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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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기 위해 필요했던 여행의 순간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4의 '결정적 한순간'이라는 테마에 어쩌면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 바로 [여행자와 달빛]이 아닐까 합니다. 혹시 여행을 가서 기차나 비행기, 버스를 잘못 탄 경험 해보셨을까요? 저는 낯선 곳에서 홀로 떨어진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너무 두려워서, 여행 전의 동선은 세세하게 짜지 않더라도 교통편만큼은 꼼꼼하게 챙기는 편이에요. 버스나 지하철 정도는 반대로 타본 적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황급히 내려 방향을 바로잡기 때문에 크게 놀랐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미하이는 심지어 신혼여행 도중에 고집 아닌 고집을 부리다 아내 에르지와 헤어져 로마가 아닌 페루자로 향하는 급행열차에 올라타고 맙니다.

 

미하이는 현실 세계보다는 관념에, 그리고 삶보다는 죽음에 사로잡힌 인물이에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울피우시 터마시와 그의 여동생인 에버입니다. 울피우시 남매는 어머니의 이른 죽음, 음울하고 냉정한 아버지, 비틀린 가치관을 통해 자신들만의 고립된 세계를 구축했고, 예민한 성정인 데다가 공황장애(로 추정)를 앓고 있던 미하이는 그런 그들의 세계에 큰 매혹을 느껴요. 항상 죽음을 갈구하는 듯 보였던 터마시는 두 번의 자살 시도 끝에 결국 죽음에 이르고, 울피우시 가의 남매를 중심에 둔 미하이, 에르반, 세페트네키 야노시의 세계도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미하이가 15년 동안 축적된 피로에 지배당하기 시작한 것은 테론톨라에서 원하지도, 의도하지도 않게 다른 열차에 올라탈 때였다. 에르지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고독과 그 자신을 향했던, 그 열차에 오를 때였다.

p119

 

미하이의 '결정적 한순간'은 역시 그가 기차에 잘못 올라탔을 때일 겁니다. 페루자에 도착한 후 미하이는 자신이 얼마나 삶에 지쳐있었는지, 홀로 죽음의 땅으로 떠난 터마시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를 마주하고 자신 또한 돌고 돌아 결국 죽기 위해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보여 요. 작품 안에서 그는 종종 '소년'같은 이미지로 묘사되는데,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던 이유는, 그의 두 발은 도저히 현실에 발 붙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항상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감은 특히 미하이에게는 결여되어 있어요.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가정이 있던 에르지와 '불륜'으로 이어져 결혼까지 이르렀음에도, 그런 그녀를 신혼여행지에서 내팽개치다시피 하는 상황은 저로서는 그가 응석받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쐐기를 박았습니다. 물론 예민한 소년 시절에야 얼마든지 죽음이라든가 다른 관념들에 사로잡힐 수 있지만, 성인이 된 지금에도 마냥 과거를 헤매는 모습은, 역시 그가 경제적으로 부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요. 그가 아버지의 경제력에 기대지 않거나 혹은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더라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을까요? 아니면 더욱 갈등없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을까요?

 

[여행자와 달빛]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미하이는 여행자입니다. 단순히 신혼여행을 온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어서 '여행자'의 기분으로 둥둥 떠다니고 있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토록 갈망하던 죽음의 순간, 역설적으로 삶을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미하이는 이제 여행자의 모습에서 탈피하게 됩니다. 아마도 미하이는 진정으로 죽음을 원했다기보다는, 동경하던 터마시의 죽음을 통해 더욱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그를 찬미하는 마음이 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열차를 잘못 탔던 그 한순간이 결국 그를 현실로 되돌려놓았습니다.

 

미하이의 결정적 한순간은 에르지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녀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어하는지 분명히 깨닫게 되죠. 이렇게 보면 우리 삶의 '결정적 한순간'은 우리가 선택한 순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선택에 대한 반동으로 의도치 않게 마주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네요.

 

앞서 읽은 시즌4의 두 작품보다는 확실히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려운 작품을 머리를 쥐어뜯으며 읽는 것, 그것이 바로 세계문학의 묘미 아니겠어요! 헝가리와 이탈리아를 오가며 펼쳐진 덕분에 이국적인 분위기가 한껏 담긴 작품, 우리는 과연 이 삶에서 무엇을 좇고, 무엇을 원하는지 자문해보며 읽어보면 좋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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