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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기린
가노 도모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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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아주 시시한 이야기.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이야기예요...십 대 때 산다는 게 아주 힘들었어요. 매일 숨이 턱턱 막히고, 살아 있다는 데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할 수 없고...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그 시절은 새하얀 공백이에요. 어떤 친구가 있었고, 무슨 꿈을 꿨고, 뭘 낙으로 삼아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냈는지 전혀 생각이 안 나지 뭐예요. 꼭 스티로폼처럼 하얗고 가볍고 버석버석했던 거예요, 그 무렵의 전.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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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노 선생님이 이 말을 노마 아저씨에게 하는 순간, 저의 십 대를 대신 이야기하는 줄 알았습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에요. 전 '아주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도 숨이 턱턱 막힌 적도 없었으니까요. 적어도 제 자존심상 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랍니다. 다만. 그냥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너울너울 흘러가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누군가는 가장 빛나는 십 대를 정말 재미있고 뜻깊게 보냈다고 이야기하던데, 저는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손톱만큼도 들지 않을 정도로 그리 좋은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침에 일어나 학교 가고 공부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평범한 일상에 부모님의 이혼다툼. 그 안에서 내 꿈은 뭐였는지, 그 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냈었는지 저조차도 새삼스레 궁금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진노 선생님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역시 저는 보건실에 갈 수밖에 없었던 거에요. 그 선생님과 나는 닮았으니까.
모르는 척 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나를 둘러싼 투명한 유리벽이 있다는 걸. 그 유리벽은 저에게만 있었던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남학생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틀림없이. 여학생들이라면 그래도 한 번쯤은 유리벽을 가진 경험이 있지 않을까요. 진짜 자신은 유리벽 안에, 유리벽 바깥에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마음. 조금이라도 진짜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진정한 상대를 찾아내고 싶은 바람으로 꾸며진 자신이 있을 뿐이었던 거에요. 저에게는 그 바람을 내보일 수 있는 장소가 보건실이었던 거고, 큰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있는 진노 선생님 앞이었던 거죠.
제가 죽은 뒤로 이렇게 많은 일이 생길 줄 몰랐어요. 더구나 노마 아저씨가 나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있을 줄이야. 나오코가 그렇게 상처받고 깊은 충격을 받을 줄도 몰랐어요. 조금 아쉬운 건 담임 선생님인 오바타 선생님께 좀 더 마음을 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에요. 뭐, 우리 나이에 선생님들이란 잔소리쟁이에 진심으로 우리 생각을 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 선생님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테지만 오바타 선생님의 진심어린 걱정을 좀 더 일찍 알아챌 수 있었다면 저도 이런 지경까지 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갈라진 길에서 유리 기린처럼 고민하고 선택한 건 내 자신이니 이제와서 후회해도 소용없겠지만요.
그래요. 제가 지은 <유리 기린>은 제 자신을 생각하며 쓴 거에요. 주위 친구들의 선망어린 시선, 나는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대책없는 믿음. 하지만 여러분이 생각하신 그대로 내 안은 비뚤어져 있었어요. 오만하고 변덕스럽고 유리 기린만큼이나 부서지기 쉬운 자신. 그래서 나와 같은 사람을 알아보고 그런 사람들에게 빠져들기도 했죠. 진노 선생님이나 구보타 유리에 선배같은. 글쎄요. 나는 구원한다거나 구원받는다거나 그런 거창한 것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가 끌렸던 사람들에게 진짜 내 자신을 각인시켜두고 싶었어요. 나오코나 진노 선생님, 그리고 나처럼 불안정했던 유리에 선배가 행복해지길 바랐어요. 그러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나의 이 삶도 언젠가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길 거라 생각했거든요. 나의 마지막 선택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건 그냥 남겨두고 싶네요.
이 모든 일은 제가 소녀이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모두 부서지기 쉬운 진짜 자신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그것이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것 뿐이에요. 유리벽 안에 갇힌 유리로 된 자신. 그것을 과감히 깰 수 있게 하는 한 두명의 사람만 발견해도 당신은 행복할 거에요. 저는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뒤늦게나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어 기뻐요. 여러분이 저에 대한 책을 냈다는 것도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 사람들의 마음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어서 하마터면 내 이야기라는 걸 깜빡 잊을 뻔 했지 뭐에요. 모든 사람이 상처를 이겨내고 행복하길 빌어요. 나를 죽인 그 사람조차도. 과거의 상처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텐데 그 사람도 안타깝네요.
저의 이 마지막 편지, 잘 전해졌나요? 어떻게, 왜 전해졌는지는 궁금해하지 마세요. 세상은 설명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니까요. 이제 좀 쉬어야겠어요. 어쩐지 마음이 홀가분해져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마지막으로. 고마웠어요. 여러분은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