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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의 자화상
제프리 아처 지음, 이선혜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반 고흐는 고갱과의 말다툼 끝에 면도칼로 왼쪽 귀를 잘랐고, 이 사건 뒤에 두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그가 오른쪽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것으로 그려졌는데, 미술사가들은 고흐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화상을 그렸을 것이라 판단했다.( 진실은 그만이 알고 있다.) 반 고흐와 그의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한 장의 그림을 보면 누구나 "아!그 사람!"이라는 말을 내뱉지 않을까. 한 쪽 귀에 붕대를 감고 아무 표정없는 얼굴로 이 쪽을 응시하는 한 사람. 나 또한 미술 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그림을 보고 감상하는 것을 즐기게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술과 관련된 책에 눈길이 간다. 특히나 고흐의 그림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요즈음, 그의 자화상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그린 책은 아무래도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다.
한 저택에서 고흐의 자화상을 팔기 위해 고심하고 있던 영국의 명문가 집안의 빅토리아 웬트워스가 살해당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9.11 테러가 일어나던 날, 안나 페트레스쿠는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그의 상사인 브라이스 펜스턴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고흐의 자화상을 손에 넣는 것을 막기 위해 몰래 런던으로 움직인다. 한편 FBI는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살인사건에 브라이스 펜스턴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안나와 그의 사이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FBI의 감시와 브라이스 펜스턴이 고용한 암살범으로부터의 추격. 똑똑하고 용기있는 그녀의 숨막히는 여행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우리를 흥분시킨다.
책은 날짜순으로 되어있다. 9월 10일로 시작되는 도입부. 아무 생각없이 책을 펼쳐들고 읽다가 순간 9.11 테러와 연관된 것임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처음에는 어째서 아직도 민감한 주제인 9.11테러를 묘사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의외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 해고와 동시에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된 안나가 자신이 죽은 것처럼 위장하여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TV에서 9.11테러를 방송하던 당시, 나는 영화가 방영되는 줄 알았더랬다. 비행기가 건물에 충돌하고, 연기가 나고, 많은 사람들이 높은 건물에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뛰어내리던 장면. 책을 읽으면서 또 다시 마음이 무척 아팠지만, 인공적으로 다른 사건을 작가가 창조해내는 것보다 9.11테러를 사용함으로써 소설은 현실감과 생동감, 엄청난 긴장감을 갖게 된다.
작품은 전 세계를 넘나들면서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킨다. 처음에는 과연 이 사람들이 모두 작품에 필요한 사람들인지 의심스럽지만, 그 등장인물들이 끝에 가서는 모두 하나의 접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엄청난 놀라움과 희열을 맛보게 된다. 게다가 섬세한 묘사와 탄탄한 구성은 모두 한 편의 영화를 상상하게 했다. 책 중간에 FBI의 잭이 삼성의 휴대폰을 꺼내드는 부분이 있는데, 이렇듯 작가는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매우 꼼꼼하고 세밀하게 써냈고, 이 점이 소설을 더욱 재미있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고흐의 자화상을 둘러싼 미스터리라고 해서 여타의 소설들처럼 혹시나 어설픈 진행을 보이면 어쩌나 조금 걱정했지만, 이 작품은 그런 걱정을 말끔히 씻어준다.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과 그로 인한 파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있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안나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적이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은연중에 말해 준다. 최고의 이야기꾼이라 칭송받는 제프리 아처. 책 표지 뒤에 있는 뉴욕타임스의 -고양이가 쥐를 놀리듯 독자를 가지고 논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하룻밤에 다 읽어버린 소설. 하루빨리 제프리 아처의 다른 작품들도 만나고 싶다.
모든 것의 가격을 안다고 해서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