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덕의 윤무곡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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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나카야마 시치리.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변호사이자 과거 '시체 배달부'로서 끝나지 않는 속죄를 계속하는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가 돌아왔다. 이미 발표된 작품들에서도 하나같이 흥미롭고 놀라운 반전을 선보였지만 이번 [악덕의 윤무곡]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지난 30년 간 한 번도 발길이 없었던 친어머니가 살인죄로 기소되어 미코시바 레이지가 그 변호를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재혼한 남편을 자살로 위장해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어머니. 혐의를 부인하는 그녀. 그 어머니의 변호를 부탁하러 온 여동생 아즈사. 미코시바 레이지가 과거 '소노베 신이치로'로서 저지른 죄로 그들 가족은 30년간 연락을 끊고 지냈었다. 더구나 미코시바의 가슴 속에는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던 바. 당연히 여느 의뢰인과 마찬가지로 대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하지만, 가슴 속 밑바닥에서 소용돌이치는 이 감정을 뭐라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죄가 남은 가족들에게 어떤 시간을 부여했는지, 어머니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미코시바 레이지는 외면했었던, 혹은 잊고 지냈던 그 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야기는 미코시바 레이지의 어머니가 남편을 자살로 위장해 살해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분명히 남편을 살해했다. 그 이유를 돈 때문이라고도 밝혔다. 재혼한 남편은 명망있는 재산가에 신사였고, 자신에게는 과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그런데 왜 죽이는 걸까. 이 부부에게 말못할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녀의 혐의는 명백하다. 밧줄 끝에 그녀의 DNA도 발견되었고, 더 이상 도망칠 구석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자신은 절대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재산이 많고 상속자도 없는 지금, 굳이 왜 그를 죽여야만 하는가. 이대로 같이 살아도 안락한 생활은 보장되지 않나. 남편이 죽으면 그 재산을 전부 자신이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죽인다고 해도, 작품 내내 보여지는 어머니 이쿠미의 성격 상 오로지 돈이 목적인 것 같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살인자라면 굉장하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미코시바 레이가 잔인한 살인자가 된 것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물러받은 것인가. 악덕은 되물림되는가.

그런 괴물을 낳은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괴물을 그대로 괴물로 키운 건 부모니까. 하지만 정작 그 괴물이 고작 열네 살이었던 탓에 재판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어느 소년원에 들어갔고 결국 아무 죄도 묻지 못했다지 뭐요? 살해된 여자아이와 그 가족들만 딱할 따름이지. 그럼 적어도 범인 대신 부모가 책임을 지는 게 도리 아니겠소?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의 가장 큰 재미는 그와 검사 간의 법정 다툼이다. 검사가 내미는, 일견 불리해보이는 증거들을 이 변호사가 어떻게 하나하나 깨부수는가 지켜보는 재미가 아주 크다. 이번 [악덕의 윤무곡]에서도 이 변호사의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다고 할까. 여기에 과거 자신의 가족을 마주한 그의 고뇌가 더해진다. 물론 그는 부인한다. 이쿠미는 그저 의뢰인일 뿐이라고. 14년동안 같이 살던 시절에도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노라고. 하지만 그가 사건을 맡은 후 보이는 미세한 변화를 구사카베 요코가 감지한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고. 한 번도 진심을 토로하지 못한 미코시바 레이지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결국 무너졌다. 과거의 가족을 마주하고, 그 사건이 있은 후 부모님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고 난 후.

 

미코시바 레이지가 현실 인물이었다면 나도 당연히 그를 비난했을 것이다. 무서우니까. 인간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른 채 잔인하게 소녀를 살해한 것도 모자라 여기저기 전시하 듯 '배달'한 그를 감히 사람이라 지칭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이나미라는 은인을 만나 개과천선을 하고, 다른 사람이 알아주든 어떻든 자신만의 속죄의 길을 걷고 있다 해도 그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외계인같은 '생물'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돌아온 자'이기 때문이다. 악의 구렁텅이에 빠졌으나 다시 돌아와 다른 이들과 같은 일상을 보내는 사람으로서. 어떤 이는 그것을 철면피라거나 뻔뻔하다고 비난하겠지만, 그가 소설 속 인물인 이상, 그리고 그가 여전히 속죄라는 의자에 앉아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거두기란 힘든 일이다.

 

아이들을 낳은 후 범죄에에서 피해뿐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도 생각해보게 됐다. 그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이미 나란 인격은 형성되었고, 내가 가해자의 입장에 서게 될 일은 거의 없겠지만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 고의가 아니더라도 혹여 우연한 사고로라도 가해자가 된다면 나는 부모로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 부모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를 애지중지 키운다. 그렇게 키워도 누군가는 범죄자가 된다. 부모의 잘못은 아이가 죄를 저지르기 전이 아니라, 저지른 후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또 다른 상처를 만들 것인지, 그도 아니면 진실한 속죄의 길을 아이와 함께 걸어갈 것인지.

 

아버지의 자살 후 도망만 다녔던 어머니 이쿠미와 여동생 아즈사의 과거를 보면서 그들도 괴로웠을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부모로서의 결의는 부족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했다. 하지만 사건의 내막을 안 지금, 과연 부모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미코시바 레이지가 무너진 것은 당연. 냉철하게만 보였던 그의 가슴에 이제야 조금씩 따뜻한 심장의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온기가 지속될 것인지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그런 그가 앞으로 보여줄 활약은 더욱 대단할 것이다. 그러니 응원할 수밖에. 나카야마 시치리, 당신은 정녕 최고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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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고양이에 관한 작은 세계사 -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 사랑스러운 동물들의 이야기 풍경이 있는 역사 6
이주은 지음 / 파피에(딱정벌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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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저자의 [스캔들 세계사]를 재미있게 읽어왔다. 어렵다면 어려울 수도 있는 세계사를 재미있게 풀어내어 다양한 명화와 함께 맛볼 수 있는 점이 장점. 정글북의 작가 키플링의 '역사를 이야기 형식으로 가르친다면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에 공감하여 좀 더 대중적이고 재미있는 역사책에 대해 고민하던 중 '눈숑눈숑 역사 탐방'이라는 제목의 블로그를 통해 역사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블로그에 연재하던 글이 역여 출간된 것인 앞서 언급한 [스캔들 세계사] 시리즈와 [은밀한 세계사] 책이다. 이번에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한 동물들의 이야기에 주목하여 인간과 동물들이 함께 살아온 궤적, 그 안에서 벌어진 다양한 일화들을 역시 명화와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애견 의류나 강아지 장신구에 관한 역사는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3000여년 전, 이집트 사람들은 고양이를 사랑했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렇다고 개를 키우지 않았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에게 장신구를 달아주는 것을 좋아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벽화나 어떤 이의 무덤에서 출토된 개 목걸이 등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고 한다. 고대 로마에서도 키우던 개가 세상을 떠나면 무덤을 만들어주고 절절한 마음이 담긴 시를 묘비에 새겨 동물들을 향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개들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새와 다람쥐, 족제비에게까지 장신구를 달아주었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없다. 클레오파트라의 선조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북극곰을 애완동물로 키웠고, 중세 유럽에서는 고양이를 불길한 생물로 여겨 마녀재판 하듯 고통스럽게 죽이는 일이 빈번했으며, 전쟁터에서 맹활약한 개의 이야기, 침몰하는 배에서 살아돌아온 기적의 고양이, 수박껍질 하나 잘못 먹어 교수형에 처한 코끼리 메리의 이야기등, 독특하고 신기하면서도 슬픈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역사 속에서 동물의 이름을 남기는 일은 흔치 않지만, 책에 삽입된 명화들을 보면 개나 고양이, 그 밖의 동물들이 심심찮게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의 곁을 지켜온 동물들. 그 동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연스럽게 역사에 발자국을 남겨온 인간의 변화과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틀에 박힌 역사가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로서의 역사. 결국 역사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혹은 다른 생명들과의 교감과 변화 과정에 대한 기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다정함도, 인간의 잔혹함도 엿볼 수 있었던 독특한 이야기들. 저자의 다음 역사 이야기는 무엇을 주제로 할 지 늘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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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 식당의 밤
사다 마사시 지음, 신유희 옮김 / 토마토출판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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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정겨운 선술집]

 

가쓰시카구 게이세이 요쓰기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요쓰기 일번가 한복판에 작은 술집이 하나 있다. 가게의 이름은 '은하 식당'. 이름은 식당이지만 카운터 석만 있는 선술집으로 술에 안주는 기본이고, 주인장을 둘러싸는 디귿자 모양 카운터와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실내조명, 가게 안쪽 귀퉁이에 소중하게 장식해 둔 진짜 첼로와 L자형 나무 후크에 달아놓은 굵은 활이 자아내는 운치, 벽에 걸린 괘종시계의 음색 등이 매력적인 장소다. 예순 살 안팎으로 보이는 댄디한 주인장과 어머니라고 하기에는 젊어보이고 부인이라고 하기에는 나이 차가 꽤 많이 나 보이는 여성의 뛰어난 손맛이 자랑인 곳. 이 가게를 찾는 단골들은 모두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란 동네 친구이자 같은 학교를 나온 동문이기도 해서 두 세명만 모여도 친근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된다. 저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편한 차림으로 어슬렁어슬렁 모여들어 하루를 마무리 하는 정겨운 곳이다.

[은하 식당의 밤]은 마스터와 거의 매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선술집을 찾는 메밀국수집 '요시다암'의 5대째 사장 요시다 테루오-일명 테루-와 컴퓨터 관리 회사의 수리 부서에 근무하는 테루의 초등학교 때부터의 친구 스가와라 후미로-일명 붐-, 가쓰시카 경찰서 소속 경찰관으로 생활안전과에서 일하는 야스다 히로시-일명 소녀 헤로시-를 중심으로 총 여섯 편의 이야기가 엮여 있는 단편집이다. 애달픈 첫사랑의 사연,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피해자 여성이 가해자를 용서하기까지의 이야기, 지지리도 복이 없이 한평생을 살다가 결국에는 어머니와 동반자살을 계획한 남성, 첫사랑인 커플이 역경을 이겨내고 결실을 맺는 내용, 전통적인 재즈 음반과 기묘한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선술집의 마스터에 관한 비밀까지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그러면서도 가슴 벅찬 감동을 전달하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일본작품 중에는 이렇게 어떤 한 장소를 중심으로 그 장소와 연결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풀어놓는 소설들을 꽤 만날 수 있는데, 그런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서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만큼 더 깊게 감정이입이 된다. 이발소, 경찰서, 우체국, 선술집, 식당, 카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중적인 장소의 각각의 사람들이 간직한 사연. 비밀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안성맞춤의 장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쩜 그리 재미지는지. 이 작품 또한 한 번 펼친 후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읽어내려갈 정도로 매력이 철철 넘친다. 실제로 은하식당이 있다면 직접 가서 술 한 잔 기울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작품들의 영향을 받은 덕분인지 나도 한 번 소박한 음식점이나 선술집을 마련해 정겨운 장소로 자리매김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꿈틀. 하지만 현실과 소설은 엄연히 다른만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이야기들은 일견 평범해보이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몇 줄이나마 아주 작은 반전을 선사한다. 때로는 감동을, 때로는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반전이라 일상 미스터리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특히 마지막에는 마스터의 이름과 식당 이름의 유래에 관한 힌트가 공개되는만큼 '은하 식당'이라는 이름을 보고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를 생각한 사람은 그 궁금증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술을 잘 못하는 나지만 이 소설을 읽고나니 오늘만큼은 꼭 술 한 잔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당인 신랑과 맛있는 안주를 준비해 한 잔 걸쳐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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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 사막의 망자들 잭 매커보이 시리즈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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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재미를 자랑하는 스릴러!]

 

'시인 사건'으로 인해 일약 스타기자가 된 잭 매커보이.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LA타임스에 스카우트 되어 기자로 활약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과거의 명성일 뿐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저널리스트들의 입지도 점점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인터넷 세대에 뒤처지고 연봉이 많다는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은 잭은 마지막 한방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에 자신의 기사를 검토하던 중 얼마 전 작성한 '16세 소년 클럽 댄서 살인사건'에 대해 가해자 가족으로부터 억울하다는 한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뛰어난 추리력과 냉철함으로 이 사건이 연쇄살인 사건 중 하나라는 단서를 포착한 잭은 사건 뒤에 숨은 진짜 범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런 잭의 모습을 포착한 진범 '허수아비'. 컴퓨터의 귀재인 그는 잭의 인터넷 정보를 조작하고 그를 고립시키면서 사지로 몰아간다.

 

크라임 스릴러 세계로 인도한 작가 마이클 코넬리. 그의 잭 매커보이 시리즈, 해리보슈 시리즈, 미키 할러 시리즈를 처음 접했을 때 이런 이야기들이 있구나! 하며 열광한 기억이 난다. 읽는 작품마다 너무 재미있어서 시리즈 전부를 모두 소장하고 있을 정도인데 요즘에는 그 출간속도가 조금 더딘 것 같아 아쉬워하던 참이었다. 그 아쉬움을 달래주듯 잭 매커보이 시리즈 중 하나인 [허수아비] 가 출간 10주년 기념을 맞아 리커버 개정판으로 돌아왔다. [시인]과 [시인의 계곡]을 읽은 독자라면 잭 매커보이의 캐릭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재미가 더 배가 될 수도 있지만, 앞의 두 작품을 읽지 않아도 [허수아비]를 읽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다. FBI 요원 레이첼 월링과의 관계도 행간을 통해 짐작이 가능하고, 오히려 시인 시리즈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 두 작품들을 찾게 될 지도 모른다.

 

[허수아비]에서는 고객들의 정보를 맡아 관리하는 천재 해커가 오히려 그 정보를 역으로 이용해 연쇄살인을 일으키는 이야기를 담았다. 새나 다른 동물들로부터 농작물을 지키기 위해 세워두는 허수아비의 이미지를 이용한 것일까. 범인은 그런 이미지를 시그니처로 이용해 희생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연출하는데 그 가학성과 잔인함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아무리 어린 시절 상처가 있고 그로 인해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누구나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닌만큼 범인의 선천적인 범죄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범인을 상대로 레이첼과 함께 추적하고 끝내는 범인을 잡아내는 잭의 모습은 프로 기자이기 때문인 건지, 그의 피에 흐르는 해리 보슈의 영향 때문인 건지 조금 궁금하기도 하다.

 

10년 전에 유일하게 읽지 못한 작품 [허수아비]는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빠른 속도감과 각 챕터마다 드러나는 사건에 대한 정황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얼마 전 아이 그림책 때문에 내 책을 정리하면서 마이클 코넬리 작품도 다른 곳으로 치워야 하나 걱정했는데, 역시 그대로 꽂아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읽지 못한 예전 작품들, 최근 출간된 작품까지 소중하게 간직해야겠다. 역시 스릴러 소설의 제왕이라 불릴만한 작가와 그 명성이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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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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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아버지로 인해 부유한 생활을 하는 고등학생 소녀 캄빌리. 소녀의 아버지는 밖에서는 자애와 봉사, 헌신으로 빛나는 인물이지만 가정 내에서 보여지는 그의 모습은 밖의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력에 물들어있다. 주기적인 폭력으로 어머니는 유산을 반복하고, 캄빌리와 그녀의 오빠 또한 잘못한 것이 있을 때면 아버지가 생각하는 합당한 처벌을 받는다. 심지어 아버지는 딸의 발에 뜨거운 물을 붓거나 허리띠를 풀어 남매를 때리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아이들의 생활은 일과표로 촘촘히 짜여있고 어머니를 비롯해 그 누구도 아버지에게 반항은 커녕 말대꾸 한 번 제대로 못하는 무거운 분위기가 집 안을 감싸고 있다. 그런 가정에서 오빠 자자가, 어느 날 영성체를 거부한다. 그 날을 기점으로 아버지는 무너졌던 것일까. 캄빌리는 앞으로의 가족의 모습이 예전과는 같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는 한편, 마침내,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자각하고 가족이라는 억압된 테두리 안에서의 정신적 독립을 꿈꾼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난 그녀는 나이지리아의 엄격한 상류 가정 출신 소녀의 정신적 독립 이야기를 담은 첫 장편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로 영연방 작가상과 허스턴 라이트 기념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두 번째 장편소설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로 오렌지 소설상과 10년 간의 오렌지 소설상 수상작 중 최고의 작품에 수여하는 '최고 중의 최고 상'을 받았고 '천재 상'으로 불리는 맥아서 펠로로 선정되었으며 <뉴욕 타임스>선정 '올해의 100대 도서' 목록에 올랐다. 그 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화려한 수상이력을 자랑하는 작가의 [아메리카나]는 동시대 나이지리아 출신 청년들의 아메리칸 드림과 그 명암을 사랑과 우정을 소재로 재치 있게 그려낸 작품으로, 이 작품 역시 엄청난 명성을 쌓고 있는 중이다. 그런 작가가 우리나라를 방문한다. 요즘 가장 핫한 작가 중 하나인 그녀가 우리나라에서 어떤 목소리를 낼 것인가.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그녀의 자전적 요소가 포함된 작품으로 우리에게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전달한다. 다만, 그녀의 아버지는 작품 속 캄빌리의 아버지처럼 폭력적이거나 가부장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톨릭으로 귀의해 자신의 아버지마저 이교도라고 비난할 정도로 광신적이고 통제적이며 가학적인 아버지 유진의 모습은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한다. 자신을 가정 내에서 신격화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그는 그 자체로 신, 불멸의 존재와 같았다. 하지만 그 틈을 파고드는 자유로운 성향의 고모와 그녀의 아이들로 인해 유진과 자식들의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것은 급기야 할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파국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나이지리아 내의 가부장적 모습과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고, 고유어가 자주 등장해 읽는 흐름이 끊길 때가 많아 생각보다 읽는 데 시간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작가가 제시하는 결말이 생각보다 속시원하지는 않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소설이기에 바랄 수 있는 뭔가가 해소되어야 하는 욕구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막힌 채 목을 꽉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캄빌리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면 이전과는 다른 생활을 누릴 수 있을까. 오빠와 어머니는 좀 더 자유롭게 숨통이 트인 채 살아갈 수 있나. 답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저 그들이 다른 방향의 인생을 향해 한걸음을 내딛었다는 것뿐. 안타깝지만 어쩌면 이 작품은 어느 작품보다도 더 현실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어지는 삶 속에서 끝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듯, 작품 속 인물들의 삶도 현재진행형이다. 다만 변화를 향해 움직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작가는 단 하나,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후의 삶이 어떤 모습이든 지금의 삶이 힘들고 괴롭다면 한 번이라도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작가가 과연 우리나라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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