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발소
야마모토 코우시 지음, 안소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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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하. 표지를 보는 데 웃음이 났다. 발랄한 주황색 표지에 까까머리를 한 남자가 머리카락 대신 온갖 것을 머리에 매달고 이발소에 앉아있다. 표지만으로도 유쾌한 소설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흔히 여성들은 우울한 일이 생겼을 때 기분전환을 위해 미용실에 간다. 머리 스타일을 바꾸면 조금 전까지의 나는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고, 엄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힘겨운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미용실은 여자들이 가는 곳, 이발소는 남자들이 가는 곳이라고 내 머리속에는 인식되어 있었지만, 이 책에서 이발소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찾아가는 엄마의 자궁 같은 곳이다. 게다가. 이발소 주인은 남자라는 내 상식도 훌륭하게 뒤집어 버리고 여성이 이발소 사장님으로 등장한단다. 

작품은 여섯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단편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다 기운이 없거나, 일상에 찌들어 삶의 보람도 없고,  전혀 인생을 즐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회사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시키는 일만 그저 해내던 <들개와 춤을>의 오오토모 고우타, 강도의 침입을 당한 전형적인 여성인 <호신술 입문기>의 이와세 가에데, 회사의 비리를 파헤치려다 해고당하고 자살을 기도했지만 기억상실을 당한 <암흑의 세계>의 미요시 오사무,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이리저리 취직하기 위해 바쁜 <마이 웨이>의 아오야기 마미,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하기 싫은 일임에도 거절 못하는 성격의 <밀어버린 눈썹>의 주인공 스가와 사키, 마지막으로 퇴직하고 할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나팔꽃 골목>의 치히로의 할아버지까지. 주인공들이 이발소에 찾아가기 전까지의 생활을 보면 책을 읽는 내가 답답하고, 버럭 호통을 치고 싶은 마음에 한숨이 푹푹 나온다. 그런 그들이


 전에 함께 일했던 남편과 이혼하게 되면서 가게를 독차지하게 되었다는 것과 남자손님이 대부분인 이발소가 차라리 신경이 덜 쓰인다는 등의 이야기를 -p240
늘어놓는 여자 이발사에게 가서 머리를 자르기만 하면,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장에게 자신의 의견을 큰소리로 말하기도 하고, 하기 싫은 일은 거절하기도 하며, 동네의 풍경을 바꿔버리기까지 하는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 자신들의 인생을 즐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표지를 보고 하하 웃었다면, 책을 읽을 때는 그들의 변화한 인생을 나 또한 즐기면서 킥킥 웃게 된다. 큰 소리치는 그들의 모습에 내가 다 통쾌하고, 속이 뻥 뚫린다. 심지어는 나 또한 어디 이런 이발소가 있다면 당장 가서 머리 스타일을 바꾸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여자들이 우울할 때 미용실에 가는 것은 단순히 기분전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자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머리를 자름으로써, 거울 속에 비치는 새로운 나로 어제까지의 나쁜 일은 잊고, 새로운 날들을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이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미용사, 혹은 이발사라는 직업이 참 멋진 직업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야마모토 코우시-는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났다. 작가소개를 읽어보니, [곰팡이]라는 작품에서는 평범한 주부가 대기업을 상대로 보복하는 헤프닝을 그렸다고 한다. [우리동네 이발소] 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통쾌한 인생역전을 그린 작품일 듯 하여 무척 궁금하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소재를 끌어와 사람을 이렇게 즐겁게 하다니! 아무래도 이 작가, 보통 사람이 아닐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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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부츠
사와무라 린 지음, 김소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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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정하게 보이는 한 여자가 다리를 구부린 채 앉아 있다. 그냥 앉아 있을 뿐이지만, 어딘가 외로워보이는 그 모습에 흥미가 일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차마 말하지 못한 채 얼굴을 옆으로 돌려버린 것일까. 그 모습이 마치 '부디 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차마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사와무라 린, 아직은 생소한 이 작가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책은 여섯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인적으로 단편집을 장편소설보다 우위로 평가하는데, 이유는 짧은 분량 속에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작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편집을 내는 작가야 많이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작가 중에 나에게 감동과 '이거 진짜 물건이다'라는 인식을 갖게 해 준 작가는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 생각없이 집어든 이 책 한 권이 읽는 내내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맥이 꾼 꿈>은 3인칭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불륜 관계인 사오리와 미치오는 둘 중 하나가 죽지 않는 이상 관계를 끊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각각 자신이 죽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미치오가 자살을 택하고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가운데 사오리가 찾아와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면서 결국 둘은 아이를 위해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결심한다. 만약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났다면 많고 많은 단편들 중 그저 그런 작품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1인칭으로 끝나는 작품의 마지막에서 탄성이 절로 나온다. <주머니 속의 캥거루>에서는 쌍둥이 동생 아코의 뒤치닥거리를 도맡아 하는 다카모리의 이야기가 코믹하게 그려지고, <역에서 기다리는 사람><매리지 블루. 마린 그레이>는 미스터리 형식을 취해 으스스한 분위기와 섬뜩함을 느끼게 해 준다. <무언의 전화 저편>은 우리가 한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인식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가를, 대중이 가지고 있는 잔인함을 그려내지만, 마지막은 해피엔딩으로 기분 좋게 끝이 난다. 

여섯 개의 단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유사시>였다. 아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하러 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강박신경증에 시달리고 있는 주인공은 그 강박신경증을 치료하기 위해 허구의 친구 '루나'와 시뮬레이션을 한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아이가 베란다에서 떨어졌을 때 등등의 상황을 그리고 머릿속으로 아이를 구하는 연습을 한 주인공은 조금씩 신경증에서 놓여나기 시작한다. 어느 날 남편과 간 백화점에서 뜻밖의 사고가 일어나고, 그 때가 유사시임을 깨달은 주인공은 시뮬레이션으로 연습한 상황을 응용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유사시>가 인상깊었던 이유는 쓸쓸하게만 그려지는 주인공의 풍경이 마지막에는 따뜻하게 변화하기 때문이었다. 주로 강박신경증은 완벽주의자에게서 나타나기 쉽다고 한다. 심각한 강박신경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이 스스로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시뮬레이션으로 극복하려 하는 모습이 뭐랄까..헌신적으로 보였다고 할까. 그만큼 아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가슴이 아팠다. 또한 마지막에 보여준 그녀의 행동은 나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마 보통 사람들이라면 생각해내지 못했을 행동을 그녀는 훌륭하게 해냈고, 유사시에 멋지게 반응한 것이다. 

사와무라 린의 이 작품들은 모두 일상 속에 숨어있는 비일상을 재치있게 그리고 있다. [가타부츠]는 고지식하고 융통성없는 사람, 또는 착실하고 품행이 바른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작품들과 어울리지 않는 제목 같지만, 일상 속의 비일상을 그린다는 면에서는 훌륭하게 맞아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내 삶에도 이러한 비일상이 어디서 불쑥 튀어나올까 내심 긴장된다. 무섭기도 하지만 코믹하게, 애절하기도 하지만 즐겁게 끝을 맺는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또 주목할만한 작가를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작품들도 빨리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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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까지 진정으로 살아 있어라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말 워쇼 사진, 이진 옮김 / 이레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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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진정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읽은 책에서 무엇인가 배울 수 있기를 희망하며,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하지만 때때로 게으름을 피우고, 짜증도 내며, 세상에 나에게 주어진 시련만큼 더 커다란 시련이 있을까를 괴로워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평범한'사람이기를 계속 거부해왔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평범한 인생이 뭐 어때서'. 주어진 하루하루의 시간 속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랑하며,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평범한 일상이 그 누군가에게는 가장 간절한 소망이 될 수도 있음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던 그 단순한 진리를, 오늘에서야 진정으로 깨닫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한 마지막 삶을.

맨 처음 나를 맞이한 것은 한 여인의 사진이었다. 너무나 평화롭게 턱에 팔을 괴고 저 멀리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조금은 늙어보이는 한 여인. 나는 그 여인이 저자인 줄 알았다. '아, 책을 낼 정도의 생각이 깊고, 유명한 사람은 이런 눈빛과 표정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책을 펼쳤지만, 순간 화들짝. 그 사진의 주인공은 42세의 나이에 시한부 판정을 받은 베스라는 여인이었다. 낙타같은 커다랗고 순수한 눈망울을 한 이 여인은 병에 걸린 것을 안 후에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를 쓰고, 아파트 근처 공원에서 햇빛을 받으며 책을 읽으면서 인생을 즐겼다. 

다른 여인의 사진이 나타났다. 휠체어에서 일어나 집안일을 하고,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병상에 누워 있지만 행복하게 웃는 모습들이 차례로 지나간다. 병원에서 사회 복지사로 일하던 루이스는 유방암 판정을 받고 강제로 퇴직 당하고, 이혼을 하게 되지만, 자신의 남은 삶을 위해 집에서 치료를 한다. 병원에서는 인간다운 모습으로 치료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집 거실에 침대를 놓고 창 밖을 바라보며 따뜻하고 행복하게 마지막을 맞고 싶었기 때문이다. 

베스와 루이스 외에 병에 걸린 사람들의 사진이 차례로 지나가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표정은 전혀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고, 행복하게 웃고 있다. 한국드라마의 패턴이라고 여겨지는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만약 저런 병에 걸린다면 나는 남아있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물론 처음에는 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겠지만, 결국 병을 인정하고 주변 정리를 하면서 조용히 살아갈 것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한 전부였다. 하지만 책 속의 사람들은 모두 '조용한' 삶을 누리고 있지 않다. 마치 -나는 아직 살아 있어, 나에게는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어-라는 것을 말하는 듯이 온몸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다.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은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을 병원에서 홀로 맞는 것보다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편안하고 행복한 집에서 맞는 것이 가장 좋다고 이야기한다. 만약 그녀가 단순한 에세이로서 이 책을 쓰고 그런 말을 했다면 나는 콧방귀를 뀌며-흥, 당신이 정말 죽음을 알아? -라며 비웃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을 앞둔 사람들의 생활을 담은 사진과 글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 뿐만이 아니라, 죽음과 당당히 마주해서 그 두려움을 이겨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드는 의문은 만약 우리 가족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과연 집안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결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살려두고 싶은 마음에 결코 병원을 떠나게 할 수는 없다고 되뇌이지만, 그 사람이 내가 되었을 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죽음과 당당히 마주하고, 그들만의 세계로 행복하게 떠난 이들의 이야기는 순간순간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 죽음 없이는 우리 삶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진정한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안녕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까지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사진 속 여인처럼 평화로운 눈빛으로 세상을 응시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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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트 신전의 그림자
미하엘 파인코퍼 지음, 배수아 옮김 / 영림카디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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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인들의 신앙은 아주 다양하고 복잡했어요. 우리 개념의 일신교 같은 건 그 시절엔 없었으니까. 지방마다 다른 신을 섬기는 건 보통이었고, 심지어는 신관들 사이에서도 분파가 아주 많아서 여러 형태의 밀교도 성행했지요. 그런 밀교 중 하나가 아포피스와 수코스 그리고 아누비스를 합해서 하나의 신 토트로 만들고, 경쟁자인 태양의 신 라(Ra)와 대결하는 위치에 놓은 거예요  -p323

토트는 고대 이집트신화에 나오는 지혜와 정의의 신으로, 이집트어 타후티(Djehuty)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것이라 한다. 원래는 달의 신으로 달력의 계산을 주관하는 신으로 생각되었으며, 흔히 사람의 몸과 이비스 새 (따오기 종류) 의 머리를 가진 서기관으로 표현된다.《사자의 서(書》의 오시리스 신화 속에서는 사자의 심판 때 명부의 신 오시리스 앞에서 사자의 심장을 저울에 달아 그 무게를 기록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진다.(-출처 : 네이버)  어렸을 때부터 이집트 신화에 관심이 많아 이집트 관련 서적을 몇 권 가지고 있는 터라, 이번 책은 그냥 넘겨 버릴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러라고 정해준 적은 없지만, [이집트, 오시리스, 이시스, 스핑크스, 아몬 라..] 등등의 단어가 들어간 책은 무조건 나의 수집 대상이다. 게다가 신전 그림이 쾅 찍힌 표지는 나를 부르는 손짓처럼 느껴졌다. 

주인공은 아버지를 여의고 킨케이드 영지에서 홀로 고고학을 연구하는, 아름답고 총명하고 씩씩하며 올곧은 새라 킨케이드. 하지만 자신의 대부이자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였던 모티머 레이던 박사의 요청으로 런던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떠난다. 살인 현장에 토트를 상징하는 상형문자가 피로 그려져 있어 고고학에 정통한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레이던 박사까지 괴한의 습격을 받고 납치당한다.  프랑스인 모리스 뒤 가르와 사건을 조사하던 새라는 배후에 음흉하고 막대한 토트신의 밀교가 숨어있음을 눈치채고,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 토트의 책을 찾으러 이집트로 험난한 모험을 떠난다. 

 아마도 과거가 우리를 그토록 사로잡는 이유는 매일매일, 매순간 순간 우리가 과거를 호흡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111

고고학자인 새라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토트의 책을 찾아나서는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고등학교 때 나 역시 역사관련 일에 종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때 한 선생님이 '너는 왜 역사가 좋으니?'라고 물으셔서 '그냥 좋으니까요. 공부하고 있으면 즐거워요'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역사를 좋아하고, 한 때는 나도 고고학자가 되어 보겠다고 큰소리 탕탕 치던 나는 지금은 전혀 다른 길로 가고 있다. 지금 선택한 길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씩씩한 새라가 열심히 발굴을 하러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문득 예전의 내 꿈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소설이라지만 이런 종류의 책에 정신을 못차리고 덤비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하지만 두 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데, 하나는  새라 아버지와 새라의 과거를 계속 언급하면서도 그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무슨 이야기가 나오겠지 하면서 기대했는데도, 결국 책에서는 새라 아버지가 죽게 된 경위와 왜 새라가 그것에 죄책감을 갖는지,  새라가 잃어버린 어린시절의 기억에 숨어 있는 사건은 무엇인지 전혀 밝혀주지 않는다. 작가가 2편을 낼 생각이 아니라면, 이야기의 구조에 약간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또 하나는 프랑스인으로 그려지는 뒤 가르의 대사가 '리엥, 아무것도'라는 식으로 되어 있는데, 조금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프랑스어만으로 나타내고, 괄호안에 (아무것도)라고 나타내는 편이 독자들이 읽기에는 더 편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역사 미스터리라고 선전문구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엄청난 미스터리와 스릴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숨가쁜 추격신도 물론 등장하지만,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일종의 모험 소설에 가깝다. 영화에 비유하자면  [인디아나 존스] 라고나 할까.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점이 더 재미있었다. 구덩이에 빠지고, 뛰고, 총싸움하고, 또 위기에 빠지면 멋진 사막의 아드님이 나타나셔서 구해준다. 이집트에 관련된 여러 가지 신화적인 이야기가 담긴 것도 무척 흥미진진했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범인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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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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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 일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한국에 일본문학 번창의 길을 갈고 닦은 선구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도 그녀를 [냉정과 열정 사이] 를 통해 알게 됐는데, 츠지 히토나리와 함께 쓴 그 책은 정말 좋았다. 하나의 사랑을 두 사람이 같이 써나갔던 그 이야기. 생각만해도 아련하다. 처음 읽은 작품으로 인해 기대치가 너무 높았는지 그 다음 접한 작품들은 만족보다 실망이 더 컸다. 글쎄, 사랑에 대한 일본인들의 정서는 우리와는 달리 끈끈함이랄지, 끈질김이랄지 그런 느낌이 부족한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의 담백한 문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너무 건드려 지독하게 앓게 하는 작품을 읽고 난 다음이면 어김없이 일본문학이 그리워진다. 그럴 때는 답답하고 복잡한 가슴을 살짝 뚫어주는 사이다 같은 담담하고 가벼운 문체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차가운 밤에] 도 그런 마음으로 집어들었다. 깊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가볍게 독서를 즐기려는 마음으로. 에쿠니 가오리하면 연애소설이 곧바로 떠올랐기에 이 책도 사랑이야기를 모은 단편집일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동안 접해왔던 그녀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르다. 마치 일본의 옛날 괴담을 듣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에, 내용들도 어떻게 이런 내용을 상상했을까 할 정도로 익숙치 않은 소재들로 가득하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담백한 그 문체랄까. 마치 하기 싫은 작문을 해 놓은 것처럼 이런저런 수식어 없이 간결하다. '나는 이렇게 여기까지 썼어,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너희들의 몫이야'라고 말하는 듯이. 

대부분의 작품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그 중 몇 가지는 꽤 마음에 들었다. 죽은 개 듀크가 인간으로 변신하여 주인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온다는 <듀크>, 자신의 전생을 일순 기억해내는  <언젠가, 아주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손녀의 몸 속에 들어가있다가, 할아버지가 운명할 때에 함께 떠나가는<연인들> 은 어쩐지 아련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를 풍겨 마치 꿈결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낮보다는 밤에 책을 펼쳤을 때 그 느낌을 더 깊게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책 띠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동화적 상상력과 그리움을 담아내는 감각적 문장- 흠. 한국어로 번역해서 감각적인 문장인지는 내가 판단할 수 없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동화적 상상력이라니 그건 좀 과장된 듯 보인다. 에쿠니 문학의 근간이며, 동시에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지만, 나에게서 그리 큰 공감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는 작가는 멋지지만, 그 세계를 보다 많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나타내는 것이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아니면 이 작가를 깊이 알기 위해 좀 더 지켜봐야 하는 것인지. 내 교감신경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에쿠니 여사, 내가 그대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 부디 다음 작품은 낮이든 밤이든 읽는 시간에 관계없이 내가 좀 더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를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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