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메이르 - 빛으로 가득 찬 델프트의 작은 방 클래식 클라우드 21
전원경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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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21번째 거장은 내가 가장 사랑해 마지 않는 화가 '페르메이르'. 그의 작품을 따라 걸음을 옮긴 저자 전원경님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감흥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우리가 희미한 과거를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면, 그 모습은 아마도 빛으로 가득 찬 델프트의 작은 방이 보여주는 세계와 엇비슷할 것이다. 한때 우리는 그토록 맑고 온화하며 신실한 세계에 속해 있었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에서 우리가 받는 인상, <진주 귀고리 소녀>나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이 주는 깊은 아름다움과 아련한 슬픔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이제 다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지나간 날들에 대한 우리의 영원한 그리움이다.

p276

10여 년 전, 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와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보고 나는 아주 완전히 이 그림과 페르메이르에 빠져버렸다. 명화 보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로워 관련 서적을 읽기는 했지만 지식적인 부분에서는 문외한인 나에게, '추천한다면 이 화가' 같은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그날부터 나의 원픽. '왜 이 화가야? 같은 질문을 들어도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끙끙대기만 했는데, 이번에 [페르메이르] 를 읽으면서 눈에 들어온 전원경님의 저 문장들로 확실히 알았다. 옛 것을 좋아하고 흘러간 시간과 발자취에 대한 로망이 한가득이었던 나와 페르메이르는 찰떡궁합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페르메이르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1632년 델프트에서 태어나 1675년 사망한 그는 40년 조금 넘는 생애를 살았고 대부분의 삶을 델프트에서 보냈다. 델프트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지만 17세기에 존재했던 수천 명의 화가들 속에서 그리 유명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소수의 특권층이 존재하지 않았던 17세기 네덜란드의 권력은 시민계급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그림들은 자연히 시민들의 기호에 맞춰 그려졌는데, 덕분에 당대 유럽의 다른 화가들이 주로 그린 종교화 대신 풍속화, 정물화, 초상화, 트로니 등 새로운 주제를 담은 그림들이 넘쳐났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내 카타리나와 만나 결혼하고 (살아남은) 열 한명의 아이를 보살피며 그림을 그려 생활을 유지했던 페르메이르. 처가의 경제적 형편이 넉넉했던 덕분에 값비싼 재료를 사용하고 느린 속도로 그림을 완성해도 생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지만 말년의 그는 곤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후 아내 카타리나는 파산 신청을 했고,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팔아 얼마 간의 빚을 갚아나가면서 그의 작품이 전 세계로 퍼지며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다. 그의 작품은 30여점 정도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대에 같이 활동했던 렘브란트가 2,000점의 작품을 남긴 것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전원경님은 일단 2019년 초 일본의 오사카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페르메이르전에서 그의 전작을 통틀어 가장 큰 작품인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온 예수>와 <뚜쟁이>를 비롯한 여섯 작품을 관람한 후 네덜란드로 발걸음을 옮긴다. 페르메이르가 평생을 보낸 델프트에서 그의 자취를 느끼고,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국립미술관으로 이동해 <우유를 따르는 하녀>, <골목길>,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연애편지> 를 만났다, '북구의 모나리자'라 불리는 <진주 귀고리 소녀>가 전시되어 있는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이스를 거쳐 1668년 완성한 <회화의 기술>을 보유한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한 후 그의 말년을 더듬으며 런던에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빛의 섬세하고 미묘한 사용에 집중했고, 이러한 개성을 강조하기 위해 공간을 비웠으며 등장인물의 수를 최소화했던 페르메이르 그림의 특징들. 빛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쓰이는 열린 창과 전체적으로 약간 어두운 공간, 페르메이르 그림에 늘 등장하는 친밀함과 고요함, 은은하게 흐르는 시적인 정서들에 대해 차분히 설명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림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그림, 그림이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 다양한 해석들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그림에 대한 저자의 자세한 해석은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한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대표작가 100인이 '내 인생의 거장'을 찾아 12개국 154개 도시에서 불러내는 꿈결같은 이야기다. 철학, 문학, 화가, 음악가 등 다양한 분야의 거장을 아우르는 이 시리즈에 대한 감동은 이번 [페르메이르]를 통해 정점을 찍었다. <진주 귀고리 소녀> 가 어째서 이렇게 사람들을 매혹시키는지, 페르메이르의 수수께끼같은 생애 속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다면 부디 이번 책을 놓치지 마시라. 이 세상과 안녕하기 전에 꼭 한 번은 나도 네덜란드에 가서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직접 감상해야겠다.

예술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큰 이유는 그 예술 작품이 영원히 간직하고픈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에는 바로 그러한 부분, 아스라하게 사라져가는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는 부분이 있다.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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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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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버린 남편과의 관계에 괴로워하는 칼라. 그녀가 애정을 쏟으며 돌보았던 염소 플로러마저 실종(?)된 상황에서 이웃에 사는 실비아가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세상을 떠난 실비아의 남편과 관련하여 불순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남편과 킬킬대며 웃었던 칼라의 모습은 조금도 상상하지 못한 채, 그녀의 젊음과 싱그러움에 실비아는 매력을 느꼈다. 남편을 떠나기를 소망하는 칼라를 돕기 위해 실비아는 친구에게 부탁해 거처까지 마련해주지만, 결국 칼라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실비아의 집 문을 두드리는 칼라의 남편 클라크. 다시는 자신들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며 으르렁거리는 클라크와 상황을 수습하려는 실비아 앞에 갑자기 나타난 플로러. 생각지도 못한 극의 전개와 결말이 잠시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집을 읽는 것은 이번이 다섯 권째.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녀의 작품에는 별다른 사건이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생활의 한조각을 뚝 떼어 그 장면을 묘사해놓은 것 같은 그녀의 작품은, 그러나 비루한 내 문장들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매력을 발산한다. 이 작품집의 표제작인 <런어웨이>또한 그러하다. 이렇게 단순하게 줄거리를 소개해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일, 평범한 일상을 단조롭게 서술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녀의 문장 하나하나를 읽다보면 어느 새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런어웨이>를 읽고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결말 때문이었다. 돌아온 플로러를 당연히 집으로 데려가 아내에게 보여주고 기쁘게 해 줄 것이라 믿었는데, 어째서인지 작품 속 플로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 하다. 클라크는, 칼라가 애정을 쏟았던 플로러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었나. 그래서 칼라에게 그토록 무정하게 대했나. 그런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을 부끄럽다 여긴 것일까. 스릴러 같은 면모를 보이며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단편.

 

이번 작품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우연>, <머지않아>, <침묵>이었다. 세 편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줄리엣.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와 인연을 맺는 그녀의 삶이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 소박하면서도 정제된 문장으로 펼쳐진다. 지금까지 읽은 작품들 중에서는 보지 못했던 형식이라 신선하게 다가왔는데, <침묵> 이라는 작품은 다소 충격이었다. 갑자기 소식을 끊은 딸 퍼넬러피. 우리나라 정서라면 울고불고 난리치며 딸의 행방을 좇고, 딸을 만났다는 딸의 친구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든 수소문해 아이를 만나러 가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대체 이유가 뭐냐-라며 묻고 따지는 과정이 반드시 뒤따랐을텐데. 어째서인지 줄리엣은 그런 퍼넬러피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언젠가는 딸이 소식을 전할 거라며 기다리기로 한다. 내가 제대로 읽은 것이 맞는가-싶을 정도의 쇼크. 두 눈을 비비고 재차 읽어봐도 퍼넬러피가 줄리엣과 만나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있지 않다. 게다가 그것을 조용히 수용하는 줄리엣. 체념인가. 아니 체념은 아니었다. 작품 말미에 강요하지는 않지만 연락을 기다린다는 표현이 나와 있으므로. 허 참. 알다가도 모를 앨리슨 먼로의 작품세계라고 할까나.

 

그 동안 읽은 작가의 작품 분위기와 가장 비슷하다고 느낀 것은 <열정>이었다. 사귀고 있는 남자의 형과 순간의 일탈을 즐기고, 애인에게 그것 또한 자신의 결정이었음을 통보하는 그레이스.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난 남자와 잠자리를 갖고, 극단에서 만난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위해 가족을 버렸던 여성의 모습을 그려왔던 앨리스 먼로. 곰곰이 생각해본다. 작가는 과연 그런 여자들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자유와 도피, 열정과 일탈. 인생에 있어 큰 사건이라 불릴만한 에피소드들임에도, 작가는 잔잔하고 평화롭게 장면들을 묘사한다. 겉에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 그리고 그 일상 속에 숨어있는 미스터리와 상황의 의외성. 나는 왜 그녀의 작품을 읽는 것을 멈출 수 없는가. 무엇이 나를 이토록 끌어당기는가. <앨리스 먼로 컬렉션> 도 이제 단 한 작품집이 남았다.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읽으면서는 이 의문에 대해 답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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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런트 브레스 - 당신은 어떤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미나미 교코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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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의과대학병원 종합진료과에서 근무하는 미토 린코는 어느 날 오코치 교수로부터 계열 병원으로 나가주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열심히 한다고는 했지만 평소 업무 속도가 느린 것에 대해 주변으로부터 불만을 들어왔고, 많은 여성 의사들이 결혼이나 출산 후 의국의 가혹한 체제를 견디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며 어느 병원이냐고 묻는 그녀에게, 오코치 교수는 '무사시 방문클리닉'이라는 이름을 올린다. 재택의료를 담당하는 곳으로 고령의 환자나 병원에서 치료를 계속하지 않고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한 진료소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향한 진료소에서 만난 다양한 환자들. 뇌경색으로 쓰러져 지금은 움직이기는 커녕 음식을 삼킬 수조차 없이 마냥 누워만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해 환자들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걷는 린코. 지금까지 죽어가는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녀와 환자들이 전하는 가슴 따뜻하고 애잔한 이야기들이 코 끝을 찡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의사는 투쟁을 멈추는 것을 패배라고 오해한다. 그런데 투쟁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조만간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때 요구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의료이다. 죽기 전 남은 시간에 누긋하게 곁을 지켜주는 치료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나는 체험으로 깨달았다.

p319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과 의사, 치료는 환자를 살리기 위한 것으로 생각한다. 최종목표는 살아남는 것. 그 과정이야 어떻든 일단 생존하는 것이 최우선과제인 것이다. 린코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유방암으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아야코는 날카롭게 질문한다. '포기하지 않는 게 절대적으로 좋다고 보증할 수 있어요?'라고. 신약을 시험해 볼 기회를 마다하고 퇴원해 자택에서 지내는 아야코는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채 부작용의 고통을 감당하지 않겠노라 당당히 선언한다. 죽음을 앞둔 그녀 앞에서 린코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야코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 뿐. 선천적으로 근육이 서서히 쇠퇴하는 병을 가진 아마노 다모쓰, 이제 자신은 여한이 없다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기를 원하는 후미에, 여러 장애를 보이는 말 못하는 소녀, 의국의 전설이라 불렸던 의사 등을 돌보며 린코는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고칠 생각밖에 없는 의사는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 환자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려. 그렇다고 환자를 방치할 수도 없으니 어영부영 치료를 질질 끌다가 결국 병원 침상에서 고통만 안겨 주는 상황이 되지. 이건 환자에게나 가족에게나 정말 불행한 일이야.

p288

[사일런트 브레스]는 자신이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지, 그리고 소중한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편하게 세상을 떠나고 싶었던 후미에를 이용해 결국은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녀의 아들, 오랜 시간의 간병을 견디다 못해 결국 아들을 포기하고 마는 어떤 엄마의 모습을 비난하는 것은 쉽지만 과연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었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린코는 환자들을 통해 배운 것을 아버지와의 이별에 적용하며 의사로서, 한 인간으로서 한단계 도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되뇌이게 하는 작품.

 

작가의 이력이 매우매우 독특하다. 남편의 전근으로 영국 현지에서 출산과 육아를 병행하다가 의사와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자 홀로 공부를 시작하고, 결국 33세에 대학 의학부에 입학, 38세에 졸업하여 대학병원에서 근무했다. 자신의 의료경험을 소설로 쓰고 싶다는 생각에 낮에는 근무하고 밤에는 습작을 계속하여 55세라는 나이에 드디어 작가로 데뷔하는 쾌거를 이룬다. '인간승리'라 부를만한 작가의 이력이 작품의 선전에 도움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런 이력이 아니었어도 이 작품은 분명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 과하지 않게 흐르는 감동, 삶과 죽음에 대해 숙고하게 만드는 철학적인 메시지까지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로 가득찬 소설이다. 처음에는 에세이인 줄 알고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 읽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 출판사 북스피어, 마포 김사장님의 안목을 칭찬해 드리고 싶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조만간 또 만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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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노래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1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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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에 죽은 형 강영호의 유품을 정리하던 강상호는 형의 방에서 여러 장의 사진이 제목에 따라 분류되어 있는 두툼한 파일북 한 권을 발견한다. 그 속에 정리되어 있던 천산에 꼭대기에 집을 짓고 사람들이 생활하던 헤브론성에 대한 자료들. '한국의 오지 여행' 정도로 콘셉트를 잡고 진행되어 가던 형의 원고와 사진들을 바탕으로 출판사 관계자와 함께 답사를 떠난 강상호가, 헤브론성을 찾은 것은 답사 일정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 곳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부서진 채 방치되어 있는 돌집과 돌집 내부의 지하 공간, 지하방들에 가득 들어찬 글자들. 그 벽서들의 내용은 대부분 성경 구절들이었는데, 강영호의 유고집이 출간된 뒤 몇 달 후 대학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는 강사가 천산의 벽서와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한 권의 책을 비교하여 기독교 신문에 소개했다.

 

과거, 한 남자가 있었다. 박 중위라 불리던 남자는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군인으로 세상으로 돌아가면 유학을 떠날 잘 나가는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런 그가 복무하던 소년 후의 마을에서 후의 누이 연희를 만난다. 첫눈에 그녀에게 이끌린 박 중위는 연희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고, 열정을 담아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연희는 그런 그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는 고아인 채 아버지나 다름없는 삼촌 집에 얹혀 사는 자신과는 다른 배경을 가진 남자, 얼마 안 있어 제대하면 곧 이 마을을 떠날 남자. 연희는 한사코 그의 마음을 거부하지만 그 '아버지나 다름없는 삼촌'과 욕망으로 두 눈이 멀어버린 남자에 의해 능욕당하고 버려져 마을을 떠난다. 모든 상황을 또렷이 알지는 못했지만 연희의 실종과 박 중위가 연관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한 후는 비내리는 어느 밤, 박 중위를 칼로 찌르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천산을 올라 헤브론성의 '형제들'과 마주한다. 기도하고, 성경구절을 읽고, 성경을 필사하는 단조롭지만 온화한 생활. 그 생활 속에서 후는 마침내 자신의 진짜 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고 또 한 남자. 자신이 모시던 장군과 함께 세상 속에서 달리던 남자. 그는 자신의 어느 생일 날 아내가 선물로 준 선글라스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자신의 눈빛을 숨긴다. 그런 그를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읽던 아내가 죽음을 맞이하고, 그는 그제서야 아내가 마지막으로 전달하려던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자기 얼굴이 일그러지고 부서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지 않기 위해 거울을 외면하고 선글라스를 벗지 못했던 그, 한정효. 그는 이제 선글라스를 벗고 자신이 속해 있던 '이곳' 아닌 '저곳'에 속한 헤브론성에 들어온다. 겉에서 보기에는 감금이었으나 스스로 걸어들어갔으니 그것은 그에게 감금이 아닌, 오히려 원하던 삶에 가까웠을까.

 

이 모든 내용들은 앞서 등장한 교회사 강사 차동연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고 연락해 온, 전직 군인이었으나 이제 죽음을 앞둔 '장'의 이야기와 맞물려 등장한다. 성경에서 이복누이 다말을 폭력으로 얻은 암논, 그런 암논에게 복수하기 위해 2년을 기다렸던 압살롬을 보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후. 그는 압살롬이고자 했으나 제 안에 그릇된 욕망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자신도 암논이었음을 자각한다. 한정효 또한 아내의 죽음을 통해 그 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 위에서 자신의 얼굴이 짓이겨지고 일그러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 이대로는 안 된다고, 멈춰야 한다고 장군에게 제안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경고였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길 위에서 만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길 위에 자신을 올려놓아보라던 한정효. 그것이 자신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그의 말에 따라 이제 그 길을 후도 따라 걷는다. 결코 편치 않은 시간들, 고통과 오롯이 혼자인 시간들. 그들은 길 위에서 사람들의 냉대와 오해, 추기와 허기로 인해 고단했지만 그 고단함이 자신들의 더러움을 씻어주는 과정이라 믿었던 것 같다. 명확하게 손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알 것도 같았다. 길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걸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곳'의 부당함이 어쩔 수 없이 불러내는 '저곳'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곳'의 부당함으로 대표되는 욕망과 정치. 욕망의 페르소나로 등장하는 후와 정치의 페르소나로 등장하는 한정효는 성경을 거울 삼아 자신의 내부를 깊이 들여다보고 그것들을 벗어던지고자 한다. 통렬한 자기 비판과 자기 인식. '이곳'의 부당함을 벗고 '저곳'을 동경하며 넘어가길 원했던 마음이 남긴 것이 바로 천산의 '벽서', <지상의 노래>다. 다른 작품에서였다면 결말 부분에서 그저 후와 한정효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슬퍼했을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예상하지 않았지만, 마치 예상했던 듯한, 응당 그러해야 했을 것 같은 결말에 안심하면서 전율했던 것 같다.

 

이승우 작가의 작품이 쉬운 편은 아니라 하여 책을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조금 긴장했다. 문장이 단순하지는 않았다. 단순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가 의아해할만한 문장들이었다. 평소라면 이런 말장난같은 문장들에 진저리를 쳤을 터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승우 작가의 문장들에는 그저 몸과 마음을 모조리 맡겨버렸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것 같은 느낌도 좋았고, 마치 이 작품이 나에게 하나의 '거울'이 되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부추기는 것 같기도 했다. 삶은 무엇이고 나의 욕망은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 '이곳'의 부당함과 '저곳'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후와 한정효에게 성경이 그러했듯, [지상의 노래] 자체가 어쩐지 나에게 거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책과 마주했던 시간이 아주 좋았다.

거울을 들여다볼수록 형제는 거울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을 읽을수록 형제는 성경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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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 - 7인 7색 연작 에세이 <책장 위 고양이> 1집 책장 위 고양이 1
김민섭 외 지음, 북크루 기획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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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는 2020년 3월부터 5월까지 3개월간 ‘작가 초대 플랫폼 북크루’에서 진행한 ‘에세이 새벽 배송 서비스 [책장위고양이]’를 통해 주 7일 새벽 6시마다 구독자들의 메일함을 두드렸던 총 63편의 글을 모은 연작 에세이집이다. 김민섭, 김혼비, 남궁인, 문보영, 오은, 이은정, 정지우. 일곱 명의 에세이스트가 각각의 주제에 맞춰 자신들의 기억 속 편린들을 깔끔하고 재치있는 문장과 내용으로 풀어냈다. 사실 에세이를 그리 선호하지 않기도 하고, 이 일곱 명의 작가들 중 그나마 들어본 이름은 남궁인 작가님(책은 한 권도 읽어보지 않음) 뿐이라 과연 어떤 내용들일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름만 들었던 남궁인 작가님은 생각보다 똘끼(?!)가 있는 데다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신 듯한 느낌에 재미났다. 무엇보다 나에게 이런 아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의 글 속에 등장하는 어머니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글들이었다.

 

 

 

 

 

고양이, 작가, 친구, 방, 뿌팟퐁커리, 비, 결혼, 커피. 한 작가당 하나의 주제를 제시하고 그것에 맞춰 글을 쓰는 형식. 그저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첫 주제인 <고양이>에서 김민섭 작가님의 글에 심장을 강타당했다. 주말 점심, 운전을 하면서 돈가스 집으로 향하던 그는 교차로 중간에 상체만 일으킨 채 누워있는 고양이를 발견한다.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잠시 망설이는 사이 고양이를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다. 유턴을 해 다시 돌아가봤지만 고양이를 구할 수는 없게 된 상황. 조수석에 앉아있던 친구는 '아까 차를 세웠어야 했다'며 몇 번이나 그를 원망했고, 작가님은 뒤에 시내버스가 한 대 따라오고 있었으므로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변명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그의 가슴 한 켠에 자리잡은, 차마 구하지 못했던 고양이. 그 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자신의 인생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거라 여전히 자책하면서 인생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

                            

누구나 크고 작은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저마다의 회전교차로에 진입하게 된다. 20대의 내가 마주한 그 교차로는 아주 컸고 갈림길도 많았다. 그게 반드시 취업이나 진학으로의 길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태도라든가 지향을 선택하는 더욱 중요한 길이 있다. 거기에 어떻게 진입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응당 자기 자신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예를 들어 '고양이를 구한다든가' 하는 일을 한다면, 내가 가야 할 길로 들어설 수 있지 않을까.

p17

친구의 고양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적은 김혼비 작가님의 글도 아주 좋았다. 친구 D가 여행 간 사이 잠시 그의 고양이 토토를 맡아두었던 또 다른 친구. 뭔가에 화들짝 놀라 품 안에서 빠져나가 숲 속으로 사라진 그 고양이로 인해 여러 사람의 인생이 바뀔 위기에 처한다. D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고양이를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고 D를 만나러 간 그 친구는, 오히려 D가 건네는 위로의 말에 그만 눈물을 쏟고 만다. 자신의 고양이를 잃어버린 슬픔도 컸을텐데, 그 고양이를 잃어버린 죄책감으로 평생을 괴로워할 친구를 먼저 걱정하는 D.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온몸이 찌릿거릴 정도의 큰 감동과 멋진 이야기였다.

남는 건 모진 상처와 자괴뿐일 걸 알면서도 감정에 휩쓸려 파탄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란 얼마나 쉬운가. 그럼에도 절대 그 경계선을 넘지 않고 그 바깥에 단단하게 서서 호흡을 고르며 다른 걸 볼 줄 아는 사람이 있다. D는 그런 '어른'이었다.

p21

오늘 아침 첫째에게 또 독을 쏘고 만 나는, D와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며 결국 또 발버둥을 치고 있다.

 

작가에 관해 쓴 문보영 작가님의 글도 재미있었다. 어떤 사람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한 뭉치의 두툼한 원고 뭉치로 보일 때 일기를 쓴다는 그. 그런데 그 순간을 경계해야 한단다. 자신에게 연필을 잡게 할 때 이 충동에 적당히 대응하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연인 앞에서는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아도 뒤에서 연인에 대한 글을 쓰느라 대꾸도 잘 하지 못하는 웃픈 상황. 뒤이어 등장하는 한 문장에 그만 포복절도하고 말았다.

"왜 나랑 안 놀아" 왜 맨날 글만 써" 사랑하는 자가 항의한다.

"나는 더 본질적으로 너랑 놀고 있는데?" 따위의 말을 하는 쓰레기가 되는 일이 없길 빈다......

p66

재미난 이야기들이 한가득이라 다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키득키득 웃기도 하고, 마음을 치는 충격에 멍-해지기도 하고, 한 권의 책으로 다양한 감정을 경험했다. 에세이가 이리 재미있을 줄이야. 이야기 맛집, 다채로운 감정 맛집이다! [책장위고양이] 두 번째 프로젝트도 진행되기를, 또 새로운 글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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