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
마리즈 콩데 지음, 정혜용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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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아베나는 16**년의 어느 날, 바베이도스를 향해 항해중인 크라이스트 더 킹호의 갑판에서 영국인 선원에게 강간당했다. 그 폭력의 산물이 바로 티투바다. 몇 주 뒤 브리지타운 항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고, 아베나는 남자 두 명과 함께 다넬 데이비스라는 부유한 대농장주에게 팔려간다. 아베나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된 다넬 데이비스는 그녀를 살 때 함께 구입했던 아샨티 출신 노예 야오에게 그녀를 줘버리고 다시는 농장에 발을 들이지 말 것을 명령한다. 야오의 극진한 사랑으로 안정을 찾아간 아베나. 딸인 티투바를 볼 때마다 자신이 폭행당했던 날의 악몽을 떠올리며 아이를 멀리하지만, 결국 모성과 야오의 사랑 덕분에 티투바에게 애정을 쏟게 된다. 하지만 다넬 데이비스에게 강간의 위협을 당한 아베나가 그를 칼로 상처입히게 되고, 결국 아베나는 처형당하며 야오 또한 다른 주인에게 팔려가는 도중 혀를 깨물어 자살한다. 혼자 남은 티투바는 만 아야라는 늙은 여인에게 거두어지면서 그녀로부터 다양한 식물들의 사용법과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소환하는 기술 등을 배운다.

 

만 아야가 죽고 다시 홀로 남은 티투바. 사람들은 만 아야의 능력을 이어받은 그녀를 두려운 존재로 여긴다. 이 사실에 충격받은 티투바는 동족들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예들을 찾아 병든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의 기력을 북돋아주기 시작한다. 어느 날 존 인디언이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자유롭던 생활을 청산한 채 그가 주인으로 모시는 수재나 앤디콧 밑으로 들어갔다. 안타깝게도 수재나는 티투바를 멸시하고, 그녀를 마녀로 오인하며 계략을 세운다. 수재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작은 질병을 선사하지만, 그로 인해 수재나는 티투바와 존 인디언을, 푸르스름하고 차가운 눈동자에 뱀을 연상시키는 보스턴의 목사 새뮤얼 패리스에게 팔아버린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와 딸 벳시, 벳시의 사촌인 애비게일을 정성으로 돌보지만 어느 날부터 티투바를 보면 기절할 듯 소리지르며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아이들. 마녀로 몰려 감옥에 갇혀 처벌을 기다리는 티투바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마리즈 콩데는 스웨덴 한림원이 성 추문에 휩싸이게 되면서 수상자 선정이 불발로 끝났던 2018년, 그 대안으로 제정된 대안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세상에 단 한 번 만들어지고 단 한 번 수여된 뉴아카데미 문학상. 평생 흑인, 여성, 피식민지라는 삼중고를 짊어지고 꿋꿋하게 살아온 이 작가는 우리에게는 낯선 존재이나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대가이다. 그녀는 1937년 프랑스의 식민지 과들루프에서 은행가인 아버지와 최초의 흑인 교사인 어머니 밑에서 노예제도라는 말도 모를 정도로 과보호를 받으며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16세에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고나서야 프랑스인들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역사적, 사회적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는지 인식한다. 백인보다 더 백인답게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 그 동안 쌓아왔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새롭게 자신을 다져나가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이다. 첫사랑을 통해 '검둥이'라는 자의식을 확실히 깨닫게 된 콩데. 1960년부터 1973년까지 경제적 빈곤을 바탕으로 아프리카를 알아가는 경험을 거친다. 이 때의 경험으로 1976년 [에레마코농]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흑인, 여자, 가난한 미혼모가 아니었더라면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던 콩데의 삶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런 고난의 시간이 '작가'인 그녀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그런 그녀의 글이기에 사회적 약자와 폭력과 차별의 희생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낸다.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는 그런 콩데의 성향이 잘 녹아든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같은 인간임에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리저리 팔려다니고, 강간당하고, 노예로서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아프리카인들. 심지어 백인을 상처입혔다는 이유로, 그 경위는 따지지도 않고 재판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순식간에 나무에 목매달리는 존재들. 이 작품은 1692년 보스턴 근교의 세일럼 마을 전체를 마녀 사냥의 광란으로 몰아넣으며 무고한 희생자를 양산한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티투바가 감옥에 갇힌 후의 자세한 경위도 알 수 없었던 현실 세계에 콩데가 상상력을 불어넣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자신의 욕망에 당당한 진보적인 한 여성을 만들어냈다.

 

같은 인간이지만 흑인들이 떠안아야했던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작품 안에서 존 인디언은 살아있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티투바에게 여러 번 말하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즐기고 싶었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에 당당하고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드러내고 싶었다. 흑인이기에, 여성이기에 그녀가 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한정짓는 것은 백인, 그리고 남자들. 그 한계를 뛰어넘은 티투바의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삶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풍미를 지닌 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티투바. 자신의 존엄은 먼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자신의 한계를 결정할 수 있는 타인은 아무도 존재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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