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헤드 수확자 시리즈 2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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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은 깊어지고,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종소리가 예고된다]

 

전 세계에 <수확자> 돌풍을 일으킨 화제의 시리즈 중 두 번째 이야기 [선더헤드]. 로언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수확자 아나스타샤가 되어 마리와 함께 수확을 하게 된 시트라와 검은 로브를 입고 수확자 루시퍼가 되어 부패한 수확자들을 거두는 로언의 이야기가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특히 시트라의 수확 방법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요, 그녀는 수확당할 사람들에게 일정 시간을 주어 세상과 이별할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돕는 데다, 각각의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1편인 [수확자]에서 죽음의 의식이 마치 기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과는 다르게, 마지막까지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게 해준 거죠. 그녀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과연 질병이 사라지고 죽음마저 관리해야 할 영역으로 들어간 세상이 유토피아라 부를만 한 것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악당이 너무 쉽게 사라지면 재미가 없을 겁니다. 1편에서 수확을 쾌락의 도구로 사용했던 고더드의 죽음 이후 어떤 새로운 빌런이 등장할 지 궁금했는데, 이 고더드가 전혀 예상치 못한, 그 어떤 상상이라도 뛰어넘는 모습으로 등장해서 충격을 안겨줍니다. '그런 모습'이라도 유지하면서 살아있는 고더드를 보면, 죽음이 관리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오히려 죽음을 더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주어진 시간 속에서 의미를 남기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살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서 자신의 욕망을 최대한으로 분출시킬 시간이 필요하게 되는 거죠. 그런 점에서 작가는 죽음이 사라진 세상 속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을 통해 독자들에게 질문하는 듯 합니다. 선택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세상 속에서 살아가겠느냐고.

 

2편의 제목이 [선더헤드]인만큼, 1편의 '수확자 일기'의 자리를 선더헤드의 독백이 차지합니다. 선더헤드는 결코 수확령에 개입할 수 없지만,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된 시트라를 돕기 위해 모종의 계략(?)을 세우죠. 그레이슨 톨리버를 통해 시트라에게 반대편의 음모를 알리고, 생명을 구해주는 선더헤드의 생각은 대체 무엇일까요. '돕는다'는 행위에는 마음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어요. 연민, 동정, 그 외의 어떤 감정이 먼저 생긴 후에 '돕는다'는 행위가 뒤따르는 게 아닐까요. 선더헤드의 속마음, 아니 속생각은 무엇인지, 이 거대한 프로그램이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면서도 그것이 곧 인간이 아니라 기계라는 생각에 살짝 몸이 떨리기도 합니다.

 

인듀라의 침수와 노드 땅의 발견은 수확자들과 선더헤드에게 무엇을 시사하게 될까요. 모두가 불미자가 되어버린 세상, 수확령의 격변, 그리고 성서에 등장하는 천사의 나팔을 상징하는 듯한 종소리. 선더헤드가 관리하는 유토피아는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인지 너무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 3부 [종소리]에 가장 바라는 점은, 저 고더드의 추락을 부디 통쾌하게 그려주었으면 하는 점입니다. 애정하는 캐릭터들을 너무 오래 괴롭혀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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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서점 - 잠 못 이루는 밤 되시길 바랍니다
소서림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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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장 행복한 장소를 꼽으라고 한다면 서점이나 도서관 아닐까요? 전 새책 냄새와 날카로운 종이결도 좋아하지만 오래된 책들의 그 꿉꿉한 냄새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가끔 책 냄새 맡고 있는 저를 옆지기가 굉장히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기는 하지만, 아이들 냄새만큼 책 냄새도 참 매력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저의 눈에 포착된 '서점'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책 제목!! 심지어 그 앞에 '환상'이라는 단어가 더해지니 호기심이 강해질 수밖에요. '밀리의 서재' 종합베스트 1위인데다가, 독자들의 요청으로 종이책으로 출간된만큼 재미는 확실히 보장된 작품이라는 느낌이 왔습니다.

 

책을 읽기 전에 제가 예상한 스토리는, 어떤 서점에 기이한 분위기의 주인이 있고, 서점에 들리는 손님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손님과 맞는 책을 추천하면서 고민상담같은 것을 해주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제 예상이 절반 정도는 맞았다고 해도 될까요? 서점 주인인 '서주'는 우연히 마주한 연서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는데요, 그 이야기는 어느 때는 자신의 이야기, 어느 때는 저승차사의 이야기, 또 다른 누군가가 엮인 이야기이기도 했거든요. 영원히 존재하게 된 사내와 그 사내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비극적인 운명으로 고통스러운 생을 되풀이하게 된 여인의 이야기가 독자들을 꿈인 듯 현실인 듯한 세계로 초대합니다.

 

누구나 죽음 너머 세상에는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지 궁금할 거예요. 누군가는 윤회를 믿기도 하고, 누군가는 '천국'이라는 곳을 동경하기도 하며, 과학적으로 죽음을 증명하려 하기도 하죠. 어릴 때부터 저는 환생 이야기에 무척 끌렸었어요. 사람이 죽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니, 그럼 그 사람은 전생의 사람과 동일한 인물인가 아닌가, 한때는 그런 생각을 꽤 심각하게 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궁금했던 건,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사랑했던 사람을 또 다시 사랑할 수 있는가-하는 점이었는데요,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도저히 풀 수 없는 숙제 같아서 여전히 저를 끌어들이는 소재입니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이런 소재의 이야기들에 빠져드는 건, 그 신비함에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리기 때문일 거예요. 그리고 '영원'을 향한 동경이라고 할까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바뀌어가는 세상 속에서 '영원'이라는 것이 있을까, 존재하기는 할까, 그런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의 막연한 소망을 이루어주는 듯한 내용이었습니다.

 

마치 한 편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으로 읽은 책입니다. 평소 오디오북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어쩐지 이 책은 오디오북으로 들으면 더 실감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퍼뜩 들었고요. 신비로운 남자의 이야기가 '계속'될 수 있도록 속편이 나오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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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6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황유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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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한순간을 생각하며 새롭게 발견한 노인의 의지]

 

제 스스로가 세계문학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여러 번 말씀드렸을 거예요. 자고로 세계문학은 한 번만 읽는 게 아니라고, 여러 번 읽어야 감이 좀 오고 매번 다른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고요. 그 여러 번 읽은 세계문학 중 하나가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입니다. 학창시절에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아서 골라 읽은 후 노인과 고기의 맞대결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어요. 헤밍웨이의 삶을 대하는 자세, 저만의 무언가를 발견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이번이 최소 세 번째로 읽은 것 같은데, 여전히 잘 모르겠는 부분도 있고, '아, 그랬었지'라고 기억을 되살리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 애한테 내가 별난 노인네라고 말했었지." 노인이 말했다.

"이제 그걸 증명해 보일 때가 온 거야."

 

그가 이미 그걸 수천 번이나 증명해 보였다는 사실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이제 그는 그걸 다시 증명해 보이려 하고 있었다. 매 순간이 새로웠고, 그걸 증명해 보일 때 과거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p 72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4의 테마에 비추어 볼 때 노인의 '결정적 한순간'은 거대한 고기와 마주한 바로 이 순간일 겁니다. 사람들에게 '살라오', 누구보다 운 나쁜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는 노인은 고기를 잡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습니다. 그런 그의 곁을 따스하게 지키는 건 다정한 소년 미놀리 뿐이에요. 홀로 바다에 나가 거대한 고기를 맞닥뜨린 노인은 매순간 아이를 생각합니다. 저는 노인이 고기를 잡아 자신의 존재를 다른 사람에게 증명하려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그가 고기를 지키고 가져가려고 했던 이유는, 아이를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라오로 취급받는 노인을 세심하게 챙겨주는 아이가, 자신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이상한 시선을 받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요.

 

예전에는 노인이 바다에서 고기, 그리고 상어와 사투를 벌이는 모습에 집중해서 읽었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노인과 소년의 관계에 더 눈길이 갑니다. 초반에 펼쳐지는 소년의 다정한 배려와 챙김, 그런 소년을 온화하게 바라보는 노인의 모습에서 더없는 따스함이 느껴져요. 그러니 증명해야겠다고 결심할 수밖에요. 오직 한 사람, 자신을 믿어주는 소중한 존재니까요.

 

헤밍웨이에 관한 책으로 [디 에센셜_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있습니다. 실린 작품 중 <깨끗하고 밝은 곳>이라는 이야기에 이런 문장이 등장해요.

 

모든 것은 '나다(무(無))'이면서 '나다'이고 또 '나다'와 '나다'이면서 '나다'일 뿐이지.

 

저는 그 때도 '나다'를 단순한 허무가 아니라 담담히 세상의 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했고, 노인의 태도를 바라볼 때마다 이 '나다'를 확인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온 몸으로 맞서 싸웠으나 고기를 지키지 못했고, 노인은 계속해서 살라오 취급을 면치 못하겠지만 사자 꿈을 꾸며 잠든 노인의 모습은 그 자체가 '나다'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이 [노인과 바다]를 또 읽게 되는 날이 있을까 싶지만, 아이들도 있고 하니 한 두 번은 더 읽게 되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그 때는 또 무엇을 발견하게 되고, 무엇에 마음이 가게 될지 벌써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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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7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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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내부를 거울처럼 비춰줄 영원한 고전]

 

학창시절 처음 읽었던 [데미안]은 저에게 큰 울림을 주지 못했습니다. 울림은 커녕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역시 세계문학은 두번, 세번 읽어야 하는가봅니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4로 다시 한 번 만나게 된 이 작품은, 여전히 오묘하고 알쏭달쏭한 부분이 있지만 예전보다 조금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에요. 독서만큼 중요한 것이 삶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책만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삶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한편, 경험만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책 안에 존재하기도 하고요. 제가 [데미안]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데는 지나온 시간들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인공 싱클레어의 '결정적 한순간'은 역시 데미안과의 만남이겠죠.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엄하고 바른 교육을 받아온 싱클레어의 앞으로의 삶은, 아버지가 걸어온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보입니다. 한 번의 거짓말로 인해 더할 수 없는 고통에 빠지는 싱클레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데미안. 그러나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처음에는 그에게 거리를 둡니다. 그와 접촉하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이 숨쉬는 세상에서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각성한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의 의무만 존재할 뿐 다른 의무는 결단코, 전혀 없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자신의 내면에서 단단해지는 것, 어디로 가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p191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미안의 사고방식, 주위야 어떻든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 들어가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려는 모습은 결국 싱클레어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방황한 싱클레어가 깨달은 것은 바로 저 문장들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자신의 내면에서 단단해지는 것, 어디로 가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예전의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치며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헤세가 창조해낸 '데미안'이라는 인물은 20세기 초 유럽에 산재해 있던 신구 학문과 사상들에 정통으로 도전장을 내밉니다. 물질적인 가치를 중요시하는 사회에 대해, 이분법적으로 선과 악을 나누고 이성 중심의 이기적이며 자연 파괴적인 욕망에 대해.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는 인물이자, 낡고 공허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타파하려는 개혁가, 인간의 무의식에 대해 탐구하려는 시류에 부합하는 존재예요. 데미안, 그리고 싱클레어가 불가항력적으로 빠져드는 에바 부인은 그 자체가 헤세가 주장하려 하는 무언가이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가치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그는 또한 청년들에게 '의지'에 대해서도 역설하는데요. 저는 어쩐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반드시 북극에 가보겠다거나 그와 비슷한 일을 상상해볼 수 있어. 하지만 그 소원이 완전히 나 자신 안에 자리 잡았을 때, 정말로 나의 존재가 그 소원으로 채워졌을 때만 그 일을 실행할 수 있고 충분히 강해지기를 원할 수 있는 거야.

p 85

 

청춘이 겪어야 하는 고행과 열정을 지나치지 않고 직접 그들에게 말을 건 작가. [데미안]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위로의 상징이 된 이유는 자신의 무의식과 개인의 내면에 집중한 스스로의 경험을 진실성 있게 기록했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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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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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기 위해 필요했던 여행의 순간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4의 '결정적 한순간'이라는 테마에 어쩌면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 바로 [여행자와 달빛]이 아닐까 합니다. 혹시 여행을 가서 기차나 비행기, 버스를 잘못 탄 경험 해보셨을까요? 저는 낯선 곳에서 홀로 떨어진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너무 두려워서, 여행 전의 동선은 세세하게 짜지 않더라도 교통편만큼은 꼼꼼하게 챙기는 편이에요. 버스나 지하철 정도는 반대로 타본 적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황급히 내려 방향을 바로잡기 때문에 크게 놀랐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미하이는 심지어 신혼여행 도중에 고집 아닌 고집을 부리다 아내 에르지와 헤어져 로마가 아닌 페루자로 향하는 급행열차에 올라타고 맙니다.

 

미하이는 현실 세계보다는 관념에, 그리고 삶보다는 죽음에 사로잡힌 인물이에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울피우시 터마시와 그의 여동생인 에버입니다. 울피우시 남매는 어머니의 이른 죽음, 음울하고 냉정한 아버지, 비틀린 가치관을 통해 자신들만의 고립된 세계를 구축했고, 예민한 성정인 데다가 공황장애(로 추정)를 앓고 있던 미하이는 그런 그들의 세계에 큰 매혹을 느껴요. 항상 죽음을 갈구하는 듯 보였던 터마시는 두 번의 자살 시도 끝에 결국 죽음에 이르고, 울피우시 가의 남매를 중심에 둔 미하이, 에르반, 세페트네키 야노시의 세계도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미하이가 15년 동안 축적된 피로에 지배당하기 시작한 것은 테론톨라에서 원하지도, 의도하지도 않게 다른 열차에 올라탈 때였다. 에르지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고독과 그 자신을 향했던, 그 열차에 오를 때였다.

p119

 

미하이의 '결정적 한순간'은 역시 그가 기차에 잘못 올라탔을 때일 겁니다. 페루자에 도착한 후 미하이는 자신이 얼마나 삶에 지쳐있었는지, 홀로 죽음의 땅으로 떠난 터마시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를 마주하고 자신 또한 돌고 돌아 결국 죽기 위해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보여 요. 작품 안에서 그는 종종 '소년'같은 이미지로 묘사되는데,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던 이유는, 그의 두 발은 도저히 현실에 발 붙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항상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감은 특히 미하이에게는 결여되어 있어요.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가정이 있던 에르지와 '불륜'으로 이어져 결혼까지 이르렀음에도, 그런 그녀를 신혼여행지에서 내팽개치다시피 하는 상황은 저로서는 그가 응석받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쐐기를 박았습니다. 물론 예민한 소년 시절에야 얼마든지 죽음이라든가 다른 관념들에 사로잡힐 수 있지만, 성인이 된 지금에도 마냥 과거를 헤매는 모습은, 역시 그가 경제적으로 부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요. 그가 아버지의 경제력에 기대지 않거나 혹은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더라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을까요? 아니면 더욱 갈등없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을까요?

 

[여행자와 달빛]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미하이는 여행자입니다. 단순히 신혼여행을 온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어서 '여행자'의 기분으로 둥둥 떠다니고 있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토록 갈망하던 죽음의 순간, 역설적으로 삶을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미하이는 이제 여행자의 모습에서 탈피하게 됩니다. 아마도 미하이는 진정으로 죽음을 원했다기보다는, 동경하던 터마시의 죽음을 통해 더욱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그를 찬미하는 마음이 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열차를 잘못 탔던 그 한순간이 결국 그를 현실로 되돌려놓았습니다.

 

미하이의 결정적 한순간은 에르지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녀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어하는지 분명히 깨닫게 되죠. 이렇게 보면 우리 삶의 '결정적 한순간'은 우리가 선택한 순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선택에 대한 반동으로 의도치 않게 마주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네요.

 

앞서 읽은 시즌4의 두 작품보다는 확실히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려운 작품을 머리를 쥐어뜯으며 읽는 것, 그것이 바로 세계문학의 묘미 아니겠어요! 헝가리와 이탈리아를 오가며 펼쳐진 덕분에 이국적인 분위기가 한껏 담긴 작품, 우리는 과연 이 삶에서 무엇을 좇고, 무엇을 원하는지 자문해보며 읽어보면 좋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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