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묘한 어조는 아사이 히로미에게 어떤 사연이 있음을, 그녀가 직접 오시타니 미치코를 죽였거나 혹은 그녀의 죽음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대체 어떤 사연이 숨어있는 것인가, 긴장된 마음으로 페이지를 펼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가슴아픈 전개로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을 남긴다.

 

가가 형사가 등장해 사건 추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그가 전면에 나선다는 느낌이 적다. 그에 비해 사촌동생이자 형사인 마쓰미야의 시선에서 주로 전개되기 때문인지 오히려 그가 가가 형사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어머니와 인연을 맺은 와타베 슌이치. 두 사람 모두 자식에 대한 한없는 사랑으로 자신들의 나머지 시간을 희생했다. 양쪽 모두 자식들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라 그 마음만은 짐작이 가고도 남지만, 결말 부분에서 직접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봐야했던 아사이 히로미의 심정 또한 안타까웠다. 모든 어려움을 딛고 성공을 거머쥔 여성 연출가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가가의 가족사,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자신을 숨긴 채 조용히 숨죽이며 살아온 부모들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아직 읽지 못한 <가가 형사 시리즈>가 많이 남아있지만 부디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취소하고 새로운 작품이 출간되길 기대한다. 여기까지 1부, 어머니의 죽음의 진상을 알게 된 후가 2부라는 명목으로. 가가도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면서 더 멋진 형사로 거듭날 수 있지 않겠는가. 계단을 밟아가듯 차근차근 전개되는 사건 전개에 심금을 울리는 정서까지. 마지막이 아니라면 좋겠지만, 마지막이라면, 그 대미를 장식하는 멋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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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미술관 - 그림 속 숨어있는 이야기, 2020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문하연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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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표지에서부터 발견하니 반갑다. 미국의 소설가 트레이시 슈발리에에 의해 쓰여진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이 그림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나도 트레이시 슈발리에에 의해 이 그림에 대해 처음 알았는데 그 후 그림이 내뿜는 매력에 이끌려 거리에서 파는 모조 그림액자를 구입해 간직하고 있다. 이 그림의 화가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다른 책들에서는 베르메르라고도 불리는,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태어나 델프트에서 그림을 그리고 델프트에서 생을 마감한 델프트의 화가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그럽게 그림들을 접하게 되었고 43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36점 정도의 그림을 남겼다. 22년 간 겨우 40점이 안되는 그림을 그렸으니 그리 많은 수도 아니고, 서민을 대상으로 한 듯 그림의 크기도 대부분 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전에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으나 사후 일상 속 평범한 이야기를 들여다보려했던 19세기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에 의해 재조명되었고 이를 계기로 과거에서 불려왔다. 저자에 의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페르메이르의 <델프트의 풍경>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여겼으며 그 작품에 대해 '나도 이렇게 글을 써야 했는데..'라고 했다고 한다.

 

[다락방 미술관]을 읽으면서 내가 어째서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지 깨닫게 되었다. 그림 속에도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평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그림 안에 숨어 있는 입체적인 세계. 비밀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 그림 안에 숨겨진 이야기들에 본능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모델이 특정인물이 아니라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처럼 그려지던 트로니-고유한 의상을 입은 특별한 인물 유형을 대표하는 가상인물로 가슴 높이의 초상화를 말한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그림에 대한 환상을 버릴 수가 없다. 소설과 영화의 영향이 큰 것이라 생각하지만 반쯤 등을 돌린 채 다소 몽환적인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소녀를 그저 가상인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낭만이 없는 것이다, 낭만이! 이 책들에 담긴 그림들과 이야기들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사실과 허구 그 어디쯤에서 붕 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 얼마나 멋진 기분인지!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와 렘브란트 판 레인, 피카소, 마르크 샤갈 등의 이름도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이 책에서는 유독 여성 화가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타시에게 겁탈당한 이후 절망과 고통과 분노를 그림에 모두 쏟아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에두아르 마네의 뮤즈이자 제자이고 연인이었지만 이미 결혼한 마네와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 동생인 외젠 마네와 결혼한 탓에 실력보다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한 베르트 모리조, 여성이 주체적으로 '보는 존재'임을 각인시킨 <오페라 극장에서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의 화가 메리 카사트, 남성을 누드 모델로 세운 최초의 여성 화가인 수잔 발라동, 서양 미술사 통틀어 최초로 누드 자화상을 그린 파울라 모더존-베커,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불운한 삶을 살았던 나혜석, '눈물겨운 인생, 그래도 만세'의 프리다 칼로, 재능보다 로댕의 연인으로 알려진 카미유 클로델까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 화가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던 책으로, 여성으로서 화가로서 인생을 걸어온 그녀들의 이야기에 저절로 깊이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고 쉽게 쓰여져 있다. 이야기로 구성된 그림들이니만큼 수업 자료로 쓴다는 말도 들었다. 아이에게 명화와 클래식 분야에는 눈을 뜨게 해주고 싶은데 이런 일화들을 먼저 접하게 해주면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각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세계적인 갤러리가 소개되어 있어 직접 그림을 보러 가고 싶다는 욕구를 부채질한다. 언젠가 한 번 가족들과 '갤러리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는 꿈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는 책. 그 2탄도 출간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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