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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만들 수 있습니까
히사이시 조 지음, 이선희 옮김 / 이레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20대 중반을 넘어서는 지금 그리 길지 않은 삶을 뒤돌아보면, 몇 안 되지만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 때가 있었던 것 같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일본으로 공부하러 떠났을 때, 학교를 졸업하고 시험을 준비할 때, 합격하고 이제 앞으로의 인생을 준비하는 현재까지.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나는 항상 벼랑 끝에 서 있었던 듯하다. 하나의 목표의 끝에는 언제나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벼랑이 존재했다. 지금까지 헤쳐온 벼랑은 아슬아슬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 고마운 경험들이었다. 벼랑이 끝났을 때 마치 내 삶이 끝난 것 같다고 느낀 적도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목표로 한 것의 결과가 어떻든 삶은 어쨌든 계속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한 가지 일이 끝났을 때, 마치 자신의 인생이 끝난 것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 순간이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시간을 소비한다거나, 중요한 일에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을 때 그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하지만 인생의 프로라면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가게 마련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 중 한 명이 -히사이시 조-, 바로 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히사이시 조. 일본에, 혹은 일본 애니메이션, 일본 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최고의 음악가라고 꼽을 만한 사람이다. 그가 참여한 히트작만 해도 우리나라의 <웰컴투 동막골>, <태왕사신기>를 비롯해,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작업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모두 어마어마한 작품들이다. 그가 펴낸 책 [감동을 만들 수 있습니까]를 읽기 전에 나는 그저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여타의 음악가들과 다름 없을 거라 판단했다. 예술계통은 다른 일들과는 달리 노력이나 공부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고, 99% 정도의 타고난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생각들이 결국 예술가들에 대한 편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1. 프로로서의 히사이시 조.
프로란 계속해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프로로서 일류이냐 이류이냐의 차이는 자신의 역량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19
책 전반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는 프로다'라는 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의 작업에서 많은 히트작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나는 아무 근거없이 그저 그 두 사람은 신뢰 관계로 묶여있고, 작업도 편안하게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음악이 좋지 않으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자신에게 의뢰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절박한 심정으로 진검승부를 한다는 글을 읽으면서 역시 프로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 두 사람에게 가지고 있던 생각은 안일했다.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프로'를 생각하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걷는다면 나는 아마추어로 끝날 수도 있겠다는 가르침을 얻었다. 진정한 프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매번 자신을 극한으로 몰고 가서 가지고 있는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것. 그것이 바로 '프로'의 의미이다.
2. 음악가로서의 히사이시 조.
인간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아수라장을 경험하고,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옴으로써 한 단계 성장한다. 높은 수준의 아수라장을 경험하면 그만큼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p137
음악가로서의 그는,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감성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중시한다. '창조적인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성이다'(p29)라고 말하며 중요한 순간에도 이성보다는 직감을 믿어 성공하는 사례도 꽤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음악가로서의 그의 모습에는 화려한 성향보다는 인간적인 경향이 더 짙게 나타난다. 작곡 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와 지휘의 영역에까지 도전하는 그도 공연 전에는 긴장을 하고, 자신의 곡이 감독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염려하며 가슴 떨려한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작곡법과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있는 그를 보면, 음악가로서 아직도 그의 재능은 모두 보여지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음악을 들려줄지 무척 기대가 된다.
책을 넘기다보면 수많은 그의 모습이 등장한다. 인간적인 히사이시 조, 예술가로서의 히사이시 조, 비평가로서의 히사이시 조. 막연히 좋은 음악을 만든다는 사람의 이미지에서 이제 그는 진정한 프로와 진정한 음악가라는 이미지로 바뀌었다.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 존재한다'며 음악가라는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는 그. 비록 일본인이지만 일본음악에만 빠져있지 않고, 아시아에서 활동하면서 각국 음악의 장점과 단점을 볼 줄 아는 혜안도 가졌다. 음악에 대한 사랑을 잔잔히 느낄 수 있는 이 책을 통해 그를 자세히 알게 된 것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앞으로도 그의 행보를 지켜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