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의 보물 고대 그리스 - 전 세계의 박물관 소장품에서 선정한 유물로 읽는 문명 이야기 손바닥 박물관 2
데이비드 마이클 스미스 지음, 김지선 옮김 / 성안북스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801년 7월, 남자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한 무리가 아테나 여신을 모신 파르테논 신전의 남쪽 부분으로부터 부조 메토프(도리아 양식에서 트리글리프 두 개 사이의 벽면)를 떼어내기 시작했다. 이 메토프는 신화에 나오는 인간인 라피테스족과 수인인 켄타우로스족 사이의 전쟁을 묘사한 도리아식 프리즈의 일부였는데, 남자 여섯 명과 그리스인 보조들을 사용해 이 일을 맡긴 사람은 토머스 부르스라는 인물이었다. 1804년 1월 경에는 아테나 파르테논 신전과 아테나 니케 신전, 에레크 테이온 신전, 그 성지로 들어가는 기념비적 관문인 플로필라이아의 부분들이 제거되어 반출되었는데, 이는 현대 유럽 문화유산에서 가장 감정을 자극하며 정치적으로도 뜨거운 쟁점이었다고 여겨진다.

 

고대 그리스와 역사, 그리고 그 문화유산은 이보다 훨씬 전, 2000년 전부터 학자들과 공동품 수집가들에게 큰 관심대상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그리스의 '과거'는 때로는 숭배되거나 때로는 매도당하면서 거의 항구적 재창조와 변용의 상태로 존재해왔다고 한다. 이 책은 전 세계 박물관에 소장된, 선사시대 가장 초기에서 헬레니즘 기 말까지의 총 200점에 이르는 유물들을 소개한다. 연표에 따라 <구석기 시대의 여명에서 초기 청동기 말까지>, <예게해의 중기와 후기 청동기>, <궁전기 후 청동기 및 초기 철기 시대>, <고졸기와 고전기>, <헬레니즘기> 의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그 안에서는 사회와 가정, 예술과 개인적 꾸밈, 정치학과 교전, 장례식과 의례라는 별도의 주제가 펼쳐진다. 여기에 그리스 세계에서 지난 20만 년에 걸쳐 흥하고 쇠했던 다양한 문화들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해주는, 아주 매력적인 책이다.

 

1960년 9월 북부 그리스의 페트랄로나 동굴에서 발견된, 15만 년 전에서 35만 년 전 사이에 사망한 하이델베르크인 성인 남성으로 추정된 두개골의 사진을 시작으로 그리스의 이야기 문이 열린다. 양면 손도끼와 그릇, 도끼날, 짐승 모양 보석함 등의 다양한 물건들과 이야기,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섬세해지고 구체적인 모습을 띠는 유물들이 등장하여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를 선보인다. 유물들의 특징과 여기에 얽힌 이야기, 시대변화와 그 구조 등 여러 각도에서 진행되는 설명들을 들을 수 있다.

 

그리스에 대해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여행지로서의 이야기만 들어왔지, 이렇게 자세히 그리스 자체의 유물을 다루는 책을 읽어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책의 뒷 날개를 보니 시리즈로 기획된 것 같은데 그 중 [고대 이집트] 책이 흥미롭게 보여 구매예정! 책 한 권으로 박물관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 들어 만족스럽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이 남긴 증오
앤지 토머스 지음, 공민희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흑인 소녀 스타의 가족은, 총과 마약이 낯설지 않은 동네인 소위 우범지대에 산다. 아이들이 다른 삶을 살길 원하는 부모님은 스타와 그녀의 오빠, 남동생을 백인들이 다니는 학교로 진학시키고, 스타는 집 근처의 자신과 학교에서의 자신을 분리시켜 낮에는 부유한 친구들이 다니는 학교의 모범생으로, 밤에는 그녀가 살고 있는 가난한 동네의 주민으로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느 날 파티에 참가했다가 어린시절 친구 칼릴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도중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그가 사망한다. 반항도 무장도 하지 않은 그들에게 그저 흑인이라는 이유로 총격을 행한 경찰. 친구의 억울한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수사는 점차 가해자인 경찰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스타는 목격자로서 대중 앞에 나설 것인지, 이대로 침묵할 것인지 갈등하게 된다. 두껍고 냉철한 공권력에 맞서 과연 온 세상에 진실을 전달할 수 있을까. 소중한 가족과의 일상을 지키는 일과 진실을 말하는 용기 사이에서 스타는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전부 다 제대로 해도 가끔 상황이 안 좋은 경우가 있죠.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하고 있는 걸 멈추면 안 돼요.

p159

[당신이 남긴 증오]라는 이 책의 제목은 인종차별을 노래한 힙합 씬의 전설 투팍의 말에서 따왔다. 원서 제목인 ‘The Hate U Give’의 머리글자를 따면 ‘THUG’인데, 투팍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아 내몰린 사람들을 가리켜 ‘THUG LIFE(폭력배의 삶)’이라고 칭했다. 불법적인 일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흑인, 소수집단, 가난한 사람들 등의 하층민의 삶을 가리킨 것이며, 사회적 편견과 증오가 그들을 폭력배 같은 삶으로 이끈다는 의미다. 스타는 이 주제에 대해 아버지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이 가야 하는 길, 갈 수밖에 없는 길에 대해 생각한다. 가만히 있지 말고 행동해야 한다고 조언을 해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스타의 아버지. 그녀로 인해 위협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릴의 죽음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스타의 등을 두드려준다. 그녀의 아버지는 다소 과격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고 공동체의 삶을 생각하는 인물. 그리고 엄마는 소신있고 강한 여인으로 우범지대에 사는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바탕으로 헌신한다. 그런 그들의 밑에서 자란 스타였으니 왜곡된 뉴스 앞에서 눈 돌리는 일은 힘들지 않았을까.

 

책에서는 스타의 친구 헤일리를 통해 인종차별적인 발언과 행동이 얼마나 소소하게, 얼마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보여준다. 중국인 친구 마야에게는 추수감사절에 고양이를 먹었냐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스타의 정체성을 부정하며 칼릴은 마약상이었으니 죽을 수밖에 없는 팔자라는 막말을 퍼붓기도 한다. 하지만 설사 칼릴이 마약상이라고 해도 부당하게 목숨을 빼앗긴 일에 변명이 될 수 있을까. 칼릴과 스타는 경찰에게 그 어떤 위협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 과속하지 않았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찰은 그들을 붙잡았고, 욕설을 했다고 매도했으며, 칼릴이 들고 있던 머리빗을 권총이라 오인해 그를 '살해'했음에도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호소한다. 이런 일들은 책 안에서만 벌어지고 있지 않다. 헤일리같은 사람은 현실에도 버젓이 존재하고, 심지어 무장하지 않았음에도 경찰에게 살해당하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들이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진실.

 

소설은 독자가 원하는 결말을 보여주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만약 그런 결말이었다면, 소설임에도 너무나 소설스러워서 더 현실성을 잃었을지도. 오히려 그런 결말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해서 싸워나가야 하는 의지를 다지게 하는 작품이랄까. 앤지 토머스 역시 마약 판매와 총기 사건을 보면서 자랐고, 오스카 그랜트의 억울한 죽음 이후 이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오스카는 2009년 1월 1일 22세의 흑인 청년으로 경찰에게 과잉진압을 당하다 총을 맞고 사망했다.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격노하며 미국 전역에 시위로까지 번졌다. 특히 비무장상태로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았음에도, 시민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이 오히려 가해자로 돌변한 이 사건은 수많은 시민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고 청소년들의 인권 의식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다.

 

한 소녀가 세상에게 던지는 물음과 행동. 절대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고 침묵하지도 않을 것이라 약속하며 결의를 다지는 스타의 모습을 통해 어느 쪽이 옳은 방향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카오프렌즈, 그건 사랑한단 뜻이야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흔글·조성용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기를]

아마도 카카오프렌즈 시리즈의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라이언, 어피치, 튜브, 무지, 네오, 프로도. 각각 등장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내던 그들이 이제는 하나로 뭉쳐 안녕을 고하기 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들이 담겨 있다. 사실 이런 에세이 종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잘 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카카오프렌즈 시리즈는 귀여워서 자꾸 찾아보게 된다. 마음을 울리는 글귀들을 발견할 때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캐릭터들의 가장 큰 매력은 그런 '귀여움'이 아닐까.

나이를 먹을수록 말 한마디도 허투루 내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농담이라고 생각해 건넨 한 마디에 타인을 상처입힐 때도 있고 내가 상처입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농담임을 내세우며 은근슬쩍 아픈 마음을 건드리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도 조금쯤은 갖게 되었다고 할까. 시간이 흐를수록 더 어려워지는 인간관계. 하지만 원래 그랬어야 하는 게 아닐까. 말은 내 입에서 나가는 순간부터 내 것이 아니게 되므로.

못된 버릇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언젠가부터 상처받은 마음을 숨긴 채 상처를 준 사람을 아예 차단하게 되어버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리라 그렇게 결심했다. 그 때는 나중에도 후회하지 않을 결정이라 되뇌었었는데,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내 상처받은 마음을 솔직하게 내보였다면 그 사람과 지금까지 계속 인연을 맺고 있었을까. 어쩌면 나는 말해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생각에 제풀에 먼저 관계를 포기한 게 아니었을까. 이제와서 다시 생각한들 무엇하리. 지금 함께 하는 사람들, 앞으로 함께 하게 될 사람들에 대해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요고요고, 내가 옆지기와 다툰 뒤면 항상 하는 말이라 특히 공감된다! 옆지기와 다툰 뒤에는 내 나름대로 생각도 좀 하고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해서 한동안 그에게 부탁했었다. 나를 그냥 내버려둬달라고. 결혼 초기에는 그래도 옆구리를 쿡쿡 찌르던 옆지기는 이제는 그런 내 말에 너무나 충실하게 따라서 정말 나를 내버려두는데, 그것이 또 그렇게 섭섭한 거다! 그래서 아무리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나를 너무 내버려두는 거 아니냐 했더니, 자기도 옆구리 쿡쿡 찌르는 거 한 두 번이지, 어차피 받아주지도 않지 않냐며 오히려 나를 공격! 음. 그 말도 맞긴 하지. 그래도 그럴 때 옆구리를 좀 찔러주면 화가 풀리는 속도가 좀 빨라지는데, 저 문구처럼 모르는 척 다가와주시기를.

이것이 내가 새벽 독서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아이들을 재우고 다시 일어날 때는 너무 힘들기도 하지만, 그대로 다시 아침을 맞기에는 나에게 활력이 될 무언가가 부족한 느낌.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다보면 내게 쌓여있던 독소같은 것들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날 행복하게 만드는, 아주 오래된 습관. 조금 고단해도 오늘은 무슨 책을 읽을까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난다.

 

얼마 되지 않는 페이지를 조금은 천천히 넘겨본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짧고 그냥 넘겨버릴 수 있는 문구일 수도 있지만, 읽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느냐에 따라 강렬한 이미지를 남길 수 있는 책. 아직은 조금 서늘함은 머금은 공기, 나의 소중한 새벽시간을 카카오프렌즈 친구들과 보낼 수 있어 따뜻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새, 바람 웅진 모두의 그림책 28
남윤잎 지음 / 웅진주니어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림책을 읽을 때는 많은 말이 필요없는 것 같아요.

첫째와 그림책을 볼 때도, 아이는 아직 글자를 모르니 글보다 그림을 더 많이 들여다봅니다.

그림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죠.

그러니 '그림책'일 겁니다.

 

이번에 만난 그림책은 특히, 더욱, 말이 필요없습니다.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어째서인지 마음 한 구석이 울렁거려와요.

바람이 붑니다.

계절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요.

바람은 여기저기 다니며 계절과 향기를 실어나르고

바람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느끼기도 해요.

공기는 흩어지고

계절은 그렇게 우리에게 발자국을 남깁니다.

 

이 책은 리뷰쓰기가 참 힘든 책이에요.

좋은 의미로, 쓸 말이 없습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소소한 일상

그 안에 존재하는 작지만 분명한 행복들.

 

이렇게 또 오늘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녹슨 도르래 -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겨울과 추위는 더 깊어지겠지만 앞으로의 해는 더 길어질 것이라는 희망]

 

때는 11월, 미스터리 도서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살인곰 서점’의 점장 도야마 야스유키 덕분에 서점 일을 도우며 탐정 일을 계속하고 있는 하무라 아키라는 전에 없던 생활고를 겪는 중이다. 살인곰 서점이 일주일에 사흘만 열게 되면서 수입이 대폭 줄어든 탓인데, -미스터리 서점에 탐정사무소가 있으면 재미있지 않을까요?-라는 점장의 권유로 차린 ‘백곰 탐정사’에도 좀처럼 의뢰인이 찾아오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 살고 있는 '스타인벡 장' 에서도 나와 새로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 그런 그녀에게 일흔네 살 할머니 이사와 우메코의 뒷조사를 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거절하려 했지만 일당을 올려준다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 덜컥 의뢰를 받아들인 하무라. 분명 손쉬운 의뢰였음이 틀림없는데, 그런데, 미행을 하던 중 싸우는 소리가 들렸고, 위를 올려다본 순간, 그 할머니가 하무라 아키라의 머리 위로 떨어져 그녀도 부상을 입고 만다. 이사와 우메코와 함께 떨어진 이는 그녀의 고교 동창인 아오누마 미쓰에.

 

의식을 잃은 아오누마 미쓰에와 함께 병원에 간 하무라는 미쓰에의 손자 히로토와 만나게 된다. 그는 올해 3월 봄에 아버지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해 심한 부상을 입었고, 아버지는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으로 인해 이들 할머니, 손자와 함께 살게 된 하무라. 집세가 없는 대신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번거로운 옵션이 붙어 있었지만, 하무라는 함께 웃고 식사하는 풍경 속에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따스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따스함도 잠시. 하무라와 히로토가 묵는 별채에서 심한 화재가 일어나고 이 사고로 결국 히로토가 세상을 떠났다. 교통사고를 당해 아버지를 잃었고 자신은 심한 부상을 입어 이제 재활에 힘쓰고 있는데, 또다시 찾아온 비극적인 화마. 한 사람의 인생에 이런 비극이 연달아 일어나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그의 죽음에 의구심을 느낀 하무라는 결국 남몰래 조사에 착수하고,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오늘도 온몸으로 구르고 있다.

 

일본 코지 미스터리의 여왕 와카타케 나나미가 탄생시킨 불굴의 여성 탐정 하무라 아키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이라는 자조 섞인 별명답게 맡는 사건마다 곱게 끝나는 법이 없는 그녀는 프라이팬이나 맥주병으로 얻어맞는 것쯤은 일상다반사.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심지어는 가족에게 살해당할 뻔도 했으니 이 정도면 세상의 불행들이 유난히 그녀를 따라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녹슨 도르래]는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중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는 장편소설로 일본에서는 2018년 연말 미스터리 랭킹을 석권, 50만 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 오랜만에 느낀 마음의 안식처를 잃고 다친 다리를 끌며 진범을 밝히기 위해 분투하는 그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 하무라 아키라. 그녀의 불운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미쓰에나 히로토와 함께 보낸 며칠간은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때로 인생에 찾아오는 멋진 순간......누군가와 무언가를 공유했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그들은 내게 주었다. 그것이야말로 현실이고, 현재의 내 쪽이 환상처럼 생각되었다.

p425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이 다 났다. 지금은 봄인데도 불구하고 하무라 아키라가 온몸으로 맞고 있을 11월의 그 바람이 내 가슴 속에도 불어닥친다. 어째서 제목이 '녹슨 도르래'인지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해보았지만 적당한 답을 찾을 수 없었는데, 히로토가 갔던 유원지의 관람차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회전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사람들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히로토도 그렇고, 그의 부모도 그렇고 어째서 타인에 의해 인생이 좌지우지 되어야 하는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 원하는 것은 꼭 가져야 하고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도 불사하는 더러운 이기심과 욕망을 마주하고나니, 마치 온몸에 끈적한 것이 달라붙는 것처럼 불쾌하다.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도 하무라는 살아내야 한다.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런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주는 이가 분명 존재할 테니까. 가령 도야마의 욕조라든가.

 

이 작품 전의 단편집인 [조용한 무더위]도 좋았지만, [녹슨 도르래]에서는 하무라의 심리를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어 또다른 매력을 느꼈다. 불운의 여신이지만 부디 그녀에게 언젠가 진정한 구원이 찾아오기를.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의 다른 이야기들도 어서 국내에 소개되기를 기대해본다. 책 마지막에는 부록 형식으로 '도야마 점장의 미스터리 소개'도 실려 있으니 부디 놓치지 마시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