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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살인
윌리엄 베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제목을 보는 순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를 떠올리실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대학생일 때 교양과목으로 들었던 '영화의 이해' 수업 시간 중 보았던 영화 <새>. 저는 어렸을 때부터 비둘기를 무서워했답니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비둘기가 날면 사방 10미터로 벼룩이 날린다는 근거없는 소문에 대한 혐오와 그 조그만 부리로 쪼면서 쫓아올 것만 같은 공포감이 한데 뒤섞여 있다고 할까요. 그런 상태에서 <새>를 봤을 때의 그 감정이란! 한동안 '세상에 새보다 더 무서운 건 없어'를 남발하면서 학교를 다녔던 것 같아요.
그렇게 무서운 새가 벌이는 사건이라면 안 읽었으면 될텐데, 제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이 작가가 데이비드 헌트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누가 큐피드의 동생을 쏘았는가] 를 인상깊게 읽었기 때문이죠.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색맹인 탓에 세상을 흑백으로만 볼 수 있는 여자주인공도 좋았고, 음울한 분위기도 마음에 든 작품입니다. 첫번째 작품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새'가 등장해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첫번째 만남만큼 두 번째도 좋을 것인지, 내가 가지고 있는 새에 대한 편견도 깰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히치콕 감독의 새들이 아무 (제 기억에는) 이유없이 자유의지로 사람들을 공격했던 것에 반해, [새의 살인] 에서의 새는 인간에게 길들임을 당합니다. 배고픔을 이용해 새의 감각을 날카롭게 길들인 범인은 새와 자신을 동일시시키면서 자신이 직접 할 수 없는 일에 새를 이용하죠. 미국드라마에서 흔히 보이는 성적환상의 실현. 범인은 자신의 성적환상을 새를 통해 실현시키는 겁니다. 새가 강하게 하강해서 여자를 공격하고, 부리에 목을 박아 해를 입히는 장면들을 몰래 지켜보면서 '새'로 태어나지 못한 운명을 저주하기도 하면서요. 범인은 급기야 인간을 자신의 새로 만들기 위해 돌입해요. 그 대상은 방송국 기자 팸. 팸은 야심있는 기자로 사건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지만, 덕분에 범인의 표적이 됩니다.
결말 부분에서 범인이 팸을 '새'로 길들이는 장면은 섬뜩해요. 인간이 인간을 그런 방법으로 다룰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잔인하죠.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 지, 작가의 정신세계가 독특하다고 해야 할 지 알쏭달쏭할 정도랍니다. 그런데 작가 역시 제가 가진 '새'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놓지는 못했어요. 사실 이 책에 등장한 '새'는 굶주림에 길들여져 있고 사람을 공격하기는 하지만 본래는 매우 날쌔고 용맹한 존재에요. 뒷부분에서 자유를 찾아 힘차게 날아가는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광대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전개 자체가 속도감이 없고, 범인이 처음에 그런 일을 벌이게 된 동기가 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큐피드의 동생을 쏘았는가] 에서 보여주었던 독특한 분위기도 느껴지지 않았고요.
더욱 알쏭달쏭 한 것은 형사 제이넥의 역할입니다. 작가는 후에 이 제이넥을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시키는 모양인데, 이 작품에서 형사인 그의 역할은 비중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팸보다 수사력이 더 떨어지는 듯도 하고, '딱히 그가 등장하지 않았어도 내용 전개에 크게 지장을 주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음. 여러모로 [누가 큐피드의 동생을 쏘았는가] 보다 부족하게 느껴진 이야기였습니다. '새'에 대한 저의 좋지 못한 감정 때문이었을까요? 으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