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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발레리 통 쿠옹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어쩌면, 의미없이 보냈을 일상이지만 그 안에 우리가 생각지 못한 인연의 끈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책 읽는 당신의 옆얼굴을 훔쳐보는 수줍은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고, 사소한 다툼으로 이별한 커플들도 있겠고, 지금은 그냥 스쳐지나갔지만 언젠가 오늘을 회상할 때 '우리가 만난 적이 있구나' 라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만남도 있을 거에요. '만약에...'로 시작되는 수많은 가정들. 그 수많은 인연의 끈들의 근원이 어디일지 생각하면 이윽고 떠오르는 단어, 운명. 지금, 당신은 그 운명에 감사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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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마릴루 | 마릴루 |
로열 앨버트 홀 | 알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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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하루는 끔찍했습니다. 중요한 서류를 책임지고 있는 그녀는 불친절한 택시기사를 뒤로한 채 급기야 뛰기 시작하죠. 머리속으로는 내내 시간을 계산하고 그녀의 유일한 희망인 아들 폴로를 생각하면서. 위험했지만 어떻게 지하철은 탔네요. 하지만 사고가 납니다. '일급 기밀의 자살'을 도와주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면서 그녀는 또 뛰기 시작해요. 뛰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회사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 탄 순간, 그녀의 머리 위에서 폭죽이 터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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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세의 노인. 그는 방금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하지만 결코 나에게 일어날 리 없는 일이라 믿었던 일이 그에게도 일어난 겁니다. 많은 나라를 다녔고 수백 권의 책을 읽었으며 일곱 개 언어를 배웠고 엄청난 성공을 거둔 유명인사였지만, '가족'은 그가 절대 이룰 수 없던 꿈이었어요.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는 상처. 메워지지 않는 가슴의 구멍. 하지만 그는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드디어 행운을 거머쥐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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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프루던스 | 프뤼당스 |
그라운드 컨트롤 투 메이저 톰 | 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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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흑인입니다. 누구보다 아름답고 누구보다 능력있지만, 단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죠. 그녀의 상처는 첫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굴욕을 참으면서까지 얻고 싶었던 사랑. 하지만 그녀가 대답을 끝마치기도 전에 첫사랑은 멀어져갔고 상심한 그녀는 자살을 기도합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워지지 않는 상처 끝에서 그녀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일어섰을 때, 마침내 눈부신 사랑이 그녀를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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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은 누구보다 리비를 사랑했어요. 아름답지만 차가운 리비. 그녀도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죠.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어요. 리비가 사랑한 건 그녀의 여자친구 알린도, 톰도 아닌 오직 그녀 자신 뿐이었거든요. 자전거 사고로 다친 몸을 이끌고 병원으로 향한 톰.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 죽음 직전에 이른 그에게 어린 천사가 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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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구성은 제 맘대로 ^-^>
마지막에는 전철에 뛰어들어 자살을 기도한 남성의 이야기도 등장하지만, 작품은 이 네 사람의 상황을 번갈아가며 보여줍니다. 결정적인 장면에서 이야기를 뚝 끊어버리죠. 당장 페이지를 뒤로 넘겨 한 사람 한 사람의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 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았어요. 목숨을 위협받고, 평생 몰랐던 비밀을 알게 되고, 오해가 풀리고, 사랑에 실패한 그들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한 사람의 인연의 끈은 또 다른 사람에게 연결되어 있고, 그 사람의 끈은 또 한 사람에 연결되어 있죠. 그리고 그들 각각은 그 하나의 도미노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카드입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선택'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마릴루가 지각을 하지 않았다면, 알베르가 조금만 더 일찍 가족들이 모여있던 방에 들어갔더라면, 프뤼당스가 그녀의 신념을 굽히고 올바르지 못한 길을 선택했다면, 자전거 사고로 몸을 다친 톰이 리비에게 다시 되돌아가지 않았다면 현재는 지금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겠죠. 우리의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가지 않은 길에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매순간 그 선택에 후회가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이 설령 '운명'이라는 이름의 우연일지라도요.
운명의 도미노가 쓰러지면서 만든 것은 '하트'였습니다. 나에게 일어난 우연이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누군가가 만난 운명이 나의 즐거움이 되기를, 그런 행운이 일어난다면 부디 모르고 지나치지 않게 되기를 빌어봅니다. 오랜만에 발견한, 가슴 따뜻한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