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 비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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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케이블에서 <루인스>라는 제목으로 방영되던 영화가 생각난다. 내가 본 장면은 유적지 같은 곳에서 매우 동양적으로 생긴 남자가 어떤 사람들에게 활을 겨누고 있던 장면이었는데,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얼른 채널을 돌려버렸다. 분명히 두 집단 간의 갈등으로 피가 튀게 되는 잔혹한 공포영화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무서운 것은 활을 겨누던 그들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즐거웠어야 할 여행. 웃고 떠들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미래를 향한 잠깐의 쉼표에 지나지 않았던 순간들이 이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렸음을, 그들은 과연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순간의 선택으로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되어 버린 것에 대해, 그들도 나도 운명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는 <사탄의 인형>에 나오던 처키가 제일 무서웠더랬다. 사악한 영혼이 들어간 인형이 지금도 내 침대 밑에서 앙증맞아야 할 손에 칼을 쥐고 두 눈을 희번득거리고 있을 생각에 매일 밤 두려움을 참으며 침대 밑을 살폈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가장 무서운 것은 어쩌면 그런 귀신들이 아니라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었지만, 이 책을 보면 우리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수 있는 미지의 생물들이 얼마나 많은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핑계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런 미지의 존재들에 대해 알면 알 수록 나의 도전감이나 모험심은 금새 꼬리를 내려버리고 만다. 언제 어디서 나도 그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지 모를 일이므로.

 

제프, 에이미, 에릭, 스테이시의 멕시코 휴가는 즐거웠다. 중간에 독일인 마티아스를 만나 취소되었던 난파선 잔해 구경도 할 수 있었고 유쾌한 그리스인 청년 세 명을 만나 말은 통하지 않아도 호탕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해수욕, 제트스키, 미니어처 골프에 맛있는 음식들과 한밤의 술파티. 자유로운 시간들은 마티아스가 그의 동생 헨리히를 찾는 데 도움을 달라며 끝을 맺는다. 그리스인 청년 두 명만 제외하고 그의 동생이 있다는 유적지로 길을 나선 그들 앞에 나타난 불안의 징조들, 택시 운전사의 기묘한 언행을 모두 무시하고 그들이 당도한 곳은 무시무시한 덩굴이 우글대는 폐허였다. 그들은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덩굴이 우글대는 언덕 아래에는 활과 총을 든 마야인들이 버티고 있을 뿐이다. 도움의 손길은, 없다.

 

작가가 내세운 공포는 두 가지. 첫 번째는 기묘한 식물들의 존재다. 그것들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생각도 할 줄 알고 사람들을 관찰할 줄도 알며 심지어 그들의 소리를 흉내내고 그들 사이를 이간질 시키기 위해 계략을 짜기도 한다. 만지면 즙이 나와 화상을 입히고 그들 전부를 순식간에 살점 하나 남지 않은 해골로 만들어버린다. 상처가 난 곳으로 파고 들어가 몸 안에서 기생하기도 하고 코와 입을 막아 질식시키기도 하는 무서운 생물.

 

주인공들은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너무나 강력한 번식력을 익히 알고 있던 마야인들은 그들이 그 언덕에서 한 발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막는다. 도망가려는 사람들의 목숨을 활과 총으로 빼앗으면서. 그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꾸 반복되는 그 일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 누군가를 죽이고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된 걸까. 그 일이 자신들의 마을과 세상을 지키는 일이므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 분위기가 너무나 숨막히고 갑갑해서 책을 읽던 내가 숨이 가빠질 정도였다.

 

두 번째는 그런 잔혹한 공간에 갇혀버린 제프와 에이미, 에릭과 스테이시의 관계와 개개인의 정신세계가 어떻게 붕괴되어가는지를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리더의 자질을 타고난 제프, 늘 불평불만만 제기하는 에이미, 상처를 입고 강박증에 시달리게 되는 에릭과 그나마 덤덤해 보이지만 공포에 사로잡힌 스테이시를 통해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 속에서 네 명의 개성적인 인물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그들의 심리는 어떠한지를 묘사한다. 네 명의 시선을 통해 전개되는 작품은 그래서 더 무섭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상상한 최고의 공포는 그런 상황 속에서 혼자만 살아남는 경우였다. 결국 그들은 모두 사라지고 스테이시 홀로 남는데 그녀가 텐트 바깥에 앉아 모두와 나누어 먹기로 한 음식을 전부 먹어치우는 장면이 가장 안타깝고 끔찍했다. -전부 다, 그녀는 전부 다 먹어치웠다-라는 문장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

 

구조를 기다리던, 정확하게는 남겨두고 온 그리스인 두 명이 자신들을 구해줄 거라 믿었던 그 믿음 그대로 전부가 사라진 후에 그들은 찾아온다. 앞서 5명이 밟았던 길을 그대로 따라서.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친구를 찾아 덩굴이 우글대는 언덕에 올라가 친구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있다. 공포는, 계속된다. 영화를 끝까지 보지 않고 채널을 돌리길 잘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 날 밤, 꿈에서 나는 그 덩굴들과 마야인들과 혼자 남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끝없이 허우적거려야 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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