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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자살 노트를 쓰는 살인자,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2 ㅣ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생각은 하지만, 쏟아지는 재미난 책들의 홍수에 정신줄 놓고 휩쓸려 지내던 세월이었습니다. 올해는 마음을 다잡고 저의 머리와는 따로 놀던 손가락들을 제압한 후, 제가 책장을 너무나도 예쁘게 장식해주던 시리즈들을 눈으로만 훑어주며 뿌듯해하던 날들 속에서 혼자 속울음을 삼켰을 [시인]을 골랐는데요, 스릴러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가슴 설레어하고, 중요하다싶은 장면이 나오면 맑은 정신으로 읽어야해-하며 아쉬움을 달래며 책장을 덮었던 적이 언제였나 싶네요. 맘 먹고 읽었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다 읽었을테지만 어쩐지 한번에 몰아쳐 끝내버리기에는 아까운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요. 마치 처음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마냥 들떠서 아직도 읽을 부분이 있다는 것에 행복했던 하루하루였습니다.
장점이 참 많은 작품입니다. 우선 소재로 쓰인 '에드가 앨런 포'의 시구 사용이 전혀 식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고 싶네요. 저의 편견인지도 모르겠지만 스릴러 소설이나 추리소설에는 유독 에드가 앨런 포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데, 그 모든 작품을 전부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표지에 그런 언급만 있어도 전 어쩐지 피해지곤 했어요. 근거도 없으면서 에드가 앨런 포의 작품에 묻어가려는(?) 인상도 받았고, 작가만의 자의적인 해석은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시인]은 에드가 앨런 포의 시를 소재로 내세웠으면서도 그것에 전혀 밀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건이 진행된다고 할까요. 오히려 에드가 앨런 포의 시가 작품의 분위기를 이끌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작가의 세심하고 차분한 설명이 마음에 듭니다. 제가 공간구성능력이 부족하고 이해를 잘 못해서인지도 모르지만 책을 읽다보면 가끔 당췌 이 트릭이 어떻게 이루어진 건지 알 수 없게 쓰여진 장면을 접할 때가 있어요.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건너뛸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되면 작품을 이해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되고 작품에 대한 이미지 또한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죠. 이 작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세상에서 묘사하는구나-라는 인상을 받게 되면 그 다음 작품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하구요. [시인]은 600페이지를 자랑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그 분량이 부끄럽지 않게 장면 하나하나, 원인과 결과 하나하나까지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지루하거나 처지는 느낌도 없었습니다.
또 마음에 들었던 점은 '번역' 부분이었어요. 음, 번역 부분에 대해서는 좋았던 점과 의문을 갖게 된 점이 하나씩 있는데요, 우선 좋았던 점은 스릴러 소설이고 형사, FBI, 기자를 내세운만큼 충분히 거친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을텐데도 욕설의 비중이 낮았다는 점입니다. 한국영화, 특히 액션이나 형사물을 볼 때도 자주 느끼는 거지만 지나친 욕설은 독자들이 작품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저급한 이미지를 갖게 되기 때문에 부디 다른 작품들에서도 적당히 번역해주십사 하는 마음이에요.
번역에 대한 의문은 작품의 주인공인 잭 매커보이가 FBI요원인 레이철 월링과 므훗한 사이가 되는 부분부터 시작되었어요. 잭과 레이철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상대에게 존댓말을 쓰다가 관계를 맺고 난 뒤부터 반말을 쓰기 시작하는데요, 관계를 맺은 다음에도 존댓말을 써서는 안 되는 건가요? 영어공부는 이미 오래 전에 두손두발 다 든 상태이고, 제가 원문을 본다해도 어찌 번역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이었습니다. 하긴 어떤 책에서는 관계를 맺고 난 다음, 남자는 반말을, 여자는 여전히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했지만요.
섬세한 전개와 끊임없는 긴장감에 즐거워하고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알고 싶은 욕망으로 한껏 달아올라 있었지만, 마지막 반전이 아니었다면 별을 다섯 개까지는 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는 나도 예상하고 있었는데-하며 시큰둥하게 누워서 읽던 저를, 마지막 부분은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으니까요. 많은 분들이 이 -벌떡 일어남의 즐거움-을 누리시길 바래요. 아아, 오랜만에 느낀 독서의 즐거움으로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아직도 읽을 수 있는 마이클 코넬리'님'의 작품이 남아있다는 것에 큰 기쁨을 느껴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