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고 아름다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 제12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작
김슬기 지음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짜 힐링을 주는 동화같은 이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목숨전문점
강윤화 지음 / 실천문학사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 지상에 발 딛고 서 있지만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 회피가 아니다. 어떻게든 남은 삶을 이어가 보려고 치는 발버둥. 하지만 해피엔딩은 없다. 그래서, 마음이 쉽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강 스포. 긴 글 주의.
















얼마 전, 『닥터 지바고』를 읽었다. 내가 읽은 건 박형규 번역의 열린책들 2001년 판. 그런데 초반에 라라와 빠샤의 대화를 읽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빠샤는 라라와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냈고 라라보다 몇 살 어리지만 라라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라라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빠샤에게 결혼을 종용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라라는 빠샤에게 존댓말을 쓰고 빠샤는 라라에게 반말을 쓰는 것이다. 빠샤의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난 챗GPT에게 이 부분의 러시아 원문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고 챗GPT는 둘이 서로에게 같은 주어를 쓰고 있음을 확인해 줬다. 그래서 난 다른 번역자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궁금해졌고, 내가 구할 수 있는 – 내가 갈 수 있는 범위의 도서관에 소장된 – 책들의 몇몇 장면들의 라라의 어투를 확인했다.


라라는 주체적이고 주관적인, 중심이 단단한 사람이다. 당시 상황은 여성인 라라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혁명, 전쟁, 기근, 정치적 폭력,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사회적 제약 속에서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늘 불완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라는 자기자신이기를 포기한 적이 없다. 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 분명히 말하고,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표현한다. 선택지가 없더라도 선택하는 행위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힘든 현실에 무기력하게 굴복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냥 이상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이런 라라의 캐릭터를 각 판본의 역자들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각 장면은 내 선택에 따라 임의로 선정했고, 각 장면의 러시아어 원문을 확인하긴 했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고 내 러시아어 실력은 0(zero)이어서 GPT가 틀렸어도 정정할 길이 없으므로 생략한다.)


가. 열린책들. 박형규 역. 2001.

나. 열린책들. 홍대화 역. 2022.

다. 창비. 최종술 역. 2024.

라. 민음사. 김연경 역. 2019.


* 라라가 빠샤에게 빨리 결혼하자고 말하는 장면

가. “내 말을 들어 봐요, 빠뚤라.” 라라가 말했다. “난 곤경에 처해 있어요. 내가 헤어나올 수 있도록 도와줘요. 놀라지는 말고 묻지도 말아요.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과 같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가볍게 생각해서도 안 돼요. 나는 언제나 위험 속에 있어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파멸로부터 구해 주시려면, 연기하지 말고 곧 결혼해요.” “그거야말로 내가 항상 바라던 것 아니야.” 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곧 날을 정하도록 하지. 당신이 그렇게 원하다니 무척 기쁘군.(하략)”

- 상권. 134-135쪽


나. “들어봐, 파툴랴.” 라라가 말했다. “나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어. 거기서 벗어나도록 나를 도와줘야 해. 놀라지 말고 나에게 꼬치꼬치 캐묻지도 마. 하지만 우리가 모든 이와 같다는 생각은 말아 줘. 평온한 마음으로 있지도 말고. 나는 언제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어. 만일 자기가 나를 사랑하고 파멸에서 건지고 싶다면,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어서 결혼하자.”

“그건 내가 늘 바라던 일이야.” 그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얼른 날짜를 정하자. 당신이 원하는 날짜면 언제든 좋아. (하략)”

-상권. 154쪽


다. “내 말 들어봐, 빠뚤랴.” 라라가 말했다. “난 곤경에 처했어. 거기서 헤어나올 수 있게 날 도와줘야 해. 놀라지 말고 캐묻지도 마. 다만 우리가 남들과 같다는 생각은 버려야 해. 가만히 있지 마. 난 늘 위험에 처해 있어. 만약 네가 날 사랑하고 나를 파멸로부터 지키고 싶다면 미루지 마. 우리 빨리 결혼하자.”

“하지만 그건 내가 늘 바라던 거잖아.” 그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서 날을 잡자. 네가 원하는 날이면 언제라도 좋아. (하략)”

- 1권. 133쪽


라. “들어 봐, 파툴랴.” 라라가 말했다. “곤란한 일이 있어. 거기서 벗어나도록 나를 도와줬으면 해. 놀라지도 말고 캐묻지도 마,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과 같다는 생각은 버려. 계속 침착하게 굴어도 안 돼. 나는 항상 위험한 상태야. 네가 나를 사랑해서 파멸하지 않도록 지켜 주고 싶다면 미루지 말고 얼른 결혼하자.”

“ 하지만 그거야말로 내가 계속 바라던 일이잖아.” 그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얼른 날을 잡아 봐, 네가 원하는 날이면 나는 언제라도 좋아(하략).”

- 1권. 152쪽



* 라라가 권총 소동 후 빠샤에게 자신을 모른다고 말하는 장면

가. “난 나쁜 여자예요. 당신은 나를 몰라요. 언젠가 말해 드리겠어요. 당신도 보시다시피 눈물 때문에 목이 메어 말하기 어려워요. 날 단념하고 잊어 줘요. 난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 상권. 162쪽


나. “나는 나쁜 여자야. 당신은 나를 몰라. 언젠가는 당신에게 말해 줄게. 말하기 힘든 얘기야. 당신도 보다시피 난 눈물 때문에 목이 막혀. 나를 버려, 그리고 잊어, 난 자격이 없는 여자야.”

- 상권. 187쪽


다. “나는 나쁜 여자야. 너는 나를 몰라. 언젠가 말해 줄게. 보다시피 지금은 눈물에 목이 메어 말하기가 힘들어. 하지만 나를 버려, 잊어줘. 난 너한테 자격 없는 여자야.”

- 1권. 162쪽


라. “나는 나쁜 여자야. 너는 나를 몰라, 언젠가 얘기할게. 지금은 말하기가 힘들어, 보다시피 눈물 때문에 목이 메어. 하지만 나를 단념하고 잊어 줘, 나는 너를 만날 자격이 없는 몸이야.”

- 1권. 183쪽



* 빠샤의 입대 결정

가. “왜 당신은 나와 까쩬까를 버리는 거예요? 그건 안 돼요, 안 돼요! 아직도 늦지 않았어요. 내가 모든 일을 바로잡아 놓을게요. 당신은 의사에게 보이지도 않았잖아요. 당신 심장으로 부끄럽지도 않아요? 처자를 미친 짓거리의 희생물로 내던지다니, 부끄럽지 않느냔 말이에요? (중략) 빠샤, 당신을 누가 바꾸어 놓기라도 한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귀신이 들리기라도 한 거예요?”

- 상권. 184쪽


나. “이러지 마, 제발 하지 마! 아직 늦지 않았어. 내가 모든 걸 고칠게. 당신은 의사에게 가서 제대로 진찰도 받지 않았잖아. 당신 심장은 어쩔 건데? 부끄럽지도 않아? 무슨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에 가족더러 희생을 하라니, 부끄럽지도 않아? (중략) 파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당신을 못 알아보겠어! 사람이 바뀐 거야, 아니면 뭘 잘못 먹은 거야?”

- 상권, 211쪽


다. “나랑 까젠까를 버리고 가면 어떡해? 하지 마, 그러지 마! 아직 늦지 않았어. 내가 다 바로잡을 게. 그래, 당신은 신체검사도 제대로 받지 않았잖아. 당신 심장은? 마음을 바꾸는 게 창피하다고? 처자식을 미친 짓거리에 제물로 바치는 건 창피하지 않고? (중략) 빠샤, 당신을 모르겠어! 누가 당신을 바꿔치기한 거야, 아니면 뭘 잘못 먹었어?”

- 상권. 183쪽


라. “이러지 마, 제발! 아무 것도 늦지 않았어. 내가 모든 것을 바로잡을게. 게다가 의사에게 진찰도 제대로 안 받았잖아. 당신 심장 말이야. 부끄럽지? 가족을 광기의 희생양으로 만들다니, 부끄럽지도 않아? (중략) 파샤, 왜 그래, 너무 당신답지 않잖아! 누가 당신을 바꿔치기한 거야, 아니면 못 먹을 걸 먹은 거야?”

- 1권. 205-206쪽



* 라라와 유리의 야전 병원에서의 대화

가. “당신 왜 어제 노크하지 않으셨어요? 마드무아젤이 내게 말해 주었어요. 하지만 잘하셨어요. 그땐 벌써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들어오시라고 못했을 거거든요. 그건 그렇고, 어떠세요? 조심하세요. 더러워지지 않도록. 숯불이 튀어요.”

- 상권. 237쪽

“요즘 내가 얼마나 정직하고 보람되게 살기를 바라는지! 사로잡고 있는 모든 기쁨 한가운데에서 나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미지의 곳을 찾아 헤매는 듯한 당신의 신비스럽도록 슬픈 시선을 만났소. 그것이 없어서 나는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르오. 당신이 운명에 만족하고 어느 누구에게 바라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고 당신 얼굴에 씌어질 수 있다면 난 무엇이고 아낌없이 바칠 것이오. 당신과 가까운 어떤 사람, 친구라든가 남편(그 사람이 군인이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되는 분이 내 손을 붙잡고, 당신의 운명에 대해 애태우지 말고 관심을 보임으로써 당신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오. 그러면 난 손을 뿌리쳐 들어올리고는……, 아 내가 제정신이 아니군! 용서하시오, 제발.”

(중략)

“아, 이렇게 돌까 봐 얼마나 두려워했는데!” 중얼거리듯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이러지 마세요, 유리 안드레예비치, 이러면 안 돼요. 아유, 당신 때문에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나 좀 보세요!”

- 상권. 242-243쪽


나. “어제 왜 제 방문을 두드리지 않으셨어요? 제게 마드무아젤이 말씀해 주셨어요. 하지만 제대로 행동하신 게 맞아요. 전 이미 자리에 누웠기 때문에 선생님을 방에 들이지 않았을 거예요. 자, 안녕하세요.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이곳에 숯불이 튀거든요.”

- 상권. 273쪽

“당신이 운명에 만족한다고, 그리고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는 표정이 당신의 얼굴에 나타날 수 있다면 전 무엇이든 할 겁니다. 당신에게 가까운 사람, 당신의 친구나 남편이(만일 그 사람이 군인이라면 더 좋겠지요) 제 손을 붙잡고 당신의 운명을 걱정하지 말라고, 그 관심으로 당신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 부탁한다면…… 저는 손을 빼고 두 손을 털 겁니다.” (유리의 말)

(중략)

“아, 이렇게 될까 봐 늘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라요!” 그녀는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말했다. “이 무슨 숙명적인 망상이에요! 그만두세요, 유리 안드레예비치, 이러지 마세요.”

- 상권 279쪽


다. “왜 어제 문을 두드리지 않으셨어요? 마드무아젤이 말해줬어요. 하긴 잘하셨어요. 이미 잠자리에 들어서 당신을 들어오시게 하지 못했을 거에요. 그건 그렇고, 잘 지내셨어요? 조심하세요, 여기 탄가루를 흘려서 옷 버려요.”

- 상권 235쪽

“당신이 운명에 만족하고 누구한테서도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말이 당신 얼굴에 쓰일 수만 있다면 난 무엇이든 바칠 겁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가까운 어떤 사람이, 당신 친구나 남편이(그 사람이 군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내 손을 붙잡고 당신의 운명에 대해 애태우지 말라고, 내 관심으로 당신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도록 말이오. 그러면 나는 손사래를 치며…… 아, 내가 정신이 나갔군요! 용서하세요.”

(중략)

“아, 이렇게 될까 봐 늘 얼마나 두려웠는데!” 그녀가 혼잣말하듯 조용히 말했다. “이 무슨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인지! 그만두세요, 유리 안드레예비치, 이러면 안 돼요.”

- 상권 240쪽


라. “어제 왜 노크하지 않았어요? 마드무아젤이 말해 주더라고요. 하긴 잘한 거예요. 이미 잠자리에 들어서 당신을 들어오게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래, 안녕하세요. 조심해요, 옷에 묻어요. 여기 숯가루를 흘렸거든요.”

- 1권 265쪽

““최근에는 정말 정직하고 보람되게 살고 싶어 미치겠단 말이죠! 이 보편적인 생기의 일부가 되고 싶다고요! 그리고 모두를 사로잡은 기쁨 한가운데서 나는 천국인지 지옥인지 통 알 수 없는 곳을 헤매는, 수수께끼처럼 우울한 당신의 시선을 만났소. 그것이 없어지도록, 당신의 얼굴에 당신이 운명에 만족하고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 쓰이도록 할 수 있다면, 나는 뭐라도 내놓았을 거요. 당신과 가까운 사람, 친구든 남편이든(군인이라면 제일 좋겠지만) 아무나 내 손을 잡고 당신의 운명 따위는 걱정하지 말라고, 괜한 신경을 써서 당신에게 부담을 주지 말라고 부탁할 수 있다면 그러면 나는 손을 빼내고 손사래를 치고는…… 아휴, 내가 제정신이 아니군! 죄송합니다, 정말.”

(중략)

“아, 이렇게 될까 봐 항상 두려웠는데!” 그녀가 조용히 혼잣말처럼 말했다. “정말 치명적인 실수로군요! 그만해요, 유리 안드레예비치, 이러면 안 돼요.”

_ 1권 270-271쪽



* 라라와 유리의 재회

가. “언제 한번 찾아오셔서 도와주시지 않겠어요? 마룻바닥과 언저리에 난 틈을 함께 막았으면 좋겠는데, 어떠세요? 그럼,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시면서 현관에서 기다리세요. 오래 걸리지 않으니. 곧 당신을 부르겠어요.”

(중략)

“지바고 씨!”

- 하권. 489쪽


나. “혹시 언제 한번 들러서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함께 바닥에 널빤지를 박는 건요. 어떠세요? 층계참에서 기다리며 뭐든 좀 생각해 보세요. 하지만 오래 기다리시게 하지 않고 곧 부를게요.”

(중략)

“지바고 씨!”

- 하권 92쪽


다. “언제 한번 와서 도와주시겠어요? 바닥과 굽도리에 난 틈을 함께 막으면 좋겠는데, 어떠세요? 그럼 현관에 계세요, 뭐든 잠시 생각하면서. 오래 걸리지 않아요. 곧 부를게요.:

(중략)

“지바고!”

- 하권 74쪽


라. “혹시 언제 한번 들러서 도와주지 않을래요? 마룻바닥과 모퉁이의 틈새를 함께 다 막아요, 어때요? 그럼 층계참에 있으면서 뭐 좀 생각해 봐요. 오래 안 기다려도 돼요, 곧 부를게요.”

(중략)

“지바고!”

- 2권. 88쪽



*
라라가 유리에게 남긴 쪽지 – 유리가 빨치산에게 잡혀갔다 돌아왔을 때

가. “주여, 참으로 행복합니다! 당신께서 살아 계시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시 근처에서 당신을 본 사람이 나한테 달려와 알려 주셨습니다. (중략)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어디에도 나가지 말고 기다리고 계세요. 그렇군요. 당신께서는 그것을 모르시지만, 나는 지금은 앞쪽에 살고 있어요. 한길 쪽으로 난 방에서요. (중략)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어요.”

- 하권. 630쪽


나. “주여,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사람들 말로는 당신이 살아 있고, 당신을 찾았다고 해. 교외 지역에서 당신을 본 사람들이 달려와서 말해 주었어. (중략)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아무 데도 가지 마. 맞아, 당신은 모르겠군, 우리는 지금 거리 쪽으로 난 아파트의 전면부에 살아. (중략) 기뻐서 미칠 것만 같아.”

- 하권 245-246쪽


다. ”주여, 참으로 행복합니다. 당신이 살아 있다고, 당신이 나타났다고 하네요. 근방에서 당신을 보았다고 사람들이 달려와서 말해 줬어. (중략)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기다려요. 참, 당신은 모를 텐데, 지금 나는 집의 앞쪽, 거리로 난 방들에서 살고 있어. (중략) 난 기뻐 미칠 지경이야. ”

- 하권. 211쪽


라. “맙소사, 얼마나 다행인지! 당신이 살아 있고 무사하다고 하더군. 당신을 근처에서 본 사람들이 나에게 달려와 말해 주었어. (중략)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줘. 그래, 당신은 모르지만 나는 지금 집의 앞쪽 부분, 거리와 면한 방들에 있어. 하긴 당신이 알아서 짐작할 테지. 안주인의 가구 일부를 팔아야 했기 때문에 (중략) 너무 기뻐 미치겠어.”

- 2권. 240쪽



* 라라와 유리, 바리키노에서

가. “나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 손아귀에 언제나 꽉 쥐고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도록 해주세요. 난 당신 사랑의 노예이고, 생각하거나 따지는 일은 내 일이 아니라는 걸 자꾸만 상기시켜 주세요. (중략)중요한 건, 사랑의 선물도 다른 선물과 비슷하다는 거예요. 그 선물이 아무리 크더라도 축복이 없이는 드러나질 않아요. 당신과 나는 하늘 나라에서 입맞춤을 배우고 함께 이 세상으로 보내진 것 같아요. 우리가 배웠던 것을 시험하도록 하기 위하여 말이에요.”

(중략)

“우리의 처지가 같지 않다는 걸 모르시겠어요? 당신에겐 구름 위로도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가 주어져 있지만, 여자인 저에게는 땅 가까이를 날면서 어린 것을 감싸 줄 수 있는 날개만 주어져 있어요.”

- 하권. 724-725쪽


나. ”나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를 계속 복종하도록 붙잡아 줘. 내가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자기 사람이라는 것을, 판단하지 않는 종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내게 상기시켜 줘. (중략) 사랑의 은사는 다른 모든 은사와 매한가지야. 그건 위대할 수 있지만 축복 없이는 발현되지 않는 거야. 하늘에서 서로 입을 맞추도록 우리를 가르친 후, 나중에 서로에게 그 능력을 시험해 보도록 동시대의 아이들로 살게끔 우리를 보내셨지.”

(중략)

“우리가 서로 다른 상황에 있다는 걸 알겠어? 당신에게는 구름 너머로 날아가라고 날개가 주어졌지만, 나 같은 여자에게는 땅에 달라붙어 위험으로부터 새끼들을 보호하라고 날개가 주어진 거야.”

- 하권. 345-346쪽


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나 자신도 모르겠어. 계속 당신에게 굴복하도록 나를 붙들어줘. 내가 당신 것이라는 걸, 맹목적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생각 없는 노예라는 걸 끊임없이 상기시켜 줘. (중략) 사랑의 재능은 온갖 다른 재능과 같은 거야. 그건 위대할 수도 있지만, 축복 없이는 발현되지 않을 거야. 우리는 마치 하늘에서 입맞춤하는 법을 배운 다음, 그 능력을 서로에게 확인하기 위해 같은 시대에 살도록 어린아이로 내려보내진 것 같아. ”

(중략)

“알아요? 우리는 처한 상황이 달라. 당신에게는 펼쳐 구름 너머로 날아갈 수 있도록 날개가 주어졌지.. 여자인 내게는 땅에 바싹 붙어 어린 새끼를 감싸서 위험에서 보호하도록 날개가 주어졌고.”

- 하권 295-296쪽


라. ”나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항상 나를 꼭 붙들고 있어 줘. 내가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 판단력을 상실한 당신의 노예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줘. (중략)사랑의 재능은 다른 온갖 재능과 같아. 위대할 수는 있지만, 축복이 없으면 드러나지 않을 거야. 우리는 천상에서 키스하는 법을 배운 다음 서로 이 능력을 시험하도록 같은 때에 어린아이처럼 살라고 보내진 거야. ”

(중략)

“이해하겠지, 우리는 서로 처지가 달라. 당신은 날개를 달고 구름 너머로 날아갈 수 있지만, 그런 자유가 있지만 여자인 나는 땅바닥에 붙어 어린 새가 위험하지 않도록 날개로 감싸주어야 해..”

- 2권. 334-335쪽



* 라라의 마지막 고백

가. “안녕, 나의 위대한 분이여. 당신은 나의 보람이었어요. 안녕, 나의 빠르고 깊은 시냇물이여. 나는 온종일 흐르는 당신의 물소리를 사랑하였는지도 몰라요. 또한 당신의 차디찬 물결 속에 잠기기를 좋아했는지도 몰라요.”

- 하권. 834쪽


나. “안녕, 안녕, 내 사랑, 내 자부심이여, 안녕, 내 빠르고 깊은 강이여, 안녕. 내가 하루 종일 철썩이는 당신의 물결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 당신의 차가운 물결에 뛰어드는 걸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몰라.”

- 하권. 465쪽


다. “안녕, 내 위대한 사람이여, 내 사랑이여, 안녕, 나의 자랑이여, 나의 빠르고 깊은 강이여, 안녕. 온종일 당신이 철썩이는 소리를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차가운 물결로 뛰어드는 걸 내가 얼마나 좋아했던지.”

- 2권. 397쪽


라. ”잘 가, 나의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그대, 잘 가, 나의 자랑, 잘 가, 나의 빠르고 깊은 시냇물이여, 하루 종일 출렁이는 당신의 물소리를 정말 사랑했고, 당신의 차가운 물살 속에 몸을 던지는 것을 정말 사랑했어.”

- 2권. 446쪽



박형규 역자의 라라는 일관되게 존댓말을 사용한다. 다른 역자들이 라라와 상대방의 관계가 발전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반말로 전환한 것과는 다른 점이다. 물론 계속 존댓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라라의 강단있고 중심잡힌 성격이 가려지는 건 아니다. 다만 가장 오래된 판본이라 시대적으로 좀 old한 부분은 어쩔 수 없다. 박형규의 라라는, 말투는 부드럽지만 행동은 확실한 사람이다.


홍대화의 라라는 다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더 정확하게 표현하고, 관계를 주도한다. 박형규의 라라가 말투와 행동의 주도권이 달랐다면 홍대화의 라라는 말투와 주도권이 일치한다. 홍대화의 라라는 사랑도,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일도 확실하고 적극적이다.


최종술과 김연경의 라라는 내가 읽기에는 비슷하게 생각됐다. 상대와 대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이런 라라의 성격은 박형규와는 완전히 다르고, 홍대화와도 결이 다르다. 특히 최종술의 라라는 가장 최근인 만큼 가장 자연스러운 말투를 구사한다. 이는 그녀의 비극을 독자로 하여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한다. 마치 지인의 이야기인양. 반면에 김연경의 라라는 전반적인 캐릭터는 최종술의 라라와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가끔씩 튀어나오는 문어체적 단어/말투가 약간의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라라는, 자신이 선택한 사랑이 주는 고통까지 감내한다. 앞에서 말했듯 라라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어도 선택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구하지 않았다. 빠샤도 유리도 라라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라라를 떠나지만 라라는 그들의 명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라라가 스스로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고픈 방식은 그들의 방식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선택이 옳았던 것도 아니었고.


라라가 유리의 관 앞에서 하는 마지막 고백, ‘당신의 차가운 물 속에 잠기는 것까지 사랑했다’는 말이야말로 강한 라라가 유약한 유리를 마지막으로 용서하는 말이다. 유리가 했던 잘못된 선택과 그로 인해 연쇄적으로 발생한 상실들. 유리는 라라를 잃고, 라라는 유리를 잃었다. 상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유리는 라라와 자신의 딸을 잃었고, 라라와 유리의 딸은 전란의 와중에 어머니와 보호자를 잃었고 아버지를 알 기회를 잃었으며, 까덴까(빠샤와 라라의 딸)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 그리고 저자가 얘기해 주는 이후의 일들 또한 독자로서는 마음 아플 따름이다. 유리는 그 모든 것을 겪기 전에 (행복하게도) 죽음에 이르렀고. 하지만 라라는 자신이 원해서 유리라는 차가운 물에 뛰어들었음을 이야기한다. 물론 라라가 고백하는 시점은 내가 위에서 서술한 상실이 모두 일어나기 전이긴 하지만, 라라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유리를 용서하는 것이다. 자신이 선택했으므로. 이는 ‘당신이 옳았다, 그러므로’ 하는 용서가 아니다. ‘그 때 당신은 틀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유리가 빠르고 깊은, 차가운 시냇물이었다면 라라야말로 짙푸른 바다와 같은 사람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삶을 살아내는 수많은 라라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싶은 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수첩
브뤼노 몽생종 지음, 이세욱 옮김 / 정원출판사 / 200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라흐마니노프는 누가 연주해도 아름답지만 리흐테르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더욱 특별했다. 어쩌면 그날 내 기분이 그랬는지도 모르고 그냥 호르몬이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다른 연주자였으면 너무 속주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그의 피아노에 난 심장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때로는 그렇게 확신에 찬 타건이 위로가 되는 날이 있는 법이다. 리흐테르에 대한 내 애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의 비르투오소로서의 삶이 궁금했지만 그의 전기보다는 그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


사람들은 나에 관해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 그런데 그 말이나 글들이 너무나 거짓되고 터무니없다.

-      47쪽. 머리말


그의 말대로 여기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마냥 화사하지는 않았던 어린 시절과 자연스럽게 음악에 몸 담게 되었던 것, 뒤늦게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해 교육을 받고 음악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며 만났던 사람들… 사실 이 책은 그가 만난 음악가들에 대한 회상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 중 내가 가장 관심 있었던 두 사람은 프로코피예프와 마리아 유디나. 이전에 라흐마니노프와 쇼스타코비치에 대해 읽으면서 난 프로코피예프에 대해 약간의 선입견을 갖게 됐다. 이기적이고 조금은 기만적인 사람. 리흐테르 또한 프로코피예프에 대해 마냥 칭송을 하지는 않는다. 그의 난폭한 기질에 대해 이야기하고(101쪽), 그가 라흐마니노프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를 싫어했던 것에 대해 비판하며(102쪽) 자신은 인간 프로코피예프보다 그의 음악과 더 많은 관계를 맺었다(133쪽)고 고백하기도 한다. 하지만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칭송해 마지않는다. 난 그게 너무나 신기했다.


프로코피예프가 살아 있었을 때, 우리는 그에게서 늘 기적을 기대할 수 있었다. 마치 마술 막대를 휘둘러 무엇이든 신기한 보물로 바꾸어 버릴 수 있는 마술사가 우리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그가 휙 하고 마술 막대를 휘두르면 「돌꽃의 전설」이나 「신데렐라」 같은 작품이 출현하곤 했다.

 그의 걸작 가운데 하나인 「축배」라는 짤막한 합창곡이 생각난다. 이것은 음악 작품이라기보다 하나의 계시다. 드라이포인트 판화처럼 치밀하고 날카롭고 쩌렁쩌렁한 교향조곡 「1941년」도 생각난다.

-      163쪽. 프로코피예프에 관하여


리흐테르는 프로코피예프를 마치 신화적인 존재처럼 우러른 듯 하다. 심지어는 그가 죽었을 때조차 슬퍼하지 않았다.


나는 프로코피예프를 생각했다. 하지만 슬픈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달리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하이든이나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죽었다고 해서 내가 슬퍼했던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      165쪽. 프로코피예프에 관하여


리흐테르 덕분에 난 프로코피예프에 대해 조금은 편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전에 그를 엄청나게 미워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사랑하는 라흐마니노프와 쇼스타코비치에게 심술궂게 굴었던 건 사실이었으니. 그렇다고 그의 음악을 안 들은 것도 아니지만.



마리아 유디나에 대해서는 더 흥미롭게 읽었다. 전에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 리뷰에서도 얘기했듯 난 마리아 유디나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래서 리흐테르의 언급에 대해서도 흥미 있게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리흐테르는 유디나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았다. 유디나의 특이한 성정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듯 하다. 리흐테르의 뉘앙스는 유디나가 먼저 그를 싫어해서인 것 같지만 그건 알 수 없지 않나. 물론 리흐테르도 유디나의 자선 활동에 대해서는 존경의 뜻을 보인다.


마리아 베냐미노브나 유디나는 정말이지 굉장한 인물이었다. 나는 그녀를 알기는 했으나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사실 그녀가 워낙 기이하다 보니 모두가 그녀를 피했다. 그녀 쪽에서는 나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고 석연치 않아 하는 태도를 보였다. 나에 관한 그녀의 평은 이러했다. “리흐테르? 글쎄, 라흐마니노프가 딱 어울리는 피아니스트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면 이건 별로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다. 그녀 자신도 이따금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연주했지만 말이다.

-      111쪽. 전쟁의 시기


물론 존경할 만한 점도 없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집으로 맞아들여 거두었으며, 스스로 부랑자처럼 생활했다. 참으로 기이한 여인이었다. 요컨대 그녀는 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싶어했던 비범한 예술가였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기분에는 충실했을지 몰라도 작곡가들에 대해서는 정직함이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장례식에서 연주를 했다. 라흐마니노프를……
- 113
쪽. 전쟁의 시기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유디나가 스탈린 정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녀가 리흐테르가 싫어했던 ‘기행’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강단을 보였기 때문이니. 그러나 리흐테르가 유디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유디나가 작곡자의 의도를 헤아리기는커녕 자신의 의도를 덮어씌워 연주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리흐테르가 생각하는 연주자란 작곡자의 의도를 명확하게 구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연주자란 하나의 거울이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으로 음악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작곡가가 써놓은 <모든> 지시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이 안 되니까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에 찬성할 수 없다.

-      233쪽. 거울


이건 사실 리흐테르만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당시 음악계의 흐름이 그렇게 흘러가기도 했다. 내가 어제 읽은 헤럴드 숀버그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에는 연주자의 해석을 지양하고 악보에 충실하게 연주를 하는 경향이 강화된 것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 밖에도 이 책에서 리흐테르는 네이가우스를 비롯해서 에밀 길렐스, 로스트로포비치와 쇼스타코비치, 오이드라흐 등 자신이 만났던 많은 음악가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자신의 삶과 음악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당연히 모든 일화들이 흥미로웠지만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리흐테르 자신이 연주자로서 갖고 있는 자부심이었다. 물론 그럴 만 하다. 그는 평생 동안 음악을 사랑했으며 고뇌했고 고민을 통해 얻은 원칙을 실현했던 사람이니까.


나는 어떤 작품을 내가 이해한 대로 연주해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놓고 의심을 가져본 적은 있다. 하지만 어떤 작품을 다른 식이 아니라 이렇게 연주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았다. 처음부터 늘 그러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나의 확신은 악보를 주의 깊게 보았던 데서 나온 것이다. 악보에 담긴 것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데에는 오로지 악보를 잘 보는 것만이 필요하다.

 쿠르트 잔데를링이 어느 날 나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연주를 잘 할 뿐만 아니라 음표를 읽는 법도 알고 있다.”

 그건 나를 별로 나쁘지 않게 보아준 것이다.

-      246쪽. 거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1. 쇼스타코비치, 그 삶과 음악(리처드 화이트하우스, 김형수 역. 포노. 2014. 148쪽)

: 쇼스타코비치의 작품들을 순서대로 개괄하며 그에 따른 그의 삶을 살핀다. 사실상 그의 삶은 작품을 설명하기 위한 정보에 지나지 않는 느낌. 저자는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은 안 읽은 듯 하다. 회고록을 훑어만 봤어도 알 법한 정보들을 (내 기준으로는 ) 틀리게 써 놓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뭐, 회고록을 아예 안 믿었을 수도 있고). 예를 들면 "쇼스타코비치도 현역 입영은 거절당했지만 소방수로 자원했고(44쪽)" 같은. 쇼스타코비치는 자원하지 않았다. 자원을 강요당했을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처럼 작품들을 위주로 정리해 놓은 것 또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초심자에게는 꽤 도움이 되었다. 뒤의 부록이 특히 더. 



2.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M. T. 앤더슨, 장호연 역. 돌베개. 2018. 546쪽)



3.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남궁인,손원평,이정연,임현석,정아은,천현우,최유안,한은형. 문학동네. 2024. 268쪽)

: 직장 생활 앤솔러지. 다들 견디고 있는 지리멸렬한 삶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이정연, 「등대」는 결이 약간 달랐다. 작품 자체로는 재밌었지만 앤솔러지 전체에서는 조금 튀는 느낌. 그래도 다 좋았다. 



4. 안데르센 동화전집(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윤후남 역. 현대지성. 2016. 1280쪽)

: 완역본이라는 의미도 크고, 제본이 잘 되어서 책 어디를 펼쳐도 책등이 꺾이거나 하지 않고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좋으나 종이가 지나치게 반들거려서 스탠드 불빛 아래에선 읽을 수 없어 자연광에서만 읽느라 진도가 너무 느렸다. 잊을만 하면 하나씩 등장하는 오탈자도 옥에티.



5. 근접한 세계(김연수,히라노 게이치로, 최고은 역. 북다. 2026. 204쪽)

: 두 작가가 쓴 다른 이야기. '윤리적 딜레마'가 주제라는데, 김연수 작가의 작품은 주제에 충실했지만 히라노 작가의 작품은 이게 대체 왜 딜레마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명백한 범죄를 덮을지 말지가 딜레마라고? 범죄자가 아무리 유명하고 좋은 평가를 받았던 노장이라한들, 아무리 죽었다한들 범죄 사실을 덮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아니 덮는다고도 생각조차 안 하는 게,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딜레마'라고? 딜레마가 무슨 뜻인지 모르나? 도대체 어떤 성 의식을 갖고 있으면 이딴 걸 딜레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건가? 이건 그냥 윤리 의식이 없는 거다. 아동 인권, 젠더 의식 따위는 없는 나라, 일본. 



6. 급발진(서귤. 안전가옥. 2024. 316쪽)

: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김사장'의 소개로 얼결에 탐정사무소에 취업한 고주운. 작디작은 사무실보다 더 도망치게 싶게 만든 건 사수라고 소개받은 곽재영의 썰렁한 아재 개그. 그러나 곽재영의 수려한 외모에 넋을 잃고 그냥 눌러 앉는다. 첫 사건으로 급발진을 주장하는 은퇴한 교사 안경숙의 약점을 잡아내는 일을 맡은 고주운은 차 안에서 내내 잠복하며 곽재영의 아재 개그와 한결같은 햄버거 사랑을 견디던 중 사건사고를 다루는 PD로 위장하여 우연히 안경숙과 친분을 쌓게 되고, 급발진 사고의 피해자들을 조사하던 중 그들이 모두 마약 거래와 관련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급발진이라는 소재로 꽤 큰 사건을 빌드업한다. 나름 치밀하게 짜인 플롯이 흥미롭다. 주인공들의 행적도 그렇고. 하지만 결말이 좀 내 스타일이 아니긴 하다. 난 확신의 해피엔딩을 좋아해서. 결말을 읽고 나서야 처음에 왜 '빌런 탄생기'라고 했는지는 알겠다 싶었지만, 단지 이 책의 살짝 열려 있는 결말을, 정확히는 그 사람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후속작을 읽을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조금 궁금하긴 하다. 



7. 외로운 남자(외젠 이오네스코, 이재룡 역. 문학동네. 2010. 176쪽)

: 그는 정말 외로웠을까? 그냥 혼자였을 뿐이지 않은가? 서른다섯의 남자가 예기치 못했던 큰 유산을 받고 퇴사한 후 혼자 살아간다. 오랫동안 지내왔던 초라한 호텔에서 나와 괜찮은 셋집을 얻고 근처에 단골 식당을 만들고 최애 자리와 단골 웨이트리스를 정하고, 근처를 산책하며 매일의 한가한 일상을 살아가는 날들. 그러는동안 오래전 교류가 있었던 철학자와 통화를 하기도 하고 여자와 함께 살기도 하지만 결국 그는 혼자다. 전쟁과 혁명이 일어나고 세상이 바뀌지만 남자의 생활은 그냥 지속된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이건 내가 원해오던 삶이다. 경제적 걱정 없이 하루하루 비슷하게 흘러가는 평온한 삶. 권태롭고 의미 없어보일지언정, 그건 외부의 시선일 뿐. 모든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고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몇몇을 제외하면 어차피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못한다. 꼭 기록에 남길만한 삶이 아니라해도, 무의미하다 해도 그 자신에게만 평화로웠다면 그걸로 충분한 게 아닐까? 누구도 해하지 않고 누구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말이다. 원제인 "Le Solitair"는 물론 '외로운 남자'라고 번역하는 게 대부분이겠지만 그냥 '혼자인 남자'로도 번역할 수 있지 않은가. 혼자라고 꼭 외로우리라는 법은 없다. 그의 삶은 혼자여도 괜찮은 삶이었지 않나.



8. 레시피 월드(백승화. 한끼. 2025. 276쪽)

: 음식과 관련된 능력자들의 이야기. 연작 소설이라고 해도 되고, 중간에 삽입된 '여담'으로 연결된 장편으로 볼 수도 있을 듯. 우리나라 방귀쟁이 며느리 설화(<방귀 전사 볼 빨간>)나 좀비 이야기(<살아있는 오이들의 밤>)는 재밌었고 독박 육아에 지친 엄마의 이야기(<깜박이는 쌍둥이 엄마>)는 오히려 현실적이라 마음이 좀 아팠다. 가장 재밌었던 건 첫번째 이야기지만 마지막 이야기가 없었다면 소설집이 마냥 가벼워졌을 듯. 



9. 작별 너머(다비드 디옵, 목수정 역. 희담. 2025. 352쪽)

: 식물학자였던 미셸 아당송은 딸 아글라에에게 일체의 유품을 남기고, 아글라에는 이 모두를 자신이 구입해서 고치고 있는 성으로 가져온다. 어릴 때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무궁화 나무가 있는 서랍장이 문득 눈에 띄고, 서랍 속 비밀 서랍을 연 아글리에는 낡은 수첩을 발견한다. 젊은 시절부터 아카데미 회원이 되길 바랐던 미셸 아당송은 연구를 위해 세네갈에 가게 됐고, 그곳의 자연에 매료되었다. 백인으로서 아당송은 많은 특권을 누리는데, 부족의 왕자를 보좌관처럼 데리고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식물 표본을 수집하던 중 어느 마을에서 '돌아온 여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마을 족장의 조카인 마람은 마을에 이르는 한적한 길 한중간에서 백인들에게 납치되어 끌려갔으나 몇 년 뒤 한 남자를 통해 자신이 그 마을에서 죽은 자가 되었는지를 확인하려 했고, 이는 그녀가 세네갈 어딘가에 머물고 있다는 뜻. 백인에게 노예로 팔려갔다가 돌아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아당송은 호기심을 누를 수 없고, 그녀가 머물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향해 여행을 시작한다.


(강력 스포)


18세기 세네갈의 생활상과 당대 노예 무역의 실상, 백인들의 제국주의 정책과 인종차별 등이 잘 드러나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아당송의 사랑이야기를 위한 배경일 뿐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말로 달콤한 슬픔. 비록 젊은 아당송은 순진하게도 자신의 사랑이 어떻게든 장애를 극복하고 나아갈 것이라 믿었지만 아무리 소설 속일지언정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난 이 이야기가 아당송에게만 새드 엔딩이리라 믿는다. 마람은 처음 고래 섬에서 도망칠 때, 수영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므로 마람이 마지막 순간에 아당송의 손을 놓고 바다에 뛰어든 건 그녀 자신을 믿고 행한 일이었다. 난 그녀가 그 믿음에 응답받았으리라 믿는다. 마람은 계속 그녀의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아당송 없이. 그게 그녀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옳았을 것이다, 그 때에도 혹은 지금이었어도. 



10. 재구성(민병훈. 민음사. 2020. 292쪽)

: 이전에 읽은 작가의 작품( 『달력 뒤에 쓴 유서』)이 정말 좋았어서 선택했는데, 이 책이 더 먼저 출간된 책임에도 내게는 왠지 후속작처럼 읽혔다. 표제작이 내가 먼저 읽은 작품을 다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음에도 난 소설집의 제목 때문에, 그리고 첫번째 작품(「장화를 신고 걸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연꽃 사이를 헤치며」)을 비롯해 다른 작품들에서도 『달력 뒤에 쓴 유서』의 이야기가 조금씩 반복되기에 그렇게 느껴졌고 그게 날 조금은 피로하게 했다. 사실 마음과 상황이 좋을 때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작품들이지만 내게는 꽤 무거웠고, 가끔 지루했다. 더이상 도시에서 부유하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았다.



11. 검은 모자를 쓴 여자(권정현. 자음과모음. 2021. 264쪽)

: 새벽 2시, 민은 문득 베란다 밖을 내다본다. 검은 모자를 쓴 여자가 민의 집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민은 얼른 달려나가지만 분명 헌옷수거함 옆에 서 있던 여자는 온데간데 없다. 남편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고, 작은방의 동수도, 강아지 무지도 아무 일 없지만 민은 불안하다. 사실 3년 전 아들 은수가 약수터 앞 공터에서 민이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유아차에서 목이 꺾여 죽은 후 민은 정신과에 다니고 있다. 은수의 죽음 이후 힘들어하던 민은 강아지 무지를 입양해 키우면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가던 중, 눈 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동네 교회의 잠긴 문 앞에 버려져 있던 은수와 비슷한 개월수의 동수를 발견하여 입양했다. 동수 품에 안겨 있던 검은 고양이 까망이도. 그러나 민은 동수에게 깊은 정이 가질 않는다. 


어디까지가 망상이고 어디부터가 진실이었을까? 진실이 있기는 한가? 병원에서 공연했던 마술사가 한 말처럼 삶이란 모자 속 고양이를 꺼내는 일의 연속이다. 그냥 꺼내는 거.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니라 꺼내는 순간 결정되는 거다.(213쪽) 민은 과연 몇 마리의 고양이를 꺼냈을까? 난 민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끝까지. 민이 어떤 행동을 하든 간에. (사실은 민이 그 행동을 하길 바라고 있다. 결말에서 작가가 하지 않은 그 이야기처럼.)



12. 빛의 마녀(김하서. 자음과모음. 2019. 272쪽)

: 한국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는 니콜은 횡단보도 옆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여자를 발견한다. 한겨울에 맨발로 얇은 코트만을 입은 채 스물 여섯 시간밖에 살지 못한 딸의 죽음에 병원 과실을 묻는 여자, 태주. 200년이 넘게 살고 있는 마녀 니콜은 문득 딸 샬럿이 기억나고, 태주에게 아이를 되살려 주겠다며 자신의 모든 말을 따르겠냐고 묻는다. 니콜은 자신을 쫓는 마녀 헌터 에드워드의 눈을 피해 이곳에 얼마나 더 머물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태주에게 아이를 되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알려준다.


태주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지금 하는 일들과 니콜의 과거가 엇갈린다. 왜 니콜이 태주를 한눈에 알아볼 수 밖에 없었는지. 같은 상처를 지녔다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씻어낼 지는... 결말이 조금 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책 속에서나마 진실이 이렇게 대놓고 드러나지 않았으면 좀더 여운이 있지 않았을까. 이야기 자체는 좋았다. 이들이 한 방식이 건강한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그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사실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는 게 위로가 되기도 했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봐야겠다.



13. 너무나 많은 시작(존 맥그리거, 이수영 역. 민음사. 2010. 456쪽)

: 데이비드는 이제 막 장모의 장례식에서 돌아왔다. 아내 엘리너는 가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다시 여행을 가기 위해 짐을 꾸려야 한다. 데이비드는 장례 기간 동안 함께 있던 딸 케이트의 성숙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뿌듯해 하고, 엘리너의 마음을 달래 주려 한다. 그리고 엘리너는 이제 곧 데이비드가 가야 하는 여행길에 동행해 주겠다고 한다. 이 여행은 무엇을 위한 여행일까? 어릴 때부터 여러 물건들을 수집하고 물건들의 이야기를 상상했던 데이비드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큐레이터가 되고 출장길에 애버딘 박물관 카페에서 일하던 엘리너를 만나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애한 끝에 그녀와 결혼한다. 


사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아일랜드에서 런던으로 일하러 온 메리 프리엘이 일하는 집 주인에게 강간 당하고 사생아를 출산하는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하지만 읽으면서 난 프롤로그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나중에야, ***의 세상이 뒤집어진 후에야 다시 기억해낸다. 이 소설 속에는 그만큼 많은 삶들이, 줄리아와 도로시와 엘리너의 삶이, 그리고 데이비드의 삶이 있다. 서로가 연결되어 있고 또 하나하나가 소중한 그들의 이야기가. 도로시의 이야기는 평범했지만 줄리아의 이야기는 조금 안타까웠고 엘리너의 이야기는 화가 났다. 어쩌면 평범하고도 흔한 이야기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삶은, 모든 삶은 저마다의 응어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옹이가 진 부분은 더 단단하기에. 


소설의 목차가 데이비드가 여행을 위해 챙기는 물품의 목록이라는 걸 다 읽고서야 알았다. 미리 알았으면 더 좋았을 걸. 



14. 골렘(구스타프 마이링크, 김재혁 역. 책세상. 2003. 398쪽)

: 예술품 복원을 업으로 하는 페르나트. 그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없다. 게토 지역에 있는 그의 작업실 겸 거주지의 1층에는 고물상 바서트룸이 살고 있고 다른 층에는 지적 장애인 형제와 이들이 사랑하는 빨강머리 로지나가 있다. 페르나트는 그저 언제부턴가 이곳에 있으며 예술품 복원을 해왔고, 가끔 작가, 화가, 구두장이인 친구들과 어울린다. 어느날 페르나트에게 묘한 분위기의 손님이 와 '이부르'라는 책의 복원을 의뢰한다. 페르나트는 이 책을 복원하려 하지만 확신할 수 없고, 손님의 형상 또한 희미할 뿐이다. 이런 페르나트에게 친구들은 골렘 전설을 이야기해 준다. 페르나트는 파편적으로 돌아오는 자신의 과거 기억과 게토 지역에서의 여러 사건, 그리고 세무 공무원이지만 통찰력이 있는 정신적 지주 셰마야 힐렐과 그의 딸 미리암과의 관계, 젊은 시절 연인이었고 현재는 바서트룸의 복수 대상인 사비올라 박사와 불륜 관계인 안겔리나에 대한 연민과 보호 사이에서 부유한다.


줄거리를 요약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읽는 동안에는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페르나트의 모든 행동이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다만 모든 행동이 공감이 되진 않았고. 골렘의 존재 또한 그가 필연적으로 골렘의 문 없는 방을 발견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골렘의 상징성에 대해선, 읽는 동안에는 꽤나 명확하다고 생각했다. 페르나트의 또다른 자아일 것이라고. 그리고 이런 내 추측으로 인해 마지막 결말 부분에서도 놀라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으므로. 솔직히 말하면, 예상대로여서 조금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안겔리나를 기다리던 성당에서의 환상과 그 의미를 나중에 깨닫는 페르나트의 모습은 내가 이 소설에서 기대했던 그대로여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되었다.



15. 우리 사이에 금지된 말들(예소연,전지영,한정현. 다람. 2025. 152쪽)

: 앤솔러지. 솔직히 말하면, '금지된 말들'이라는 주제보다는 각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단편 자체의 내용이 좋았다. 읽으면서 주제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했고 읽다가 '아, 여기서 앤솔러지의 주제가 드러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세 편 다 좋았고, 뒤의 작가들 대담도 좋았다. 가장 공감됐던 건 한정현. 나머지 두 편도 당연히 좋았지만 '나'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좀 있었다.



16. 레드 닥>(앤 카슨, 민승남 역. 한겨레출판. 2019. 208쪽)

: 『빨강의 자서전』의 게리온은 이제 자랐다. 중년이 된 그는 그저 다닐 카름스를 읽으며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우연히 만난 Sad But Great와 차를 몰고 북쪽으로 향한다. 


『빨강의 자서전』보다 조금 덜 반짝이고 조금 더 슬프다. 어쩌면 시간이 닳게 하는 건 표피가 아닌 마음이겠지. 이제 사랑은 없다. 완벽한 아내는 그저 아내일 뿐. 그래도 난 그녀가 좋았지만, G의 북녘행은 멈추지 않는다.



17. 해파리 만개(김초엽. 마음산책. 2026. 204쪽)

: 단편집. 첫번째 작품이 너무 뻔해서, 마치 청소년들에게 해주는 우화 같아서 멈칫했다. 하지만 두번째 작품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에서 이전의 김초엽이 보여서 다시 맘 편하게 읽어 나갔다. 구석에서 조용히 있는, 눈에 띄지 않지만 분명한 존재들에게 주목하는 작가의 시선이 여전히 좋았다. 가장 재밌었던 건 「젤리의 우울」이지만 인상 깊었던 건 피그말리온 효과를 떠올리게 했던 「사모나」. 



18. 불필요한 여자(라비 알라메딘, 이다희 역. 뮤진트리. 2026, 436쪽)

: 72세 알리야. 오래전 남편과 이혼하고 그동안 혼자서 삶을 꾸려왔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지만 집안에서 밀어붙인 조혼으로 원하는만큼의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래도 지금 사는 집의 주인이 알리야의 권리를 인정해 주어서, 그리고 (전)남편의 집안과 친했던 한나의 소개로 서점에서 일할 수 있어서 혼자서 잘 살 수 있었다. 알리야는 매년 1월 1일에 새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바로 소설 번역. 지금까지 37권을 번역했지만 이 종이뭉치들은 그저 가정부 방과 그 옆 화장실에 쌓여 있을 뿐이다. 


알리야는 평생을 칩거한다, 책과 함께. 사실 난 그게 부러웠다. 너무 철없는 소리일 지 모르지만 알리야에게 삶은 문학이고, 문학으로 그녀 자신의 삶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특히 페소아의 문장들로. 혼자 사는 여성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그저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공간과 혼자만의 시간을 채워줄 무언가. 알리야에게는 그게 책이었고 나에게도 그러하다. 하지만 이렇게 혼자만의 삶을 잘 꾸려가는 그녀에게도 역시 연대는 필요하다. 그래서 난 계단 위의 '세 마녀'가 고마웠다. 그녀들이 그저 막무가내가 아니어서 좋았고, 셋이 다 배경과 직업이 달라서 좋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나이들고 고립된, 괜찮은 척 하지만 사실은 외로웠던 여성이 구원받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좋았다. 세 마녀는 지금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줄 것이고 알리야의 노력은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다. 적당히 담백하고 적절히 따뜻한 게, 그게 가장 좋다. 


ps. 레바논에서도 대학원생은 '노예'라니.... 전세계 공통인건가? 웃기면서 슬프다.



19. 2026 소설, 한국을 말하다(성해나,김기태,박연준,박민정,성혜령,김경욱,하성란,윤성희,정한아,김유담,김병운,문지혁,이미상,송호근,정용준,정소현,안톤 허,권김현영,정대건. 은행나무. 2026. 216쪽)

: 한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이야기들. 짧지만 응축된 이야기들 속에서 나와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조금은 외면하고 싶은 모습도 있고 설마 싶은 모습도 있었지만. 물론 내가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소설과 에세이 사이의 어딘가에 있던 안톤 허. 



20. 파트타임 여행자(반수연. 문학동네. 2025. 276쪽)

: 디아스포라 단편집. 저자는 10년 동안 글을 못 썼다고 했는데 그렇게 꾹꾹 눌러담은 마음이 진하게 녹아있는, 좋은 작품들이었다. 하나같이 마음 아픈, 길 위의 이야기들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다음 발걸음이 단단할 것임을, 이들의 내일은 오늘보다 밝을 것임을 믿게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들이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21. 다시, 몸으로(김초엽,저우원,김청귤,청징보,천선란,왕칸위. 김이삭 역. 래빗홀. 2025. 308쪽)

: '몸'을 주제로 한국과 중국의 소설가들이 쓴 앤솔러지. 세 가지 주제로 각각 한국 작가 한 명과 중국 작가 한 명이 단편을 실었는데, 주제는 사실 크게 상관 없을 듯. 신체에 대한 이야기지만 사실은 인간 자신의, 어쩌면 정신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인간을 구성하는 건 무엇인지, 인간 존재에서 신체란 어떤 역할인지... 주제나 소재를 생각하지 않고 읽어도 좋기만 한 여섯 작품들이었다. 가장 좋았던 건 어쩌면 '몸'과 가장 관련이 적은 이야기였던 청징보 <난꽃의 역사>. 



22. 하우스메이드 2(프리다 맥파든, 황성연 역. 북플라자. 2025. 400쪽)

: 밀리는 여전히 전과 기록 때문에 직장을 얻기 힘들다.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있지만 생활비는 벌어야 했기에 예전처럼 하우스메이드 일을 계속하는데, 이번에도 어이없이 해고당했다. 구직 사이트에 올려두고 연락을 기다리던 밀리는 한 남자로부터 연락을 받고 맨해튼 부촌의 펜트하우스를 방문한다. 보통의 경우처럼 아내가 연락한 게 아니지만, 좋은 인상의 성공한 기업가 더글러스는 바로 일을 시작해 달라고 한다. 다만 아내는 건강이 좋지 않아 손님방에 칩거하고 있다면서 절대 아내를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말도 걸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밀리의 눈에 아내 웬디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손님방에서는 알 수 없는 소리가 나고, 웬디의 식사는 늘 더글러스가 가져다 준다. 게다가 빨래의 검붉은 얼룩과 세면대에 찍혀 있는 피묻은 손자국...


흥미를 유발하는 글솜씨는 여전하지만 전편보다는 재미는 좀 덜하다. 웬디의 이야기는 짐작 못했지만. 그래도 권선징악이라는 면에서는 전편보다 낫지 싶다. 전편보다 더 확실해서. 3권을 읽을지말지 모르겠다. 



23. 전혀 다른 열두 세계(이산화. 읻다. 2024. 208쪽)

: 매월 1편씩 연재했던 소설을 묶은 것. 소설집 제목처럼 각 작품의 세계관이 다 다르다. 부담없이 읽기는 했는데 뭔가 조금은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작가가 열두 편의 다른 이야기를 썼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가장 좋았던 건 <이무기 시절도 한때>.



24. 글쓰기에 대하여(찰스 부코스키, 박현주 역. 시공사. 2016. 332쪽)

: 저자가 작가나 편집자 등 문학과 관련있는 사람들에게 쓴 편지들. 약간의 편집(?)도 있는듯 한 게, 어떤 편지는 문학을 언급한 부분만 실려 있기도 하다. 부코스키는 여전히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일관되게 마초스럽고, 자신감있다. 시대상을 감안해도 맨정신으로는 인정해 주기 싫은 젠더 의식에도 불구하고 내가 부코스키를 애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 책에 실린 부코스키의 육성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걸 엮어낸 편집자에게 고맙다. 



25. 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이하진. 열림원. 2024. 376쪽)

: 2000년 크리스마스에 뉴욕의 종합병원에서 갑자기 이능력자들의 능력이 폭발한다.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이후, 이능력자들은 별도로 관리된다. 그리고 잠재자들이 이능력자의 피를 수혈받거나 상처에 닿으면 '교란'이 일어나 10여년 동안 신체는 점점 약해지고 종국에는 코마 상태에 빠지게 된다. 열을 다루는 이능력을 가진 고등학생 미르. 학교 주위를 맴도는 이상한 트럭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경찰과 학교측에 알리지만 어른들은 애매한 태도만 보이고, 결국 트럭의 테러를 혼자서 막아내고 쓰러진 미르를 절친 건이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려다 건에게 교란이 일어난다. 10년 후, 미르는 이능력의 무효화를 연구하는 RIMOS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건을 소속 병원에서 최고의 치료를 받게 한다. 하지만 건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미르는 RIMOS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교란 상태에 들어간 서현주 씨의 딸 서해수와 인연이 닿는다.


일반적으로 장르 소설이라 할 때 기대하는 무드의 소설은 아니다. 일단 세계관이 상당히 정교하면서도 깊다. 이는 작가가 이야기 속에서 전개하는 물리학 이론의 깊이와 비례한다. 그래서 이야기 초반에는 살짝 지루했다. 재밌어지는 건 3부부터. 해피엔딩을 믿었지만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그만큼 소설의 분위기는 묵직했기에. 탄탄한 이론과 재난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작가의 시선이 좋았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이유없는 빌런이 없던 것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