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망다랭 2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송이 옮김 / 현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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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적인 문제로 미국으로 향한 안. 그 곳에서 그녀는 루이스 브로건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와의 헤어짐이 가슴 아플 정도로 자신의 모든 열정을 루이스에게 바치는 안의 모습은 전혀 예상 밖이라 더 진심으로 다가왔다고 할까. 프랑스의 뒤브레유 옆에서는 절제되고 정숙한 이미지로 그를 내조하는 이미지였던 그녀가, 루이스 앞에서는 그저 한 명의 여성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 누구도 진정한 자신을 알지는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헤어지면서도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프랑스에 돌아와서도 편지를 주고받던 그들이지만, 거듭되는 밀회와 시간의 흐름은 그들의 사랑도 퇴색시켜버린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루이스 앞에서 절망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안의 모습에서 냉철한 정신과 의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 잘못된 선택의 문턱에 서 있기까지 했으나 다시 새로운 희망을 기약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1권에서와는 많이 달라 보였다.

 

앙리는 결국 정치적 기로에서 자신만의 선택을 하게 되고, 그 선택으로 인해 혼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서게 된다. 그 와중에 앙리의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점점 자신을 놓아가는 폴, 뒤브레유의 딸인 나딘과의 관계, 배우인 조제트와의 불같은 열정 등 개인사도 복잡하기 그지없어지며 자신의 정체성과 글쓰기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자신의 이념을 내세우며 앙리에게 선택을 강요하거나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 자신만의 방법으로 전후 상황을 뛰어넘으려는 사람들,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탁한 정치적 물결 속에서 방황하는 다양한 지식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상을 둘러싼 진실한 삶의 문제를 묻는 작가의 날카로운 필력이 돋보인다.

 

[레 망다랭]은 원래 중국의 관료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특권층 지식인들을 폄하하여 칭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평화를 위하여 계급 없는 세상을 꿈꾸는 주인공들이 대의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도 하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히는 모습도 보여준다.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서보는 남자들과 이 남자들 때문에 울고 미쳐가는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평등한 유토피아를 꿈꾸고 나치의 만행과 소련의 강제수용소에 분노하는 남자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자들을 하위계급으로 분류하는 모습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자신만의 뛰어난 능력이 존재하는데도 앙리를 위해 10년이라는 세월을 그저 흘려보내기만 하고 오로지 사랑에 목매는 모습을 보이는 폴과, 한 개인으로서, 한 여성으로서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과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탐색하는 안이 프랑스에서도 그리고 미국의 루이스 앞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인상이 강하다. 프랑스에서는 뒤브레유에게 가려져서, 미국에서는 루이스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만으로 자신을 놓아버리는 모습을 통해, 마치 내가 안이 되어버린 듯 자존심이 무너져내린다.

 

때문에 도발적이고 매사 부정적이며 폭력적으로까지 보이는 나딘의 매력이 돋보였다. 너무나 어렸을 때 유대인인 연인을 잃고 염세적으로 변해버린 나딘은 폴이나 안과는 뚜렷이 다른 인물이다.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으려고 하며, 심지어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앙리마저 뻥! 차버릴 수 있는 통쾌한 면모를 지녔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폴을 한심해하고, 또다른 연인을 구하기 위해 위증까지 감행하는 앙리가, 연애에서만큼은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을 보이는 것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지켜보는 독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전후의 혼란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 방황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올바른 길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껴안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들을 지켜보며 실존주의 작품이란 이런 것인가, 그 맛을 느껴보았다. 철학과 사상의 사유의 시간에 빠져들었던 시간. 명료하고 간결한 문체가 작품 이해를 한결 도왔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이 작품을 계기로 2021년에는 보부아르의 다른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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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망다랭 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송이 옮김 / 현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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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종식되어감을 느끼는 프랑스 파리의 앙리 페롤에게 이 밤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1,000대의 비행기가 룬트슈테트의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벌어진 독일군의 패주, 그리고 이제는 떠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과 폴을 향한 예고이자 의지. 총살당할 위기에까지 처했었던 앙리에게 전쟁의 종식은 진짜 글을 쓰고,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기회였다. 고행의 4년, 타인들만을 돌보았던 4년에서 벗어나 포르투갈 여행이라는 새로운 문을 통해 전쟁 후의 세상을 그리는 그 옆에 연인 폴의 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폴을 향한 감정은 애정에서 동지애, 연민 같은 것으롤 바뀌었지만 폴의 앙리에 대한 집착과 열정은 여전히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온전한 자신을 찾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강력히 요구하는 앙리와, 그런 그에게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앙리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치는 폴. 제발 그 관계를 놓아버려, 너야말로 네 자신을 찾아-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나의 목소리는 폴에게 가닿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기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은, 그러나 변화하는 사회의 물결과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마냥 자신만을 앞세울 수는 없다.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레스푸아>를 발행하는 앙리도 마찬가지. 폴과의 인연을 정리하고 제대로 자신만의 글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시대는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그 어떤 정치적 성향도 따르지 않고 중도를 지향하는 앙리에게 요구되는 선택. 누군가는 미국을 옹호하고, 또 누군가는 소련을 지지하는 상황에서, 앙리는 자본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무시하지 못한 채, 절친한 관계인 뒤브레유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좌파이나 같은 좌파인 공산주의를 완벽히 따르지는 않는 S.R.L을 옹호하기로 결정한다.

 

뒤브레유의 아내이자 정신과 의사인 안은,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되돌아본다. '늘 다른 사람을 돌보기만 했던' 그녀. 잠시 일탈을 감행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정해진 그녀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늘 글을 써왔고 이제는 정치를 시작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해야했고, 유대인이었던 연인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공격하는 딸 나딘을 주시해야 했다. 뼈아픈 과거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모든 것이 전쟁 전과 똑같아질 거라고 생각한 순진한 믿음을 자책하며 이 시간에 자신의 자리는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지를 깊게 탐색해가는 여성, 안.

 

[레 망다랭] 1권에서는 전후 프랑스의 혼란스러운 양상과 함께 그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들의 모습, 여러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삶을 그린다. 자신만의 글쓰기와 이념 앞에서 흔들리는 앙리, 그런 앙리만을 바라본 세월을 포기하지 못한 채 이미 마음이 떠나버린 그를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폴, 뒤브레유와 안, <레스푸아>와 연관된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정치는 무엇이고 개인의 행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시한다. 전쟁 후의 새로운 세상, 무엇이든 가능할 거라 여겼던 사람들을 보기좋게 배신하며 이제는 '진정한' 삶의 문제에 봉착한 사람들. 그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2권에서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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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이, 혼자가 될 때까지
아사쿠라 아키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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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학생 세 명이 연달아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세 명 모두 2학년 A반과 B반의 중심이 되는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살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고, 그들의 유서에는 모두 '나는 교실에서 너무 큰 소리를 냈습니다. 조율되어야만 합니다. 안녕!' 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충격 때문인지 등교하지 않는 시라세 미즈키에게 한 번 찾아가 달라는 담임교사의 부탁에 그녀를 만나러 간 가키우치. 죽은 세 명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라는 미즈키의 말을 흘려들은 가키우치 앞에 정체불명의 인물로부터 이상한 편지가 도착한다. 자신은 현재 가키우치가 다니는 기타카에데 고등학교의 졸업생이고, 학교를 다니는 동안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그 능력을 가키우치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취인'이라 불리는 능력자들은 학교에 총 네 명이 있으며, 그들의 능력은 모두 다르다는 말을 행운의 편지쯤으로 치부하며 흘려들은 가키우치는, 우연한 기회에 그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에 사망한 학생들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제20회 본격미스터리 대상 후보작, 제73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후보작이었던 [교실이, 혼자가 될 때까지]는 교실 안 학생들의 관계를 계급으로 분류하는 '스쿨 카스트'를 도입하여 사건을 추적해나가는 추리소설이다. 여기에 초능력 대결과 두뇌 싸움까지 곁들여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긴장감을 자랑하며 학생들의 관계, 그 이면에 숨은 어두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굳이 설명하면 사회제도가 생겨나면 사람은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낳는 구조를 안게 되어 있다는 내용이야. 어떤 선후책을 마련하지 않는 이상 불평등은 계속 확대된다, 그리고 마침내 '왕'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하는, 그런 책이야.

p137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혼자인 시간을 아무리 갈망하더라도, 사회적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에 자신을 맞추고 싶지 않더라도, 어울려야 하는 때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도 누군가는 이로 인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자신의 무언가를 희생해가면서. 그런 밑바닥 감정이 존재하는 장소에서 '반 아이들 모두가 사이좋은 최고의 반'은 애초에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생의 그 어느 시기보다 예민하고 고민이 많은 때, 내 주변의 인간관계가 정말 제대로 형성되어 있는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친구들이라 명명된 사람들이 사실은 진짜가 아닌 가짜처럼 보여 괴로워할 수도 있다. 고민의 깊이가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이 깊다면 최악의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한다면, 글쎄. 범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겠지만 그 의도에 완벽히 동조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공감되는 무언가가 있다. 꼭 모두가 친하게 어울려야 하는 최고의 반이어야 하는 건가, 누군가의 혼자 있고 싶다는 마음을 배려해줄 수는 없는 건가, 애초에 누가 누구와 친하고 친하지 않고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 건가. 내 자신이 혼자 있는 시간을 소중히 하는 데다 인간관계에 그리 긍정적인 편이 아니기 때문인지 범인의 설명에 어느 정도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친한 최고의 반은 지구상에 존재할 수 없다. 그 안에서 어떤 이의 존재에 대해 호불호가 갈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 억지로 꿰어맞춘다고 해서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 쉽게 바뀐다거나, 나의 시간을 방해받는다는 분노가 쉽게 사그라들지는 않는다.

 

나는 어느 쪽이냐 한다면 가키우치 쪽에 가깝다. 혼자있고 싶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정도는 아니지만, 나의 시간을 방해한다면 그 발언하는 입을 다물게 하고 싶을 정도로 미워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역시 '항상' 혼자이고 싶지도 않을 것 같다는 아이러니한 마음.

나는 언덕을 내려갈 거야. 하지만 그게 각자 살아가거나 헤어지는 걸 의미하는 건 아냐. 우리는 서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때로는 편할 대로 언제라도 어깨를 빌려주면서 함께 걸어갈 수 있어. 힘들 때 손을 내밀어줘서 고마워. 이제 내가 너한테 보답할 차례니까 정말 힘들 때는 언제든지 말해.

p367

풋풋한 표지에 매료되어 가벼운 학원미스터리를 상상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어둡고 복잡한 문제에 봉착해버렸다. 나는 과연 어떤 인간인가.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런 본질적인 문제들이야말로 학원 미스터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본다. 제목인 '교실이, 혼자가 될 때까지'의 의미를 여러모로 추리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면서도, 그 깊은 의미에 충격도 받은, 인상적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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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부신 친구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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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지기 릴라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의 아들 리노로부터 연락을 받은 레누는 30년 전부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싶다고 이야기해 온 릴라의 이야기를 상기하면서, 이 친구가 말 그대로 66년의 삶을 통째로 지워버리려 한다고 생각한다. 릴라는 대체 어디로,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어느덧 과거의 시간 속에서 그녀의 발자취를 더듬는 레누.

 

 

릴라가 레누의 인생에 등장한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릴라는 못된 아이였다. 아이들이 누구나 조금씩 못된 구석을 가지고 있는 차원을 넘어서서, 정말로 언제나 못된 아이였다. 누구나 쉽게 죽고 다치는 그런 시대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일종의 축복이자 기적이자 지옥과 같은 것. 몸은 왜소하고 못된 릴라였지만 머리는 영리했고 근성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릴라에게, 레누는 곧 사로잡혀버린다. 이제 릴라가 삶이자 전부가 되어버린 세상. 똑똑하기는 했지만 릴라만큼은 아니었던 레누는 릴라에게 때로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도 쳐보지만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이렇게 성장시킨 것은 릴라와의 시간들이었음을.

 

 

비록 학교에 진학하지는 못했지만 학업에 대한 열정으로 혼자서도 공부를 계속하는 릴라, 그런 릴라를 우러러보면서도 때로는 그녀보다 우월감도 느끼고 싶었고 여자아이들의 관계에서 오는 특유의 질투심으로 한때는 멀리하고 싶기도 했지만 레누 주변의 그 어떤 사람도 릴라보다 더 대단하지도, 더 중요하지도 않았다. [작은 아씨들]을 함께 읽으며 유년시절의 꿈을 키웠고, 공포의 대상이었던 돈 아킬레 앞에 당당히 맞서서 유대도 맺었다. 평생의 라이벌이자 놓을 수 없는 상대. 이제 소녀들은 성장해서 여인의 몸을 갖게 됐고, 릴라는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며 스테파노와 결혼식을 올리지만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가시지 않는다.

 

 

나폴리의 열악한 마을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속에서 릴라와 레누의 변하지 않는 우정에 대해 그린 [나의 눈부신 친구]는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의 1편이다. 그저 한없이 좋기만 한 친구가 아니라 사랑과 미움, 질투와 연민 등이 어우러진 릴라와 레누의 관계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쿨함'은 찾아볼 수 없다. 삶의 끈적끈적함이 묻어나온다. 경제적 빈곤과 폭력이 일상화된 삶의 순간 속에서 아무리 긍지를 가진 여인이라 해도 자존감은 쉽게 무너져내린다. 스스로를 붙잡기 위해 레누가 선택한 것은 학업이었고, 릴라가 선택한 것은 결혼을 통한 부의 획득이었다. 둘 중 누구의 선택이 조금은 더 나았던 것일까. 휘청이는 결말에 2권이 기대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넌 공부를 계속하도록 해.

2년이면 고등학교를 졸업해. 그러면 끝이지.

아니. 절대로 멈추지 마. 필요한 돈은 내가 줄게. 넌 항상 공부해야 해.

고마워. 하지만 언젠가는 학교 공부를 마칠 수밖에 없어.

넌 아니야. 넌 내 눈부신 친구잖아. 너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해. 남녀를 통틀어서 말이야.

p416

당연히 릴라가 레누의 '눈부신 친구'일줄 알았는데, 릴라는 레누를 향해 '자신의 눈부신 친구'라고 이야기한다. 스스로를 공부밖에 할 줄 모르고 별 볼일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는 레누를, 릴라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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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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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부산을 거쳐 대마도로 향하는 저렴한 패키지여행의 관광버스 짐칸에서 어린 아이의 토막 시체가 발견된다. 처음부터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이던 김석일과 그의 아이 김도현. 다정한 아버지는 커녕 처음부터 무언가 석연치 않았던 그는 사라지고 아이만 남았다. 사건을 맡은 형사 박상하는 이번 사건을 통해 자신의 과거사를 다시 떠올리게 되고, 장애를 안게 된 아들 은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더욱 사건에 몰입한다. 이 와중에 김석일의 가정폭력을 피해 도망치듯 집을 떠났던 그의 전처 정지원이 아이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오고, 그녀에게 남모를 감정을 느끼는 박상하는 김석일과 정지원의 결혼생활에 무언가 비밀이 있었음을 짐작한다. 끔찍하고 잔혹한 사건 뒤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대체 무엇이 아이를 학대하고 죽이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그들을 몰아갔던 것일까.

 

가정폭력과 관련된 기사가 심심치 않게 매스컴을 오르내린다. 때리고 가방에 가두는 것은 물론, 아무 거리낌 없이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이야기들. 공포스러운 것은 그런 아동학대의 주범이 아이의 부모라는 사실이다. 태어난 아이를 아낌없이 사랑해주고 세상의 모든 풍파로부터 지키기 위해 발버둥을 쳐도 모자랄 부모라는 사람들이, 사실은 아이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이들을 때리고 학대하는 무서운 현실.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기 전까지는 부모 모두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들을 내려놓고 모든 신경을 아이에게 쏟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어쩌면 떠오를 생각 하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자유롭고 싶다-는 것. 대부부의 부모가 이런 생각들을 떠올려도 픽 웃으며 흘려보내는 것과 달리 누군가는 한 번 올라온 생각에 붙잡혀버린다. 급기야는 자신의 삶이 자유롭지 못하고 나의 삶이 짓눌리게 된 것은 이 아이 탓이라며 결국 모든 잘못을 아이에게 덮어씌워버리게 되는 것이다. 아이에게 향하는 폭력은 쉽다.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할 뿐더러, 엄마고 아빠니까 그래도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에 매달려 금방 그 죄를 용서해주니까.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나도 아이 때문에 산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 인생이 우선이지, 아이가 나보다 우선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할 거라고. 하지만 곰돌이 두 명을 돌보고 함께 뒹굴다보니 내가 얼마나 무책임한 생각을 했었는지 깨달았다. 부모라면 태어난 아이에게 책임이 있다. 아이가 태어난 뒤의 삶이 어떻든 그 아이가 커서 자신의 삶을 책임지게 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삶을 뒷전으로 미룰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부모로서의 숙명이다. 아니, 자신의 삶을 뒤로 미뤄둘 것도 없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 속에서 또다른 행복을 찾으면 된다.

 

하지만 한 가지. 박상하의 아내 채연희가 나약했기 때문에 아이를 향한 학대가 발생했다는 작가의 관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를 향한 폭력과 학대는 용납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어쩌면 모든 엄마들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의 병은 혼자서는 고칠 수 없고, 그 벼랑 끝에 선 엄마들에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커다란 차이일테니까.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가정 전체,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의 문제다.

 

내 아이이든 아니든 온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한다. 그것이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다. 아이러니하게도 잘 다듬어진 육아서가 아니라 이런 작품들을 통해 나의 육아를 되돌아보게 된다. 때리지는 않아도 나는 아이들을 잘 돌보고 있는 것인가. 오늘의 말 한 마디, 시선 하나가 혹여나 내 아이를 아프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것들도 정신적 학대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가. 쉽지 않다.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아서 이번 작품이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러니 더 응원한다. 나 스스로를, 그리고 지금도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듬고 있을 세상의 모든 부모들을.

 

** 출판사 <황금가지>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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