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비 납치사건 - 개정판
김진명 지음 / 이타북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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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통해 생각해보는 역사를 향한 태도]

 

가부키좌에서 가부키를 관람하던 황태자비 마사코. 황태자비라는 신분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는 일조차 쉽게 허용되지 않았던 그녀가, 중고등학교 동창인 두 명의 여성과 잠시 휴게실에서 만나기로 합니다. 그러나 그 직후 벌어진 황태자비 납치사건!! 당혹스러움에 우왕좌왕하는 일본 경찰들 속에서 엘리트인 다나카 경시정이 수사를 지휘하게 되고,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경호팀을 따돌리고 동창생과 수행비서까지 기절시킨 뒤 유유히 가부키자를 빠져나간 범인이 여장남자라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게다가 범인이 두 명이고 그 중 한명은 한국인 유학생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일본 내 혐한 감정이 들끓고 외교 문제로까지 번지게 되죠. 범인의 요구는 단 하나, 명성황후 시해 당시의 한성공사관발 전문 제435호를 전 언론에 공개하라는 것 뿐입니다.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핍박받았던 이야기에는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질 겁니다. 실제로 한국 고대사 수업을 받을 때 꾸벅꾸벅 졸던 아이들도, 일제강점기 시작과 의병, 독립운동 부분에서는 두 눈이 초롱초롱해져요. 비록 독립운동의 내부 사정과 무장단체 조직 내용에 있어서는 머리를 쥐어뜯더라도 우리 민족이 당한 핍박과 설움에 대해서는 가슴 깊이 한국인으로서의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거겠죠. 아이들이 흥분하며 열중하는 수업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습니다.

 

얼마 전 영화 <영웅>을 봤는데, 을미사변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짓밝고 칼로 몇 번씩이나 찌르고 장기를 꺼내고 시신을 불태우는 장면을 보는데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습니다. 아무리 힘이 없는 약소국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한 인간을, 한 나라의 국모를 저리 잔인하게 죽일 수 있나 하는 생각과 함께, 힘이 없는 나라는 참으로 바람 앞의 등불같은 존재구나 라는 좌절감이 다시 느껴졌습니다.

 

작가는 한성공사관발 전문 제435호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서 차마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내용이 담겨 있을 거라 추측했어요. 작품 속 범인은 황태자비 납치를 빌미로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기를, 그리고 왜곡된 역사를 기반으로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그것을 이용해 잘못된 역사를 후세에 전수하고, 과거에 대해 반성과 사죄도 없이 고개를 빳빳이 세우려는 인물들에게 일침을 가하려 합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난무하지만 명성황후가 시해당할 당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겠죠. 작가가 제시한 내용조차도 증명되지 않은 낭설이라 일축당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명성황후에게 사후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가 아닐 거예요. 작가가 우리에게 묻고 싶은 것은 우리는 역사 앞에서 비겁하지 않을 수 있는지, 불의에 굴복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라고 생각합니다. 무릎 꿇은 자가 있는가 하면 궐기한 자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분연히 일어난 이들이 오히려 총을 맞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 옳지 못한 상황이 또 일어나지 말란 법 없으니까요. 과연 책을 읽는 너희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고 질문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책 속에서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마치무라는 역사교과서를 통해 '자학의 역사'에서 벗어나 '자랑의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왜 잘못에 대해 사죄하는 것이 자학인가요. 그렇다면 과연 일본은 우매한 민족을 일깨워줬다고 역사를 왜곡하면서 제국주의에 물들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핍박한 것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어린 아이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마땅히 상대방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회에서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기본 소양이니까요. 일본 또한 국제사회에서 성숙하게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해 진심어린 참회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작가님도 일본을 적대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잊지 말자고 하는 취지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저 또한 같은 생각이예요. 부디 작가님의 의지대로 일본에서도 이 책이 출간되어 역사 왜곡에 문제에 있어 조금이라도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사실 책을 읽고 리뷰 쓰기가 힘들었어요. 마음은 무거운데 할 말이 없어서요. 다만, 오랫동안 김진명 작가님의 책을 읽어온 독자로서 다시 한 번 가슴에 뜨거운 불 하나 틔워봅니다. 애국심에 더해 우리가 앞으로 일구어나갈 역사 앞에서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 출판사 <이타북스>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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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사라진 세계
모리타 아오 지음, 김윤경 옮김 / 모모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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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제한되어 있기에 더욱 안타깝고 슬픈 사랑]

 

고1 겨울, 심장병으로 갑작스럽게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아키토는 갑작스레 닥친 불운에 모든 희망을 잃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위로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뿐이지만, 그조차도 덧없이 느껴집니다. 부모님은 물론 친한 친구들에게조차 마음을 터놓지 못한 채 우울감에 빠져 있던 그는,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하루나라는 소녀를 알게 돼요. 하루나는 이미 반년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이지만 밝은 태도로 조금이라도 더 이 생을 이어나가기 위해 매일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와 만나게 된 후 아키토는 하루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되죠. 남은 시간을 하루나를 사랑하는 데 바치기로 한 아키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별의 시간은 조금씩 다가오고 있습니다.

 

한창 팔팔하게 삶이 주는 기쁨을 온 몸으로 느껴야 하는 때에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얼마나 절망적일까요. 전혀 예상도 못했던 어두운 미래.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면 지금 열심히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염세적인 태도에 빠진다 해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분투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제가 아키토였어도 조금은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 같아요.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 하루나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이 될까 봐 자신의 상황을 밝히지 않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고자 뛰어다니는 아키토는, 삶의 마지막 순간 비로소 진정한 무언가를 만난 듯한 기분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지금 내 상황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록 골골대기는 해도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도 아니고, 체력적으로 힘들기는 해도 하루하루 아이들과 행복하게 보낼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저는 무엇을 할까 생각해봤어요. 마지막인만큼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마도 아이들이 자라는 데 있어 엄마를 기억할 수 있게 이런저런 준비를 할 것 같아요. 영화에서처럼 생일에 맞춰 배달될 수 있도록 한 20년치 생일 케이크를 예약해둔다든지, 20년 분의 편지를 쓴다든지 하면서 아이의 미래를 그리고 애틋한 마음을 남기도록 최선을 다하지 않을까요??!!

 

제목이 [봄이 사라진 세계]라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세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인가 했는데, 일본어로 '하루'는 봄을 의미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 사랑하는 하루나를 잃은 아키토의 세계는 과연 어땠을까요. 시간이 정해진, 병이 아니었다면 너무나 아름답게 빛났을 청춘들의 이야기라 더욱 가슴 아팠던 이야기.

 

**출판사 <모모>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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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모 저택 사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기웅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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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미미 여사가 대답합니다]

 

타임슬립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느 시대로 갈 지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저는 아주 어렸을 때 고대 이집트 문명에 빠져서, 할 수만 있다면 3천년 정도 과거의 이집트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아동용 소설에 등장한 파라오가 정말 너무 멋있게 그려져 있었거든요. 소설 속 주인공은 비록 자신의 힘으로 타임슬립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타임슬립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가 정말 부러워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타임슬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여러 책과 매체를 통해 다양한 이론을 접했지만 뼈속까지 문과생인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 타임슬립을 할 수 있다면 어디로 할 것인가, 누구를 만나고 싶은가를 생각하면서 그런 망상을 즐기는 수준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가모 저택 사건]은 우연히 과거로 타임슬립한 주인공이 그 시간 속에서 벌어진 사건을 추리하는 내용이예요. 주인공 오카다 다케시는 대학 입시에 실패한 후 예비교 (우리나라의 재수학원같은 이미지입니다)에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치르러 도쿄로 상경했습니다. 때는 1994년(헤이세이 6년). 착잡한 마음으로 구 가모저택이자 현 히라카와초이치반 호텔에 투숙한 다카시는 주변 공기마저 일그러뜨릴 정도로 어두워보이는 남자를 목격한 후 자꾸만 그가 신경쓰입니다. 게다가 분명히 비상난간에서 그 남자가 떨어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했는데, 어디서도 그의 시체를 발견할 수가 없는 기묘한 상황에 놓입니다.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시험에나 신경쓰자는 마음으로 잠들기 전 켜둔 TV에서 방송된 2·26사건.

 

쇼와 11년(1935년) 2월 26일 새벽, 일본 군대 내에서 쿠데타가 발생합니다. 당시 육군 내의 황도파와 통제파가 심각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황도파의 젊은 청년 장교들이 결기하여 당시의 내각총리대신, 내대신, 시종장, 대장대신 등의 중신을 습격하고 암살해요. 이것이 바로 2·26사건입니다. 일본은 이 사건이 일어난 후 군부가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군부의 국정에 대한 발언권이 증가했으며, 이것은 곧 군부 독주에 의한 전쟁의 시대로 돌입하게 되는 전환점이 됩니다.

 

바로 이 사건을 TV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다카시는 곧바로 잠이 들고, 호텔에 불이 났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잠에서 깨어납니다. 죽음을 앞둔 그를 구하러 온 것은 다름아닌 정체불명의 기묘한 남자. 히라타라는 이름의 이 남자가 다카시를 구해 데리고 간 곳은 2·26사건이 일어나려는 쇼와 11년의 도쿄, 자신이 현대에서 머물렀던 히라카와초이치반 호텔의 전신인 '가모 저택'이었습니다. 호텔 화재 사건으로 입은 상처와 타임슬립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다카시는, 처음에는 히라타의 말을 믿지 않지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하나하나 인지하면서 자신이 정말로 육군 대장 가모 노리유키의 집, 가모 저택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가모 대장의 죽음에 얽힌 비밀 한 가운데에 서게 됩니다.

 

어려운 작품이 아닌데 개인적으로 내용 정리가 쉬운 작품은 아니었어요. 아마도 익숙하지 않은 군대 용어들이 등장하기 때문인 듯 한데, 어느 지점만 넘어서면 두꺼운 책의 페이지가 슉슉 넘어갈 정도로 매우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우리가 타임슬립을 생각할 때 빠지지 않는 논란이 '과거의 사실을 바꾸면 미래도 바뀔 수 있나'에 관계된 것이잖아요. 미미 여사는 이것에 대해 '역사는 바꿀 수 없고, 이미 정설로 굳어진 역사적 사실에 이의를 제기해 그런 사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정하거나 기존 통설에 수정을 가하는 역사 수정주의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삼송 김사장님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저는 2·26사건이 등장할 때부터 내심 불안했어요. 쇼와 11년, 1935년이면 일본이 제국주의를 발판 삼아 전쟁에 한창이던 시절, 우리 민족을 핍박하던 시절이기 때문이죠. 비록 아무리 좋아하는 미미 여사라 할지라도 만약 일본의 군부가 전쟁의 시대로 돌입하게 된 것과 그 후 미친 영향들에 대해 정당화하려고 한다면, 나는 앞으로 이 작가의 책을 아무 거리낌없이 읽을 수 있을까 하고 우려했어요. 다행히도 그런 내용은 등장하지 않고, 정말로 삼송 김 사장님의 말씀대로라면 어쩌면 미미 여사는 일본이 과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에 불편함을 표현하고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 여행자인 히라타의 고뇌는, 지금까지 타임슬립을 즐거움으로만 생각했던 제가 한 번도 고려하지 못했던 지점이었어요. 어떤 사건이 벌어질 지 이미 알고 있는 그로서는 큰 사고를 막아보려 애쓰지만 대신 그에 준하는 사고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에 좌절감과 함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인물입니다. 이에 그는 역사를 방관하거나 '가짜 신'으로 살기보다 자신이 돌아간 역사 속에서 한 인간으로 살고 죽기를 희망해요. 그의 고뇌가 굉장히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다카시가 쇼와 11년의 시대는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다, 나는 여기 사람이 아니다라고 부인하며 어떻게든 현대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준 하녀 후키가 사망하는 미래를 보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또한 감동적입니다. 한 인간의 결심을 바꾸는 것이 결국에는 타인을 향한 애정과 연민이라는 점이, 전쟁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인지 한층 강렬하게 다가와요.

 

감동받은 포인트가 꽤 많은데 너무 많이 이야기했다가 오히려 책을 읽기 전인 독자들에게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꽤 두꺼운 분량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결말 부분 또한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그 아련함이란!! 역사 속에서 개인은 매우 작은 존재일 수밖에 없겠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가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에도시대물 뿐만 아니라 역시 현대물도 재미있게 쓰시는 미미여사님!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요 (며칠 전 하라 료 작가님의 별세 소식을 들었더니 마음이 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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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만든 마을 - 에밀리 디킨슨이 사는 비밀의 집
도미니크 포르티에 지음, 임명주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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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만든 집에서 내내 행복했기를]

 

얼마 전 크리스티앙 보뱅의 [흰옷을 입은 여인]을 읽은 후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여인을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뱅의 꿈결같은 펜촉 아래에서 구름 위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저 멀리 떠 있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습니다. 어떤 인물에 대한 글을 읽었으나 마음이 채워지지 않고 공허하게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어요. 그녀가 실재했었던 것은 맞는지, 혹 세상 사람들 모두 그녀가 존재했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녀를 알고자 하는 독자에게 이런 마음을 갖게 한 것은, 에밀리 디킨슨, 독자를 만들어낼 노력을 하지 않았던 그녀의 탓(?)이 크다는 생각에 원망스러운 마음마저 듭니다.

 

한동안 답답한 마음으로 지내는 저에게 도미니크 프로티에가 쓴 [종이로 만든 마을] 원고가 도착했습니다. 가제본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공고에 냉큼 신청했거든요. 이 원고라면 나를 조금은 더 가까이 에밀리에게 인도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보뱅의 글을 읽고 이 원고를 읽기 전까지 그녀의 작품을 접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작가를 알기 위해서는 작품을 읽어보는 게 당연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시'라는 세상을 걷기에는 지상에 너무나 깊이 속해 있는 사람인가 봐요. 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에밀리를 도통 더 모르겠다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사실 도미니크 프로티에의 [종이로 만든 마을] 또한 '에밀리 디킨슨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여전히 그녀는 안개 속에 싸인, 속을 알 수 없는 여인입니다. 저자의 글을 한번에 하나씩 더듬어나가며 에밀리를 유추할 수 있을 따름이었으나 그녀와 관련된 두 번째 글이었기 때문인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받아들이게 된 느낌이랄까요. 자신의 집, 끝내는 자신의 방에 은둔하여 자신만을 위한 글을 써내려간 에밀리인만큼 아무리 그녀를 연구하고 연구해도 온전히 그녀를 이해하는 이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물다섯에 홈스테드로 다시 돌아온 에밀리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은 아마 집이 아닐까 생각했다.

p 29

에밀리의 생활 반경은 한정적이었습니다. 정원에 나가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심신이 미약해진 어머니를 돌보고, 밤에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내면으로 침잠하여 글을 써나갑니다. 그녀를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고 수군거리는 이웃들의 말은, 아마 에밀리의 귀에 가닿지도 못했을 거라 짐작해봅니다. 자신의 시가 출간되어 책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에밀리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은 그녀의 시를 읽고 이렇게 답해요.

출간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글은 출간하기에 너무 고귀합니다. 당신만을 위해 간직하세요. 그리고 괜찮다면, 저를 위해서도.

p 179

앞서 다른 이로부터 원하지 않는 출간과 원하지 않는 평을 들었던 에밀리는 히긴슨의 답을 듣고 반겼을 겁니다. 그녀에게 글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자신이 그 세상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쓴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감히 짐작합니다.

 

이 시인의 마음을 우리가 어찌 모두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연구하고자 뛰어드는 것은 아닌지. 에밀리 디킨슨에 대해 대략적인 인상이라도 붙잡고 싶으시다면 이 책이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외의 잡히지 않는 부분은, 그녀의 시를 통해 붙잡아보려 노력할 수밖에요.

 

**출판사 <비채>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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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0시의 몸값
교바시 시오리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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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 만점 납치 수사극!!]

 

'니쿠라·미사토 법률사무소'에서 '프로보노' 섹션에서 일하고 있는 고야나기. '프로보노'란 무료 또는 저렴한 요금으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실 고야나기의 사법연수원 시절 성적은 그리 뛰어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게 된 것만으로도 이색적이라 여겨질 정도입니다. 복지와 인권, 사회 정의와 관련된 업무이다보니 의뢰인의 고민 상담 같은 역할까지 맡게 되는데, 이번 의뢰인은 심지어 보스인 미사토 치하루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어요. 어쩌다 사기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친한 지인이 살해당하다시피 죽음을 맞자, 사기범 일당에게 복수하기 위해 중요한 자료를 훔쳐 쓰레기통에 버린 대학생 혼조 나코. 그런데 고야나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가 사라져버리고, 급기야 납치범 일당은 '사이버앤드인피니티'라는 회사에게 그녀를 구하고 싶다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하루만에 10억 엔에 달하는 몸값을 모금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과연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국민들은 기꺼이 모금에 동참해줄까요? 모금액이 목표액에 달성되지 못하면 혼조 나코의 목숨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납치한 사람의 몸값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받겠다는 전대미문의 사건!! 작품의 초점은 세 가지로 모아집니다. 첫째, 혼조 나코를 납치한 일당은 그녀가 복수하려던 그 사기범 일당인가. 둘째, 납치범 일당은 어째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몸값을 받고자 하는가. 알려진 바에 의하면 혼조 나코의 아버지는 유명한 방송인인데다 어머니 또한 유명한 요리연구가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몸값을 지불하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셋째, 정해진 시간 안에 모금액이 달성되지 않으면 혼조 나코는 살해당하게 되는가. 저는 너무나 단순하게도 납치범 일당이 혼조 나코를 납치한 것이 당연하고, 모금액이 모아지든 모아지지 않든 범인이 잡히게 되는 플롯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다 해도 범인을 수색하는 데는 영 소질이 없는 저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스토리가 펼쳐졌던 것입니다!!

 

숨가쁘게 진행되는 스토리에 마지막에는 가슴 찡한 감동까지 선사하는 [오전 0시의 몸값]은 제8회 신초미스터리대상 수상작입니다. 미치오 슈스케와 미나토 가나에등의 찬사를 받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어요. 납치라든지 몸값이라든지와 관련된 추리소설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저의 입장에서, 사실 이 작품의 첫 페이지를 펼칠 때만 해도 시큰둥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 자세를 고쳐앉고 읽게 만들 정도로 가독성이 뛰어나요. 문장도 술술 잘 읽히는 데다, 무엇보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기 위해, 그리고 이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게 되는데, 그 과정이 제가 생각해도 정신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됩니다. 책을 빨리 읽으시는 독자라면 두 시간이면 충분히 읽으실 수 있고, 책을 읽는 속도가 느린 독자라도 결말을 알기 전까지는 쉽게 잠들기 어려울 거예요.

 

등장하는 인물들도 개성이 뚜렷합니다. 정의의 사도-정도는 아니지만 혼조 나코의 납치에 책임감을 느껴 보스인 미사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사건을 끝까지 해결하고자 하는 고야나기는 당연히 엄지 척이고요, 그런 그에게 의뢰를 받아 조사를 해주는 사촌동생 와카는 발랄하고 의협심이 강한 이미지입니다. 사연 있는 범죄자였던 고야나기의 형도 어쩐지 멋지게 다가와요. 개인적으로 이 세 사람의 조합이 마음에 드는데, 어쩌면 시리즈로 이어지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해봅니다.

 

제가 이번 달에 여행을 갑니다. 난데없이 무슨 말이냐고요??!! 그래서 여행 가기 전에 되도록 많이 읽고 많이 리뷰도 남겨놓으려는데, 요즘 읽은 책들이 다 너무 재미나요!! 요즘은 길게 리뷰 안 쓰고 그저 '재미있다!! 꼭 읽으시라!!'는 말로만 리뷰를 남기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 작품도 그렇습니다.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 작품이예요!!

 

**출판사 <내친구의서재>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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