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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의 윤무곡 ㅣ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7월
평점 :
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나카야마 시치리.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변호사이자 과거 '시체 배달부'로서
끝나지 않는 속죄를 계속하는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가 돌아왔다. 이미 발표된 작품들에서도 하나같이 흥미롭고 놀라운 반전을 선보였지만 이번
[악덕의 윤무곡]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지난 30년 간 한 번도 발길이 없었던 친어머니가 살인죄로 기소되어 미코시바 레이지가 그 변호를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재혼한 남편을 자살로 위장해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어머니. 혐의를 부인하는 그녀. 그 어머니의 변호를 부탁하러 온 여동생
아즈사. 미코시바 레이지가 과거 '소노베 신이치로'로서 저지른 죄로 그들 가족은 30년간 연락을 끊고 지냈었다. 더구나 미코시바의 가슴 속에는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던 바. 당연히 여느 의뢰인과 마찬가지로 대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하지만, 가슴 속
밑바닥에서 소용돌이치는 이 감정을 뭐라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죄가 남은 가족들에게 어떤 시간을 부여했는지, 어머니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미코시바 레이지는 외면했었던, 혹은 잊고 지냈던 그 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야기는 미코시바 레이지의 어머니가 남편을 자살로 위장해 살해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분명히 남편을 살해했다. 그 이유를
돈 때문이라고도 밝혔다. 재혼한 남편은 명망있는 재산가에 신사였고, 자신에게는 과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그런데 왜 죽이는
걸까. 이 부부에게 말못할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녀의 혐의는 명백하다. 밧줄 끝에 그녀의 DNA도 발견되었고, 더 이상 도망칠 구석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자신은 절대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재산이 많고 상속자도 없는 지금, 굳이 왜 그를
죽여야만 하는가. 이대로 같이 살아도 안락한 생활은 보장되지 않나. 남편이 죽으면 그 재산을 전부 자신이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죽인다고 해도,
작품 내내 보여지는 어머니 이쿠미의 성격 상 오로지 돈이 목적인 것 같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살인자라면 굉장하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미코시바 레이가 잔인한 살인자가 된 것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물러받은 것인가. 악덕은 되물림되는가.
그런 괴물을 낳은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괴물을 그대로 괴물로 키운 건 부모니까. 하지만 정작 그 괴물이 고작 열네
살이었던 탓에 재판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어느 소년원에 들어갔고 결국 아무 죄도 묻지 못했다지 뭐요? 살해된 여자아이와 그 가족들만 딱할
따름이지. 그럼 적어도 범인 대신 부모가 책임을 지는 게 도리 아니겠소?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의 가장 큰 재미는 그와 검사 간의 법정 다툼이다. 검사가 내미는, 일견 불리해보이는 증거들을 이 변호사가
어떻게 하나하나 깨부수는가 지켜보는 재미가 아주 크다. 이번 [악덕의 윤무곡]에서도 이 변호사의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다고
할까. 여기에 과거 자신의 가족을 마주한 그의 고뇌가 더해진다. 물론 그는 부인한다. 이쿠미는 그저 의뢰인일 뿐이라고. 14년동안 같이 살던
시절에도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노라고. 하지만 그가 사건을 맡은 후 보이는 미세한 변화를 구사카베 요코가 감지한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고. 한 번도 진심을 토로하지 못한 미코시바 레이지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결국 무너졌다. 과거의 가족을 마주하고, 그 사건이 있은 후
부모님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고 난 후.
미코시바 레이지가 현실 인물이었다면 나도 당연히 그를 비난했을 것이다. 무서우니까. 인간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른 채 잔인하게
소녀를 살해한 것도 모자라 여기저기 전시하 듯 '배달'한 그를 감히 사람이라 지칭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이나미라는 은인을 만나 개과천선을
하고, 다른 사람이 알아주든 어떻든 자신만의 속죄의 길을 걷고 있다 해도 그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외계인같은 '생물'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돌아온 자'이기 때문이다. 악의 구렁텅이에 빠졌으나 다시 돌아와 다른 이들과 같은 일상을 보내는
사람으로서. 어떤 이는 그것을 철면피라거나 뻔뻔하다고 비난하겠지만, 그가 소설 속 인물인 이상, 그리고 그가 여전히 속죄라는 의자에 앉아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거두기란 힘든 일이다.
아이들을 낳은 후 범죄에에서 피해뿐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도 생각해보게 됐다. 그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이미 나란 인격은
형성되었고, 내가 가해자의 입장에 서게 될 일은 거의 없겠지만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 고의가 아니더라도 혹여 우연한 사고로라도 가해자가 된다면
나는 부모로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 부모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를 애지중지 키운다. 그렇게 키워도 누군가는
범죄자가 된다. 부모의 잘못은 아이가 죄를 저지르기 전이 아니라, 저지른 후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또 다른 상처를 만들 것인지, 그도 아니면 진실한 속죄의 길을 아이와 함께 걸어갈 것인지.
아버지의 자살 후 도망만 다녔던 어머니 이쿠미와 여동생 아즈사의 과거를 보면서 그들도 괴로웠을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부모로서의
결의는 부족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했다. 하지만 사건의 내막을 안 지금, 과연 부모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미코시바
레이지가 무너진 것은 당연. 냉철하게만 보였던 그의 가슴에 이제야 조금씩 따뜻한 심장의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온기가 지속될 것인지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그런 그가 앞으로 보여줄 활약은 더욱 대단할 것이다. 그러니 응원할 수밖에. 나카야마 시치리, 당신은 정녕 최고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