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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들어 무척 인기를 얻고 있는 무라카미 선생의 단편집입니다. (작가마다 어울리는 호칭이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미야베 미유키는 미미 여사라는 호칭이 잘 어울리죠.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을 무라카미 선생으로 부르니 색다르군요 ^.^) 일본문학을 좋아하고 즐기는 분들이라면 확실히, 이 작가는 무시할 수 없죠. 교원 임용고시에서도 한자로 이 작가의 이름을 쓰라는 문제가 나올 정도로 일본 현대문학에 한 획을 그은 작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상실의 시대]를 접한 이후, 그 기묘한 분위기에 매혹당했답니다. 맨 처음 읽은 작품이라 그런지 저는 아직도 [상실의 시대]를 가장 좋아해요. 요즘 출간된 [1Q84]도 평이 좋던데 어쩐지 아까운 마음에 아직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집 역시 한 마디로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의 소설이에요. 총 여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모든 이야기가 간단한 듯 하면서도 그 어느 것도 쉽지 않은, 그런 소설들입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어디서 무엇을 보고 상상하게 되었을까 궁금해질 정도로, 묘사도 재미있고 푹 빠지게 되는 다채로움을 자랑합니다. 무라카미 선생의 작품은 (무라카미 선생 뿐만 아니라 나쓰메 소세키 작가의 작품 또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적용해서 해석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저는 그런 쪽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작품의 분위기에 푹 빠지는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문학작품을 읽는 데 꼭 정해진 틀 안에서 해석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수능시험도 아니고.
앞서 다채로움을 자랑한다고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이야기의 소재와 분위기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작품 안에서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주제는 아마도 '상실'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표제작인 <빵가게 재습격>에서 주인공은 과거 동료와 빵가게를 습격한 적이 있습니다. 큰 가게를 덮칠 필요도 없이 그저 자신들의 굶주림만을 채워줄 만큼의 빵만 훔쳤던 그들의 관계는, 그 일이 있는 후 단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틀어지게 되죠. 옛날 빵가게를 습격했을 때 주인은 그들에게 바그너의 음악을 다 들어줄 것을 부탁했었고, 주인공은 그것이 어떤 저주가 되어 친구와 헤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굶주림을, 어쩌면 그 때보다 더한 공복감을 주인공은 지금 아내와 다시 겪고 있는 겁니다. 아내는 이제 자신이 주인공의 파트너가 되었으니 그 저주에 자신도 걸렸다면서 그 저주를 풀 유일한 방법은 다시 한 번 빵가게를 습격하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주인공의 '빵가게 재습격'은 시작되는 거죠.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상실감과 외로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어쩌면 주인공은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언가가 변해가고 바뀌어가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마음을 다쳤던 것이 아니었을까, 인정하지 않았지만 친구와의 관계가 끊어지게 된 것에 엄청난 상실감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이 공복감으로 이어진 것은 아닌가 해요. 제가 예전에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갔을 때 그랬거든요. 무엇이든 양껏, 한국에 있을 때 먹던 양보다 배를 먹어도 계속 배가 고픈 거에요.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아서 병원에 가봐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 생활에 적응하고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되면서 그런 증상도 사라졌습니다. 주인공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어느 밤 갑자기 공복감을 느꼈고, 아내와 예전 벌였던 범죄(?)를 (범죄가 맞긴 한데, 어쩐지 안 어울리는 듯한 이 느낌은 뭘까요;;) 되풀이함으로써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풀어졌던 게 아닐까요? 이 아내라는 사람, 평범한 시각으로 보면 참 신비한데(과연 인간이 맞긴 할까 라는) 주인공에게 있어 치료제나 다름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각각의 작품이 다른 분위기를 취하고 있지만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코끼리의 소멸>도 그렇고, <패밀리 어페어>에 등장하는 방황하는 주인공도요. 그런 상실감은 <쌍둥이와 침몰한 대륙>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쌍둥이들이 어떤 존재였는 지 모르지만 그들을 잃고 상실감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모습은 섬을 연상하게 했어요. <로마제국의 붕괴*1881년의 인디언 봉기*히틀러의 폴란드 침입*그리고 강풍세계>와 <태엽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은 약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결국은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량이 매우 적은 단편들의 모음이지만 잘 찾아보면 동일인물로 생각되는 사람이 등장해요. 그 이름은 비밀로 해두겠습니다. 그래야 찾아보는 재미가 생길테니까요. 호홋. 찬바람이 불길래 거기에 어울리는 분위기의 책이 읽고 싶었는데, 역시 무라카미 선생의 분위기는 좋군요. 책을 읽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아~좋다'라는 생각이 드는 책, 오랜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