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가 돌아왔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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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빚에 허덕이며 목숨까지 위협당하는 조 손은 교사 자리가 있다는 소식에 고향 안힐로 숨어든다. 그에게는 비극적인 기억이 존재하는 고향. 이곳에서 그는 교통사고로 아버지와 동생 애니를 잃었고 자신 또한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조는 알고 있었다. 애니가 죽기 훨씬 전에 이미 애니를 잃었다는 것을. 애니는 더 이상 애니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가 고향에 돌아온 이유는 도박 빚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게 익명으로 보내진 한 통의 메일. ‘나는 네 여동생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 그 사태가 다시 벌어지고 있어.’ 그가 안힐로 오기 전에 마을에서는 한 엄마가 자신의 아들을 살해하고 자신 또한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었다. 아들의 침대 위에는 ‘내 아들이 아니야’라는 문구를 남긴 채. 안힐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조가 겪은 일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선데이 타임스>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고, 영국 범죄작가협회에서 시상하는 스틸 대거상과 전영도서상 최종 후보였으며 40개국으로 수출된 작가의 전작 [초크맨]. [애니가 돌아왔다]에 관심과 기대가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두 작품은 비슷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학교 선생님인 주인공, 네 명의 어린 시절의 친구, 불길한 사건들로 인해 더럽혀지는 어린 시절의 추억, 고향을 떠났다가 문득 다시 찾아와 잔잔했던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는 한 사람, 그로써 파헤쳐지는 과거의 음울한 비밀. [애니가 돌아왔다]와 [초크맨]에 차이가 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초자현적인 현상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이다. 무언가가 바로 뒤에 서서 미소 짓고 있을 것 같은 느낌, 닫혀진 변기 뚜껑을 보고 흠칫흠칫 반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기분. 그 어둡고 공기가 꽉 막힌 것 같은 분위기는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꿈에서까지 괴롭힐 정도였다.

 

작품이 주는 공포의 원인 중 하나는 우리나라의 ‘한’의 정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 원한을 품고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귀신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공포 이야기에 반해, 작품 속 불길한 ‘무언가’의 의식이 향하는 대상은 무차별적이다.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공포스러운 것이다. 죄가 없는 사람에게조차. 그리고 익숙하고 안정적이었던 존재가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라는 그 섬뜩함과 이질감은 작품 전반을 떠돌며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데 일조한다. 게다가 결말 부분에 휘몰아치는 진실과 반전이라니.

 

 

또 한가지 매력적인 점은 작가가 그려내는 십대 특유의 성향과 분위기에 있다. 집단이 어느 한 개인을 공격하고 괴롭히는 모습, 무리에 끼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누군가를 배척할 수밖에 없는 현실들이 굉장히 생생해서 마치 작가가 그런 실재를 겪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로 탄광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석탄산업과 지역 공동체와 광부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과연 죽음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는데 작품이 탄탄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장들 또한 굉장히 철학적이어서 섬뜩한 미스터리 소설이 아닌 인생에 관해 논하는 작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녀가 소재로 삼은 초자연적인 현상은 '유령'이라는 존재로 국한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결말 부분에서 그 부분을 아예 배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한 가지였다고 할까.

 

이제 단 두 작품. 이 작품들로 C.J. 튜더는 전 세계 스릴러 독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이름으로 각인되었다. 번역가의 컴퓨터에는 작가의 세 번째 작품 원고가 저장되어 있다는데 조만간 이 작품도 만나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미스터리보다 스릴러 쪽에 가깝다는데 내년 여름에는 읽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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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쓸모 -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
최태성 지음 / 다산초당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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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좋아하고 공부하는 걸 즐기지만 '역사를 왜 알아야 해? 역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뭐야?'라는 질문에는 답하기가 쉽지 않다. 이유없이 나는 그냥 역사가 좋았으니까. 종이에 기록된 일들이지만 먼 옛날에도 사람들이 살았고, 그들의 삶이 지금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탑재되어 있었던 것 같은 향수와 어떤 그리움이 느껴져 역사라는 단어만 생각해도 마음이 애달팠다. 하지만 이런 나의 감정을 '역사의 쓸모'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근현대사 속 일본의 만행에 대해 이야기할 때 느끼는 울분은 한국인이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이 역사의 '쓸모'는 아니므로. 밥벌이에 치이고 삶의 이러 저러한 풍랑에 휩쓸려 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문구는, 가끔은 배부른 자의 이상향처럼 느껴질 때도 있는 것이다.  

늘 고민해왔던 역사의 '쓸모'에 대해 저자 최태성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은 역사가 단순히 사실의 기록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것은 착각이고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고 강조합니다. 역사는 나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예요. 역사를 공부했음에도 살아가는 데 어떠한 영감도 받지 못했다면 역사를 제대로 공부했다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는 역사를 공부할 때의 감정만 잊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를 일본에 넘긴 을사오적을 공부할 때의 분노, 그 기분을 잊지 않고 기억해두었다가 사회에 나가서 선택을 하거나 책임을 져야 할 때 떠올리라고. 그 마음이 역사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일깨워 줄 것이라고.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려다가 삶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의 경우를 생각하고, 그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역사에 남을 부끄러운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하는 데 역사의 '쓸모'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저자 자신이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일생을 다룬 다큐 프로그램의 말미에 나오는 문구에 영향을 받았다는 부분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저자는 '삶이라는 문제에 역사보다 완벽한 해설서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총 4개의 주제로 나누어 역사의 쓸모를 이야기한다. <쓸데없어 보이는 것의 쓸모, 역사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쓸 것인가, 인생의 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라는 주제 속에서 역사 속 인물들이 각각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들려주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묻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궤적 속에서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가 유독 인상적이었다. 정조가 키운 다재다능한 학자였던 정약용은 정조의 죽음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는 유배지에서도 나라와 운명을 탓하며 인생을 허비하기보다 18년 동안 무려 500권의 책을 집필한다. 그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복숭아뼈에 세 번 구멍이 날 정도로 글 쓰는 일에 매진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관직에 나갈 수 없는 폐족일지라도 선비의 기상을 유지할 것, 폐족에서 벗어나 청족이 되려면 독서를 중요시 할 것 등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지금 자신의 생각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으로만 기억할 것을, 지금은 비록 죄인의 입장이나 자신이 글쓰기를 계속하는 한 역사는 자신을 '죄인 정약용'으로만 기억하지 않을 것임을 믿었던 사람. 지금의 이 고난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조급한 마음을 버릴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일화다.

진실로 너희들에게 바라노니, 항상 심기를 화평하게 가져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라.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한번 쓰러졌다 하여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그저 문서 속의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 삶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어 우리의 삶의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일은 현재에도 똑같이 일어나 지금의 우리에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묻기도 한다. 당장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도 우리 삶 하나하나가 소중한 역사가 된다. 우리가 행한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 영향이 어디까지 뻗칠 것인가는 미지수이나 설령 이름있게 알려지지는 못해도 '아무개'로서 살아온 시간들은 소중하게 기억될 것이다. 누군가의 기억에 영원히 남는다 하니 두렵지 아니한가. 그러니 과거의 거울을 통해 지금의 우리는 '잘' 선택하고, 의미있게 이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 역사의 '쓸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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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죄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은모 옮김 / 달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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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를 꿈꾸는 마스다 준이치. 예전 일했던 곳에서 마찰을 빚어 해고당한 후 일자리와 머물 곳을 찾아 가와켄제작소에 취직한다. 회사에서 마련해 준 기숙사에서 입사 동료 스즈키, 같은 회사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지만 방을 빌릴 수 있는 돈이 마련되면 금방 그만 둘 작정이었다. 그 때까지는 문제 없이 지내고 싶어 스즈키에게 친밀한 말 몇 마디를 건네보지만, 스즈키는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지 않은 채 그들을 멀리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동료들에게 마음을 열고 어울리기 시작하는 스즈키. 준이치는 자신을 단 하나의 친구라고 생각하는 스즈키에게 의구심을 느끼고, 그의 방에서 발견한 사진 한 장으로 그가 과거 '고쿠쟈신 사건'의 범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스즈키에게 호감을 느끼는 미요코, 스즈키를 걱정하는 야요이, 비극적인 과거를 가진 준이치의 시선이 교차하며 범행 이후 소년A의 그 후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에도가와 란포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을 수상한 일본의 대표적 사회파 추리 작가 야쿠마루 가쿠의 신작이다. 국내에는 [천사의 나이프], [악당], [형사의 눈빛], [어둠 아래], [기다렸던 복수의 밤], [돌이킬 수 없는 약속], [신의 아이] 등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최근 읽은 작가의 작품이 [신의 아이]인데, 이 작품에서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소년이 사회 속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그렸다면 [우죄]에서는 소년범죄를 전면에 내세워 범행 후 의료보호소에 수감되었다가 출소한 소년 A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할 그것. 범죄를 저지른 후 출소한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설마 우리 곁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웃고 있는 것인가. 죗값을 치렀다면 그는 이제 행복해져도 되는 것인가. 피해자들의 억울함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이어지는데 가해자인 그가 웃어도 되는 것인가.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차지하는 가운데 어떤 눈으로 그들을 바라봐야 할 지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객관적인 입장이라면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한다면 소년A도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만약 내가 피해자의 가족이라면 범인이 웃거나 행복하게 지내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준이치는 피해자의 가족은 아니었지만, 그의 갈등의 이유는 스즈키가 자신을 단 하나의 친구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자신을 친구라 여기며 과거를 고백하고 그래도 계속 친구로 남아주길 바라는 스즈키와,저널리스트로서의 사명감을 운운하며 그의 현재 행적을 대중에게 알리길 종용하는 스도 선배. 우정과 저널리스트로서의 역할에 대한 갈등으로 준이치는 번민한다.

과연 가끔 궁금하기는 했다. 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다녀온 사람들은 현재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이 내 주변에는 부디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이지, 결코 흥미로 그들의 행적이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기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몰라도 대중이 소년A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한다는, 기자인 자신들은 그의 행적을 대중에게 제공할 의무가 있다는 스도 선배의 말은 사실 자기 기만이 아니었을까. 스즈키를 돈벌이로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저널리스트로서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거짓 사명감. 작품에는 스즈키와 준이치처럼 과거 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또 한 명 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과거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떠들며 비웃고 침을 뱉는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은 잔인하다.

참 어려운 작품이다. 쉽게 어느 편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 지 모르겠다. 스즈키가 만약 내 주변에 있었다면 나도 그를 꺼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나를 친구로 여기고 과거를 고백하며 그래도 친구로 남아달라고 호소한다면, 그래도 그를 멀리할 수 있었을까. 나는 어떤 비밀을 가진 누군가의 과거가 드러났을 때 그를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여러 감정 중에서 명확한 것은 내가 피해자의 가족이라면 당연히 복수하고 싶었을 거라는 점이다.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죄를 짓고도 법의 그물망을 빠져나가 희희낙락하는 이들의 존재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에, 반성하며 괴로워하는 스즈키의 모습을 보면서도 쉽게 그의 손을 잡아줄 수 없는 것이다. 작가는 어떨까. 그는 준이치의 입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말하는 것인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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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요, 라흐마니노프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2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정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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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치 음대 가을 정기 연주회에서 콘서트마스터를 맡게 된 기도 아키라. 밀린 학비 제출 기한의 연장과 장학금 수여, 명기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연주할 수 있다는 열망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얻은 성과였다. 세계적인 라흐마니노프 연주자인 쓰게 학장의 손녀이자 첼리스트인 쓰게 하쓰네와 프로의 길을 걷기 위해 연습에 매진하지만, 완전 밀실에 보관되어 있던 시가 2억 엔의 첼로 스트라디바리우스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한다. 삼엄한 경비 속에 보관되는 첼로가 도난당하다니, 학생들 사이에서는 결국 범인은 교내의 인물이라는 소문이 돌고, 정기 연주회를 위해 선발된 오케스트라 멤버들 사이에서도 긴장감이 감돈다. 게다가 쓰게 학장에게 맞춤으로 제작된,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피아노가 파괴되고, 목숨을 위협하는 듯한 경고장까지 날아들면서 정기 연주회의 개최 여부까지 미궁 속으로 빠진다. 과연 범인의 목적은 정기 연주회를 중지 시키기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가. 과연 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런 일을 벌이는 지 모두가 궁금해하는 가운데, 마침내 가을 정기 연주회 당일이 되었다.

[안녕 드뷔시] 로 2009년 제 8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대상을 수상한 나카야마 시치리가 두 번째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인 [잘 자요, 라흐마니노프] 로 돌아왔다. 이미 나에게는 마성의 작가, 거역할 수 없는 압도적인 몰입감으로 수많은 독자들을 끌어들인 나카야마 시치리. 이제 그도 히가시노 게이고처럼 그 이름만으로 하나의 장르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것 같은 느낌이다. 사회파 미스터리로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코지 미스터리로 추리의 아기자기한 면모를 자랑한다면,이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에서는 음악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눈 앞에서 연주를 듣는 것 같은 풍부하고 섬세한 묘사로 독자들을 압도한다. 달린다, 심장 박동이 선율과 동조한다, 허공을 찌르는 활, 무너지는 건반-같은 표현을 읽고 있으면, 어느새 나의 호흡도 연주와 하나가 되어 가빠지는 것이 느껴진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어느새 무호흡 상태. 작품 속 연주가 끝나고나서야 나의 호흡도 다시 시작된다. 나도 모르게 일어나서 내 머릿속 연주회에 박수를 치고 말아야 하는 것 같은 환희와 격정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미사키 요스케가 등장해 사건을 깔끔하게 해결하는 작품이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잘자요, 라흐마니노프]는 음악가가 되기 위한 청년들의 분투와 그로 인한 짙은 서정성이 깊게 표현되었다. 음악인으로서 연주를 계속 하고 싶은 마음, 그러나 생활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취직을 선택해야만 하는 현실. 자신이 선택한 것에 책임을 지고 끝까지 달려야 하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뜨겁고 애달프게 적셔온다. 일본 만화 [노다메 칸타빌레]를 무척 좋아해서 드라마와 영화도 챙겨보았는데, [노다메 칸타빌레]는 음대생들의 밝은 모습에 주력했다면 작가의 이 작품은 그들의 비애와 침통함이 글 속에서 그대로 음악으로 연결되어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음악으로 전달하기 위한 열망. 그 열망이 불덩이처럼 솟아올라 단번에 나를 꿰뚫어버렸다.

그 동안 나카야마 시치리가 선보인 작품의 분위기가 매우 다양하다. 히포크라테스 시리즈,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와타세 경부 시리즈, 시즈카 할머니 시리즈까지 각양각색. 여러 시리즈에 반해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는 [안녕, 드뷔시]를 읽고 사실 특징이 조금 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웬걸. [잘 자요, 라흐마니노프]를 읽고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비단 추리와 미스터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도 궁금했지만 책을 읽는 동안 어느새 그런 것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스토리에 집중했다. 가슴을 요동치게 만드는 감동, 울컥하게 만드는 한 편의 장대한 드라마. 미사키 요스케는 그 드라마에 어울려 그저 함께 녹아들 뿐이다. 부드럽지만 강인한 캐릭터. 작가가 창조해 낸 세계 속에서 단연 매력적인 인물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작가와 작품이다. 예고된 바에 따르면 7월 말에는 변호사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 [악덕의 윤무곡]이, 8월에는 시즈카 할머니 시리즈 [시즈카 할머니와 휠체어 탐정] 이 준비되어 있다. 빨리 만나고 싶은 조급한 마음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저 이 작가가 건강하게 장수해서 부디 되도록 많은 작품을 선보여주길 바랄 뿐이다. 어서 작품 중 하나라도 집어드시라. 미리 환영한다. 이미 작가와 출판사의 덕후가 된 당사자로서 이제 그의 덕후가 된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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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인간의 탄생 - 세기전환기 독일 문학에서 발견한 에로틱의 미학
홍진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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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독일은 산업혁명과 함께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눈에 보이는 영역 뿐만 아니라 산업혁명의 토대가 된 자연과학의 영향 아래에 철학과 문학, 예술과 종교도 엄청난 변화에 직면했으며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전통적인 관점 또한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문학을 이해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문학을 한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영향하에 생성된 것으로 본다. 덕분에 문학의 변화 뿐만 아니라 독일의 사회와 문화도 함께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기서는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새로운 인간관을 중심으로 변화의 한 가운데에서 독일어권 문학이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를 개관한다.

사실 평소 독일문학에 그리 관심이 깊었던 것은 아니다. 문학 자체에 지식이 깊은 것도 아니고 역사적인 위치에서 독일의 입장을 조금 알고 있을 뿐, 독일 내의 전체적인 변화에도 무심하다. 그런 내가 이 책에 호기심을 가졌던 이유는 표지 그림 때문이었다. 황금의 화가로 불리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다나에>. 오스트리아를 여행할 때 직접 본 클림트의 그림들은 정말 좋았고, 그의 그림에 대해 지식을 가진 어떤 이의 설명으로 인해 작품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후 클림트의 그림에 예전보다 더 매력을 느꼈는데 이 책과 클림트의 그림은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까, 가 궁금했다.

흔히 '세기전환기'로 일컬어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독일어권 문학을 살펴보는 데 클림트의 작품들이 흥미로운 이유는, 성과 에로틱이 당대 예술과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떠올랐으며 클림트의 그림들이 그런 문화적 현상을 매우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1900년 [꿈의 해석]을 발표하면서 인간의 정신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의 본질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 발달의 원동력을 성 욕망에서 찾고 있었다. 그 외에도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펠릭스 잘텐, 토마스 만, 프랑크 베데킨트 등의 작가들도 성과 에로틱에 관심을 가지고 비윤리적 성관계를 그리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 동안 금기시됐던 성과 에로틱이 이 시대에 어떻게 주류 문학과 예술에서 핵심적인 주제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욕망하는 인간의 탄생]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며 더불어 독일제국의 수립과 산업혁명의 역사적인 배경까지 함께 설명한다.

책은 총 3부로 나뉘어 1부에서는 <19세기 중반 이후 독일의 사회, 문화적 상황>, 2부에서는 <자연주의가 보여준 사실의 문학>을, 3부에서는 <세기전환기 독일 문학의 에로틱과 예술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19세기 후반은 독일에서는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간관이 붕괴되고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는 새로운 인간관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는 자연과학과 객관적 사실에 대한 열광이 식으면서 가치의 중심을 인간의 내면, 인간 개체의 본질 속에서 향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성이 어떻게 대두되었는지에 대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1부에서 3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학작품을 토대로 어떤 변화 양상을 보이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완전 문외한인 내가 읽어도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없지만, 그래도 용어나 작가에 익숙하지 않은 비전공자가 읽으면 어느 정도는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읽어본 독일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라서 이 책에 실린 작품들 전부 생소했지만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함께 변해가는 문학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꽤 즐거웠다. 마치 살아 숨쉬는 문학을 접한 기분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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