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p. 9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 에서 함께 읽는 도서로 선정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주년 특별판 시리즈의 두 번째 도서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기억상실증에 걸린 퇴역 탐정인 기 롤랑이라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사실 '기 롤랑'이라는 이름도 그의 실제 이름이 아니고, 그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뒤 그의 과거를 추적해달라고 일을 맡긴 탐정 위트가 지어준 이름이다. 지금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며 자신과 함께 일해달라는 부탁을 한 위트. 그와 함께 한 지 10년이 되었고, 기 롤랑이 기억을 잃은 지도 10년이 되었다. 위트가 탐정사무소를 정리하고 떠나면서 기 롤랑의 기억을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자신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므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되뇌이는 기 롤랑의 독백이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그가 과거의 한 조각을 붙잡기 위해 성큼 움직인다.

 

조금 아는 남자인 폴 소나쉬체에게서 '당신은 어느 시기엔가 내가 자주 만나곤 했던 어떤 사람의 측근이 분명하다고 여겨진다'라는 말을 듣고 그와 식사 약속을 잡은 기 롤랑. 소나쉬체가 그를 데려간 곳은 장 외르퇴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외르퇴르로부터 기 롤랑이 스티오파 드 자그리에프와 함께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그의 가족 중 한 사람이 사망한 장례식장 앞에서 스티오파를 기다린다. 결국 스티오파와 만나 그로부터 자신과 닮았다고 여겨지는 남자가 찍힌 사진을 건네받았다. 사진에는 자신과 닮았다고 여겨지는 남자 외에도 게이 오를로프라는 여자도 찍혀 있었는데 그녀는 이미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녀의 전남편과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또 그녀와 연결된 프레디 하워드 드 뤼즈와 알게 되고, 그의 자취를 찾아간 곳에서 그는 마침내 과거의 자신이라 여겨지는 한 남자의 상(像)과 조우한다. 드니즈라는 여자의 그림자와 함께.

 

때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마도 기 롤랑은 도미니카 대사관의 직원으로 일했으리라 추측된다. 드니즈와 함께 국격을 넘기 위한 시도를 계획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함정에 빠졌고, 드니즈를 잃었고, 그 혼자 다시 지금 있는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결심한다. 하나 남은 주소, 로마 가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 찾아가자고. 그 곳에서 그는 완전한 자신의 기억을 찾을 수 있을까. 작품이 이리 알쏭달쏭 끝을 맺기에 그가 기억을 되찾는지, 되찾는다 해도 전부인지 아니면 일부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위트는 '해변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을 그 예로 들어보이곤 했다. 그 남자는 사십 년 동안이나 바닷가나 수영장 가에서 여름 피서객들과 할 일 없는 부자들과 한담을 나누며 보냈다. 수천수만 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쪽 한구석에 서서 그는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룹 저 너머에 수영복을 입은 채 찍혀 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왜 그가 그곳에 사진 찍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어느 날 문득 사진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위트에게 감히 그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해변의 사나이'는 바로 나라고 생각했다. 하기야 그 말을 위트에게 했다 해도 그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해변의 사나이'들이며 '모래는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고 위트는 늘 말하곤 했다.

p75

퇴역 탐정이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기록하고 있지만 긴장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것보다는 오히려 쓸쓸함이나, 체념 같은 감정이 더 짙게 배어나오는 기분이다. 과연 이 작품의 끝이 어디에 가 닿을지 궁금해하면서 읽었지만 쉬이 읽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과거의 기억은 여전히 모호한 채 기 롤랑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파트릭 모디아노는 이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통해 '기억상실'로 상징되는 프랑스 현대사의 비극을, 나아가 인간존재의 '소멸된 자아 찾기'라는 보편적인 주제의식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프랑스 현대사의 비극에 대해서는 아마도 전쟁과 관련있을 것이라 추측되며, 인간존재의 '소멸된 자아찾기' 또한 알듯 모를 듯한 기분이다. 인용된 글을 여러 번 읽다보니 무언가 손에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지 않는 느낌. 우리는 모두 찰나에 지나지 않는 존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자신에 대한 기억을, 정체성을 이루는 자아를 갖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무(無)와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라고.

 

세계문학에 대해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여겨지는 지점이,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내 마음과 머리속에서 확실해지지 않는 메시지. 작가는 분명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만 나는 듣지 못하는 답답함. 예전이라면 그저 간단히 포기했겠지만, 이상하게도 이 책은 자꾸 읽게 된다. 그 메시지에 언젠가는 확답하겠다는 다짐이랄까. 다음 세계문학 작품의 작가는 과연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할까. 두렵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하는 복잡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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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디
코트니 서머스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시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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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졌지만 무심히 잊힌 여자들에 대한 반성이라는 문구가 큰 울림을 주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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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드 홈즈
전건우 지음 / 몽실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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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과 불면증으로 미소신경정신과에 다니며 상담을 받는 주부 공미리. 건조한 삶 속에서 남편도 아니고 자식도 아닌 병원의 박도진 선생만이 그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인물 중 하나다. 그녀에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친구같은 여인들이 셋 있었으니, 일흔을 코앞에 둔 광선슈퍼 주인 전지현, 남편이 경찰로 다이어트는 평생 하는 거라고 외치는 추경자, 대학에서 만난 선배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 박소희가 바로 공미리의 쉼터였다. 그들은 곰인형에 눈을 붙이는 작업을 하면서 수다도 떨고 신세한탄도 하면서 서로를 의지하는 사이. 그런 그들이 모여사는 광선주공아파트에 바바리맨이 나타났다! 어두운 귀갓길 혼자 있는 여성을 노려 자신의 성기를 보여주는 바바리맨의 이름은 일명 쥐방울. 탐정이 꿈이었던 공미리를 필두로 네 명은 주부탐정단을 조직하고, 피해자가 여성인만큼 경찰에게는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가 있을 거라며 앞장서서 쥐방울잡기에 나선다. 그런데, 아파트 내 쓰레기장에서 여성의 잘린 손목이 든 비닐봉투가 발견되고, 급기야 소희가 납치되면서 기피코 사건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국면으로 접어든다!

[밤의 이야기꾼들]을 읽고 '부디 팬으로 받아주세요!'를 외치게 만든 전건우 작가의 [살롱 드 홈즈]. 조금 무모하다 싶으면서도 가슴 속에 열정을 간직한 주부 네 명이 모여 주부탐정단을 조직했다. 남편들에게 무시당하고 그저 자식만 바라보며 어떻게든 버텨온 시간들. 이제 더는 이렇게 못살겠다! 지키고 있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온다. 대리만족이 엄청나다. 나에게도 이렇게 열정을 불사를 무언가가 있었던가. 게다가 죽음 앞에서도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고 범인과 대치하는 이 여성들이라니. 평소에는 수다를 떨고 속엣말을 털어놓으면서 의지하고, 이제는 주부탐정단으로 끈끈하게 결속되어 진한 우정을 나누는 이 여성들이 정말 부러웠다. 결혼하고 아이낳고보니 인간관계가 소박해진 나로서는 이런 만남들이, 이런 관계가 그립다.

한국추리소설계의 보물답게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추리소설을 많이 읽어본 독자라면 범인을 알아채기가 어렵지 않다. 똥눈을 가진 나도 '앗, 이 사람 뭔가 수상해!'라고 생각했더니 범인이었던 것이다! 앞서 읽은 [밤의 이야기꾼들] 보다는 조금은 덜 무서웠지만, 쥐방울같은 녀석들이, 여자를 납치해 살해하는 무서운 사람들이 어쩌면 우리 주위에서 멀쩡한 얼굴을 하고 돌아다닐 것을 생각하면 [밤의 이야기꾼들]과는 차원이 다른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남편으로 가면을 쓰고 있겠지. 작품 안에서 범인은 여자에게 접근할 때 치킨을 사가면서 딸과 통화하는 다정한 아빠를 연출한다. 실제로 범인이 저런 연극을 한다면 현실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경계심을 풀 것이다. 설마 자식이 있는 아빠가 비정한 살인마일 리 없다고 믿으니까. 하지만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범인들의 신상을 들어보면 누군가의 아빠인 경우가 참 많았던 것 같다. 추악하고 잔혹한 욕망 앞에서 전혀 가족에 대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 것이리라. 어쩌면 자신은 절대 잡히지 않을 것이라 자만하는 것일지도. 누군가의 친절을, 호감가는 인상을 이제는 의심하지 않고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다.

주부탐정단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어쨌거나 그들의 활약에 도움을 준 데다, 마지막에는 결정적 역할을 한 경비원 광규씨의 주부탐정단 가입을 열렬히 환영한다. 노모를 모시며 살다가 결혼 시기도 놓치고 이제 오십 줄에 들어선 광규씨. 너무 멋져요! 광선슈퍼가 아닌 '살롱 드 홈즈'에서 새롭게 시작될 그들의 활약을 기대한다! 제발, 속편 써주세요! 제발,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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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
마리즈 콩데 지음, 정혜용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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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아베나는 16**년의 어느 날, 바베이도스를 향해 항해중인 크라이스트 더 킹호의 갑판에서 영국인 선원에게 강간당했다. 그 폭력의 산물이 바로 티투바다. 몇 주 뒤 브리지타운 항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고, 아베나는 남자 두 명과 함께 다넬 데이비스라는 부유한 대농장주에게 팔려간다. 아베나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된 다넬 데이비스는 그녀를 살 때 함께 구입했던 아샨티 출신 노예 야오에게 그녀를 줘버리고 다시는 농장에 발을 들이지 말 것을 명령한다. 야오의 극진한 사랑으로 안정을 찾아간 아베나. 딸인 티투바를 볼 때마다 자신이 폭행당했던 날의 악몽을 떠올리며 아이를 멀리하지만, 결국 모성과 야오의 사랑 덕분에 티투바에게 애정을 쏟게 된다. 하지만 다넬 데이비스에게 강간의 위협을 당한 아베나가 그를 칼로 상처입히게 되고, 결국 아베나는 처형당하며 야오 또한 다른 주인에게 팔려가는 도중 혀를 깨물어 자살한다. 혼자 남은 티투바는 만 아야라는 늙은 여인에게 거두어지면서 그녀로부터 다양한 식물들의 사용법과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소환하는 기술 등을 배운다.

 

만 아야가 죽고 다시 홀로 남은 티투바. 사람들은 만 아야의 능력을 이어받은 그녀를 두려운 존재로 여긴다. 이 사실에 충격받은 티투바는 동족들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예들을 찾아 병든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의 기력을 북돋아주기 시작한다. 어느 날 존 인디언이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자유롭던 생활을 청산한 채 그가 주인으로 모시는 수재나 앤디콧 밑으로 들어갔다. 안타깝게도 수재나는 티투바를 멸시하고, 그녀를 마녀로 오인하며 계략을 세운다. 수재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작은 질병을 선사하지만, 그로 인해 수재나는 티투바와 존 인디언을, 푸르스름하고 차가운 눈동자에 뱀을 연상시키는 보스턴의 목사 새뮤얼 패리스에게 팔아버린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와 딸 벳시, 벳시의 사촌인 애비게일을 정성으로 돌보지만 어느 날부터 티투바를 보면 기절할 듯 소리지르며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아이들. 마녀로 몰려 감옥에 갇혀 처벌을 기다리는 티투바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마리즈 콩데는 스웨덴 한림원이 성 추문에 휩싸이게 되면서 수상자 선정이 불발로 끝났던 2018년, 그 대안으로 제정된 대안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세상에 단 한 번 만들어지고 단 한 번 수여된 뉴아카데미 문학상. 평생 흑인, 여성, 피식민지라는 삼중고를 짊어지고 꿋꿋하게 살아온 이 작가는 우리에게는 낯선 존재이나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대가이다. 그녀는 1937년 프랑스의 식민지 과들루프에서 은행가인 아버지와 최초의 흑인 교사인 어머니 밑에서 노예제도라는 말도 모를 정도로 과보호를 받으며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16세에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고나서야 프랑스인들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역사적, 사회적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는지 인식한다. 백인보다 더 백인답게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 그 동안 쌓아왔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새롭게 자신을 다져나가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이다. 첫사랑을 통해 '검둥이'라는 자의식을 확실히 깨닫게 된 콩데. 1960년부터 1973년까지 경제적 빈곤을 바탕으로 아프리카를 알아가는 경험을 거친다. 이 때의 경험으로 1976년 [에레마코농]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흑인, 여자, 가난한 미혼모가 아니었더라면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던 콩데의 삶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런 고난의 시간이 '작가'인 그녀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그런 그녀의 글이기에 사회적 약자와 폭력과 차별의 희생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낸다.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는 그런 콩데의 성향이 잘 녹아든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같은 인간임에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리저리 팔려다니고, 강간당하고, 노예로서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아프리카인들. 심지어 백인을 상처입혔다는 이유로, 그 경위는 따지지도 않고 재판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순식간에 나무에 목매달리는 존재들. 이 작품은 1692년 보스턴 근교의 세일럼 마을 전체를 마녀 사냥의 광란으로 몰아넣으며 무고한 희생자를 양산한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티투바가 감옥에 갇힌 후의 자세한 경위도 알 수 없었던 현실 세계에 콩데가 상상력을 불어넣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자신의 욕망에 당당한 진보적인 한 여성을 만들어냈다.

 

같은 인간이지만 흑인들이 떠안아야했던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작품 안에서 존 인디언은 살아있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티투바에게 여러 번 말하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즐기고 싶었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에 당당하고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드러내고 싶었다. 흑인이기에, 여성이기에 그녀가 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한정짓는 것은 백인, 그리고 남자들. 그 한계를 뛰어넘은 티투바의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삶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풍미를 지닌 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티투바. 자신의 존엄은 먼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자신의 한계를 결정할 수 있는 타인은 아무도 존재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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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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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어록을 줄줄 외울 정도로 혁명 사상이 투철하며 요리 잘하는 취사병으로서 인민해방군의 모범 병사로 불리는 우다왕. 그의 목표는 오로지 간부가 되어 시골에 있는 아내와 아들의 호적을 시내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사단장의 전속 요리사로 임명되어 그의 부엌을 돌보게 된 우다왕은 '묻지 말아야 할 것은 묻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으며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않는' 자세를 고수하며 오로지 맡은 바 임무를 해내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런 그의 모습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연심을 품게 된 사단장의 아내 류렌. 어느 날 사단장이 두 달간 부대를 더욱 정예화하고 행정조직을 간소화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하는 중요한 회의에 두 달간 참석하기 위해 집을 비우면서 류렌의 적극적인 유혹이 시작된다. 마오쩌둥이 내세운 혁명의 모토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새겨진 나무팻말이 제자리에 없을 때는 자신이 볼 일이 있어 찾는다는 뜻이니 위층으로 올라오도록 명령한 류렌. 그리고 마침내 자리를 이탈한 나무팻말. 우다왕은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침실 문을 두드리고, 류렌은 우다왕에게 자신에게도 성과 애정의 봉사를 해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시작된 그들의 짧은 인연.

 

2005년 봄, 중국 광둥성 격월간 문예지 [화청(花城)]3월호에 장편소설 한 편이 상당 부분 삭제된 채 발표된다. 중국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어느 군부대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그러나 이미 많은 부분을 사전에 걸러냈음에도 발간되자마자 중앙선전부의 긴급 명령으로 초판 3만 부가 전량 회수 및 폐기되고, 향후 출판 및 홍보, 게재, 비평, 각색을 할 수 없는 이른바 ‘5금(禁) 조치’를 당하게 된다. 중국 문단은 발칵 뒤집혔고 문예계는 거세게 저항했지만 당국은 요지부동이었다. 이 소설은 그렇게 조용히 사라지는 듯했으나 예상치 못한 환경에서 이 작품은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수많은 중화권 독자들이 온라인을 통해 해적판을 돌려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의 과잉 탄압은 오히려 독자들의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작품은 중화권은 물론 해외 독자들 사이에서도 반드시 읽어야 할 문제작이 되었다. 그렇게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는 21세기 중국 문단 최고의 화제작이자 비공식 베스트셀러로 떠올랐으며, 해외에서도 10여 개국에 소개되어 세계 문학계의 찬사를 받았다.

 

파격적이고 시적인 성애 묘사로 논란의 중심에 놓였던 이 작품이 당국으로부터 금서 조치까지 받은 이유는 마오쩌둥이 내세운 혁명의 모토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의 언어로 전락시킴으로써 혁명 전통을 희화화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작품 안에서는 마오쩌둥의 전신 석고상이 박살나는 장면, 류렌이 그의 초상화를 찢어 발로 짓밟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중국 사회에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한마디는 혁명 언어의 경전이자 무소불위의 금언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이 언어를 인간의 욕망으로 해체함으로써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개개인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근원을 확인하고자 했다고 전해진다.

 

[연월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옌렌커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이번이 3판이다. 아주 오래 전 출간되었을 때는 단순히 성애 묘사 소설인 줄만 알았고, 이렇게 깊은 메시지가 담겨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연월일]에서 매혹되었던 그의 시적인 묘사는 이 작품에서도 역시 빛을 발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순간 불꽃 같았던 연심. 과연 류렌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성기능에 장애가 있으면서도 혁명정신으로 똘똘 뭉쳐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 남편에 대한 복수? 단순한 외로움 달래기? 서로 사랑한다 생각했지만 마지막에 보이는 여자의 결심은 단호하다.

 

중국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작품이다. 마오쩌둥과 혁명에 대해 나는 거의 모르는 상태로 류렌의 심리와 작가의 문장에 집중하며 책을 읽었다. 모두가 혁명과 충성이라는 기치 아래 앞을 향해 달려가는 그 시대에서 여자는, 개인으로서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을까. 어려우면서도 아름다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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