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어웨이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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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버린 남편과의 관계에 괴로워하는 칼라. 그녀가 애정을 쏟으며 돌보았던 염소 플로러마저 실종(?)된 상황에서 이웃에 사는 실비아가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세상을 떠난 실비아의 남편과 관련하여 불순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남편과 킬킬대며 웃었던 칼라의 모습은 조금도 상상하지 못한 채, 그녀의 젊음과 싱그러움에 실비아는 매력을 느꼈다. 남편을 떠나기를 소망하는 칼라를 돕기 위해 실비아는 친구에게 부탁해 거처까지 마련해주지만, 결국 칼라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실비아의 집 문을 두드리는 칼라의 남편 클라크. 다시는 자신들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며 으르렁거리는 클라크와 상황을 수습하려는 실비아 앞에 갑자기 나타난 플로러. 생각지도 못한 극의 전개와 결말이 잠시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집을 읽는 것은 이번이 다섯 권째.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녀의 작품에는 별다른 사건이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생활의 한조각을 뚝 떼어 그 장면을 묘사해놓은 것 같은 그녀의 작품은, 그러나 비루한 내 문장들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매력을 발산한다. 이 작품집의 표제작인 <런어웨이>또한 그러하다. 이렇게 단순하게 줄거리를 소개해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일, 평범한 일상을 단조롭게 서술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녀의 문장 하나하나를 읽다보면 어느 새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런어웨이>를 읽고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결말 때문이었다. 돌아온 플로러를 당연히 집으로 데려가 아내에게 보여주고 기쁘게 해 줄 것이라 믿었는데, 어째서인지 작품 속 플로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 하다. 클라크는, 칼라가 애정을 쏟았던 플로러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었나. 그래서 칼라에게 그토록 무정하게 대했나. 그런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을 부끄럽다 여긴 것일까. 스릴러 같은 면모를 보이며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단편.

 

이번 작품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우연>, <머지않아>, <침묵>이었다. 세 편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줄리엣.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와 인연을 맺는 그녀의 삶이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 소박하면서도 정제된 문장으로 펼쳐진다. 지금까지 읽은 작품들 중에서는 보지 못했던 형식이라 신선하게 다가왔는데, <침묵> 이라는 작품은 다소 충격이었다. 갑자기 소식을 끊은 딸 퍼넬러피. 우리나라 정서라면 울고불고 난리치며 딸의 행방을 좇고, 딸을 만났다는 딸의 친구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든 수소문해 아이를 만나러 가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대체 이유가 뭐냐-라며 묻고 따지는 과정이 반드시 뒤따랐을텐데. 어째서인지 줄리엣은 그런 퍼넬러피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언젠가는 딸이 소식을 전할 거라며 기다리기로 한다. 내가 제대로 읽은 것이 맞는가-싶을 정도의 쇼크. 두 눈을 비비고 재차 읽어봐도 퍼넬러피가 줄리엣과 만나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있지 않다. 게다가 그것을 조용히 수용하는 줄리엣. 체념인가. 아니 체념은 아니었다. 작품 말미에 강요하지는 않지만 연락을 기다린다는 표현이 나와 있으므로. 허 참. 알다가도 모를 앨리슨 먼로의 작품세계라고 할까나.

 

그 동안 읽은 작가의 작품 분위기와 가장 비슷하다고 느낀 것은 <열정>이었다. 사귀고 있는 남자의 형과 순간의 일탈을 즐기고, 애인에게 그것 또한 자신의 결정이었음을 통보하는 그레이스.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난 남자와 잠자리를 갖고, 극단에서 만난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위해 가족을 버렸던 여성의 모습을 그려왔던 앨리스 먼로. 곰곰이 생각해본다. 작가는 과연 그런 여자들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자유와 도피, 열정과 일탈. 인생에 있어 큰 사건이라 불릴만한 에피소드들임에도, 작가는 잔잔하고 평화롭게 장면들을 묘사한다. 겉에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 그리고 그 일상 속에 숨어있는 미스터리와 상황의 의외성. 나는 왜 그녀의 작품을 읽는 것을 멈출 수 없는가. 무엇이 나를 이토록 끌어당기는가. <앨리스 먼로 컬렉션> 도 이제 단 한 작품집이 남았다.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읽으면서는 이 의문에 대해 답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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