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쇼스타코비치, 그 삶과 음악(리처드 화이트하우스, 김형수 역. 포노. 2014. 148쪽)
: 쇼스타코비치의 작품들을 순서대로 개괄하며 그에 따른 그의 삶을 살핀다. 사실상 그의 삶은 작품을 설명하기 위한 정보에 지나지 않는 느낌. 저자는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은 안 읽은 듯 하다. 회고록을 훑어만 봤어도 알 법한 정보들을 (내 기준으로는 ) 틀리게 써 놓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뭐, 회고록을 아예 안 믿었을 수도 있고). 예를 들면 "쇼스타코비치도 현역 입영은 거절당했지만 소방수로 자원했고(44쪽)" 같은. 쇼스타코비치는 자원하지 않았다. 자원을 강요당했을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처럼 작품들을 위주로 정리해 놓은 것 또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초심자에게는 꽤 도움이 되었다. 뒤의 부록이 특히 더.
2.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M. T. 앤더슨, 장호연 역. 돌베개. 2018. 546쪽)
3.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남궁인,손원평,이정연,임현석,정아은,천현우,최유안,한은형. 문학동네. 2024. 268쪽)
: 직장 생활 앤솔러지. 다들 견디고 있는 지리멸렬한 삶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이정연, 「등대」는 결이 약간 달랐다. 작품 자체로는 재밌었지만 앤솔러지 전체에서는 조금 튀는 느낌. 그래도 다 좋았다.
4. 안데르센 동화전집(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윤후남 역. 현대지성. 2016. 1280쪽)
: 완역본이라는 의미도 크고, 제본이 잘 되어서 책 어디를 펼쳐도 책등이 꺾이거나 하지 않고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좋으나 종이가 지나치게 반들거려서 스탠드 불빛 아래에선 읽을 수 없어 자연광에서만 읽느라 진도가 너무 느렸다. 잊을만 하면 하나씩 등장하는 오탈자도 옥에티.
5. 근접한 세계(김연수,히라노 게이치로, 최고은 역. 북다. 2026. 204쪽)
: 두 작가가 쓴 다른 이야기. '윤리적 딜레마'가 주제라는데, 김연수 작가의 작품은 주제에 충실했지만 히라노 작가의 작품은 이게 대체 왜 딜레마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명백한 범죄를 덮을지 말지가 딜레마라고? 범죄자가 아무리 유명하고 좋은 평가를 받았던 노장이라한들, 아무리 죽었다한들 범죄 사실을 덮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아니 덮는다고도 생각조차 안 하는 게,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딜레마'라고? 딜레마가 무슨 뜻인지 모르나? 도대체 어떤 성 의식을 갖고 있으면 이딴 걸 딜레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건가? 이건 그냥 윤리 의식이 없는 거다. 아동 인권, 젠더 의식 따위는 없는 나라, 일본.
6. 급발진(서귤. 안전가옥. 2024. 316쪽)
: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김사장'의 소개로 얼결에 탐정사무소에 취업한 고주운. 작디작은 사무실보다 더 도망치게 싶게 만든 건 사수라고 소개받은 곽재영의 썰렁한 아재 개그. 그러나 곽재영의 수려한 외모에 넋을 잃고 그냥 눌러 앉는다. 첫 사건으로 급발진을 주장하는 은퇴한 교사 안경숙의 약점을 잡아내는 일을 맡은 고주운은 차 안에서 내내 잠복하며 곽재영의 아재 개그와 한결같은 햄버거 사랑을 견디던 중 사건사고를 다루는 PD로 위장하여 우연히 안경숙과 친분을 쌓게 되고, 급발진 사고의 피해자들을 조사하던 중 그들이 모두 마약 거래와 관련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급발진이라는 소재로 꽤 큰 사건을 빌드업한다. 나름 치밀하게 짜인 플롯이 흥미롭다. 주인공들의 행적도 그렇고. 하지만 결말이 좀 내 스타일이 아니긴 하다. 난 확신의 해피엔딩을 좋아해서. 결말을 읽고 나서야 처음에 왜 '빌런 탄생기'라고 했는지는 알겠다 싶었지만, 단지 이 책의 살짝 열려 있는 결말을, 정확히는 그 사람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후속작을 읽을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조금 궁금하긴 하다.
7. 외로운 남자(외젠 이오네스코, 이재룡 역. 문학동네. 2010. 176쪽)
: 그는 정말 외로웠을까? 그냥 혼자였을 뿐이지 않은가? 서른다섯의 남자가 예기치 못했던 큰 유산을 받고 퇴사한 후 혼자 살아간다. 오랫동안 지내왔던 초라한 호텔에서 나와 괜찮은 셋집을 얻고 근처에 단골 식당을 만들고 최애 자리와 단골 웨이트리스를 정하고, 근처를 산책하며 매일의 한가한 일상을 살아가는 날들. 그러는동안 오래전 교류가 있었던 철학자와 통화를 하기도 하고 여자와 함께 살기도 하지만 결국 그는 혼자다. 전쟁과 혁명이 일어나고 세상이 바뀌지만 남자의 생활은 그냥 지속된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이건 내가 원해오던 삶이다. 경제적 걱정 없이 하루하루 비슷하게 흘러가는 평온한 삶. 권태롭고 의미 없어보일지언정, 그건 외부의 시선일 뿐. 모든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고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몇몇을 제외하면 어차피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못한다. 꼭 기록에 남길만한 삶이 아니라해도, 무의미하다 해도 그 자신에게만 평화로웠다면 그걸로 충분한 게 아닐까? 누구도 해하지 않고 누구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말이다. 원제인 "Le Solitair"는 물론 '외로운 남자'라고 번역하는 게 대부분이겠지만 그냥 '혼자인 남자'로도 번역할 수 있지 않은가. 혼자라고 꼭 외로우리라는 법은 없다. 그의 삶은 혼자여도 괜찮은 삶이었지 않나.
8. 레시피 월드(백승화. 한끼. 2025. 276쪽)
: 음식과 관련된 능력자들의 이야기. 연작 소설이라고 해도 되고, 중간에 삽입된 '여담'으로 연결된 장편으로 볼 수도 있을 듯. 우리나라 방귀쟁이 며느리 설화(<방귀 전사 볼 빨간>)나 좀비 이야기(<살아있는 오이들의 밤>)는 재밌었고 독박 육아에 지친 엄마의 이야기(<깜박이는 쌍둥이 엄마>)는 오히려 현실적이라 마음이 좀 아팠다. 가장 재밌었던 건 첫번째 이야기지만 마지막 이야기가 없었다면 소설집이 마냥 가벼워졌을 듯.
9. 작별 너머(다비드 디옵, 목수정 역. 희담. 2025. 352쪽)
: 식물학자였던 미셸 아당송은 딸 아글라에에게 일체의 유품을 남기고, 아글라에는 이 모두를 자신이 구입해서 고치고 있는 성으로 가져온다. 어릴 때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무궁화 나무가 있는 서랍장이 문득 눈에 띄고, 서랍 속 비밀 서랍을 연 아글리에는 낡은 수첩을 발견한다. 젊은 시절부터 아카데미 회원이 되길 바랐던 미셸 아당송은 연구를 위해 세네갈에 가게 됐고, 그곳의 자연에 매료되었다. 백인으로서 아당송은 많은 특권을 누리는데, 부족의 왕자를 보좌관처럼 데리고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식물 표본을 수집하던 중 어느 마을에서 '돌아온 여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마을 족장의 조카인 마람은 마을에 이르는 한적한 길 한중간에서 백인들에게 납치되어 끌려갔으나 몇 년 뒤 한 남자를 통해 자신이 그 마을에서 죽은 자가 되었는지를 확인하려 했고, 이는 그녀가 세네갈 어딘가에 머물고 있다는 뜻. 백인에게 노예로 팔려갔다가 돌아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아당송은 호기심을 누를 수 없고, 그녀가 머물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향해 여행을 시작한다.
(강력 스포)
18세기 세네갈의 생활상과 당대 노예 무역의 실상, 백인들의 제국주의 정책과 인종차별 등이 잘 드러나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아당송의 사랑이야기를 위한 배경일 뿐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말로 달콤한 슬픔. 비록 젊은 아당송은 순진하게도 자신의 사랑이 어떻게든 장애를 극복하고 나아갈 것이라 믿었지만 아무리 소설 속일지언정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난 이 이야기가 아당송에게만 새드 엔딩이리라 믿는다. 마람은 처음 고래 섬에서 도망칠 때, 수영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므로 마람이 마지막 순간에 아당송의 손을 놓고 바다에 뛰어든 건 그녀 자신을 믿고 행한 일이었다. 난 그녀가 그 믿음에 응답받았으리라 믿는다. 마람은 계속 그녀의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아당송 없이. 그게 그녀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옳았을 것이다, 그 때에도 혹은 지금이었어도.
10. 재구성(민병훈. 민음사. 2020. 292쪽)
: 이전에 읽은 작가의 작품( 『달력 뒤에 쓴 유서』)이 정말 좋았어서 선택했는데, 이 책이 더 먼저 출간된 책임에도 내게는 왠지 후속작처럼 읽혔다. 표제작이 내가 먼저 읽은 작품을 다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음에도 난 소설집의 제목 때문에, 그리고 첫번째 작품(「장화를 신고 걸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연꽃 사이를 헤치며」)을 비롯해 다른 작품들에서도 『달력 뒤에 쓴 유서』의 이야기가 조금씩 반복되기에 그렇게 느껴졌고 그게 날 조금은 피로하게 했다. 사실 마음과 상황이 좋을 때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작품들이지만 내게는 꽤 무거웠고, 가끔 지루했다. 더이상 도시에서 부유하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았다.
11. 검은 모자를 쓴 여자(권정현. 자음과모음. 2021. 264쪽)
: 새벽 2시, 민은 문득 베란다 밖을 내다본다. 검은 모자를 쓴 여자가 민의 집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민은 얼른 달려나가지만 분명 헌옷수거함 옆에 서 있던 여자는 온데간데 없다. 남편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고, 작은방의 동수도, 강아지 무지도 아무 일 없지만 민은 불안하다. 사실 3년 전 아들 은수가 약수터 앞 공터에서 민이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유아차에서 목이 꺾여 죽은 후 민은 정신과에 다니고 있다. 은수의 죽음 이후 힘들어하던 민은 강아지 무지를 입양해 키우면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가던 중, 눈 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동네 교회의 잠긴 문 앞에 버려져 있던 은수와 비슷한 개월수의 동수를 발견하여 입양했다. 동수 품에 안겨 있던 검은 고양이 까망이도. 그러나 민은 동수에게 깊은 정이 가질 않는다.
어디까지가 망상이고 어디부터가 진실이었을까? 진실이 있기는 한가? 병원에서 공연했던 마술사가 한 말처럼 삶이란 모자 속 고양이를 꺼내는 일의 연속이다. 그냥 꺼내는 거.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니라 꺼내는 순간 결정되는 거다.(213쪽) 민은 과연 몇 마리의 고양이를 꺼냈을까? 난 민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끝까지. 민이 어떤 행동을 하든 간에. (사실은 민이 그 행동을 하길 바라고 있다. 결말에서 작가가 하지 않은 그 이야기처럼.)
12. 빛의 마녀(김하서. 자음과모음. 2019. 272쪽)
: 한국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는 니콜은 횡단보도 옆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여자를 발견한다. 한겨울에 맨발로 얇은 코트만을 입은 채 스물 여섯 시간밖에 살지 못한 딸의 죽음에 병원 과실을 묻는 여자, 태주. 200년이 넘게 살고 있는 마녀 니콜은 문득 딸 샬럿이 기억나고, 태주에게 아이를 되살려 주겠다며 자신의 모든 말을 따르겠냐고 묻는다. 니콜은 자신을 쫓는 마녀 헌터 에드워드의 눈을 피해 이곳에 얼마나 더 머물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태주에게 아이를 되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알려준다.
태주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지금 하는 일들과 니콜의 과거가 엇갈린다. 왜 니콜이 태주를 한눈에 알아볼 수 밖에 없었는지. 같은 상처를 지녔다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씻어낼 지는... 결말이 조금 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책 속에서나마 진실이 이렇게 대놓고 드러나지 않았으면 좀더 여운이 있지 않았을까. 이야기 자체는 좋았다. 이들이 한 방식이 건강한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그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사실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는 게 위로가 되기도 했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봐야겠다.
13. 너무나 많은 시작(존 맥그리거, 이수영 역. 민음사. 2010. 456쪽)
: 데이비드는 이제 막 장모의 장례식에서 돌아왔다. 아내 엘리너는 가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다시 여행을 가기 위해 짐을 꾸려야 한다. 데이비드는 장례 기간 동안 함께 있던 딸 케이트의 성숙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뿌듯해 하고, 엘리너의 마음을 달래 주려 한다. 그리고 엘리너는 이제 곧 데이비드가 가야 하는 여행길에 동행해 주겠다고 한다. 이 여행은 무엇을 위한 여행일까? 어릴 때부터 여러 물건들을 수집하고 물건들의 이야기를 상상했던 데이비드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큐레이터가 되고 출장길에 애버딘 박물관 카페에서 일하던 엘리너를 만나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애한 끝에 그녀와 결혼한다.
사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아일랜드에서 런던으로 일하러 온 메리 프리엘이 일하는 집 주인에게 강간 당하고 사생아를 출산하는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하지만 읽으면서 난 프롤로그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나중에야, ***의 세상이 뒤집어진 후에야 다시 기억해낸다. 이 소설 속에는 그만큼 많은 삶들이, 줄리아와 도로시와 엘리너의 삶이, 그리고 데이비드의 삶이 있다. 서로가 연결되어 있고 또 하나하나가 소중한 그들의 이야기가. 도로시의 이야기는 평범했지만 줄리아의 이야기는 조금 안타까웠고 엘리너의 이야기는 화가 났다. 어쩌면 평범하고도 흔한 이야기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삶은, 모든 삶은 저마다의 응어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옹이가 진 부분은 더 단단하기에.
소설의 목차가 데이비드가 여행을 위해 챙기는 물품의 목록이라는 걸 다 읽고서야 알았다. 미리 알았으면 더 좋았을 걸.
14. 골렘(구스타프 마이링크, 김재혁 역. 책세상. 2003. 398쪽)
: 예술품 복원을 업으로 하는 페르나트. 그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없다. 게토 지역에 있는 그의 작업실 겸 거주지의 1층에는 고물상 바서트룸이 살고 있고 다른 층에는 지적 장애인 형제와 이들이 사랑하는 빨강머리 로지나가 있다. 페르나트는 그저 언제부턴가 이곳에 있으며 예술품 복원을 해왔고, 가끔 작가, 화가, 구두장이인 친구들과 어울린다. 어느날 페르나트에게 묘한 분위기의 손님이 와 '이부르'라는 책의 복원을 의뢰한다. 페르나트는 이 책을 복원하려 하지만 확신할 수 없고, 손님의 형상 또한 희미할 뿐이다. 이런 페르나트에게 친구들은 골렘 전설을 이야기해 준다. 페르나트는 파편적으로 돌아오는 자신의 과거 기억과 게토 지역에서의 여러 사건, 그리고 세무 공무원이지만 통찰력이 있는 정신적 지주 셰마야 힐렐과 그의 딸 미리암과의 관계, 젊은 시절 연인이었고 현재는 바서트룸의 복수 대상인 사비올라 박사와 불륜 관계인 안겔리나에 대한 연민과 보호 사이에서 부유한다.
줄거리를 요약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읽는 동안에는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페르나트의 모든 행동이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다만 모든 행동이 공감이 되진 않았고. 골렘의 존재 또한 그가 필연적으로 골렘의 문 없는 방을 발견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골렘의 상징성에 대해선, 읽는 동안에는 꽤나 명확하다고 생각했다. 페르나트의 또다른 자아일 것이라고. 그리고 이런 내 추측으로 인해 마지막 결말 부분에서도 놀라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으므로. 솔직히 말하면, 예상대로여서 조금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안겔리나를 기다리던 성당에서의 환상과 그 의미를 나중에 깨닫는 페르나트의 모습은 내가 이 소설에서 기대했던 그대로여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되었다.
15. 우리 사이에 금지된 말들(예소연,전지영,한정현. 다람. 2025. 152쪽)
: 앤솔러지. 솔직히 말하면, '금지된 말들'이라는 주제보다는 각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단편 자체의 내용이 좋았다. 읽으면서 주제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했고 읽다가 '아, 여기서 앤솔러지의 주제가 드러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세 편 다 좋았고, 뒤의 작가들 대담도 좋았다. 가장 공감됐던 건 한정현. 나머지 두 편도 당연히 좋았지만 '나'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좀 있었다.
16. 레드 닥>(앤 카슨, 민승남 역. 한겨레출판. 2019. 208쪽)
: 『빨강의 자서전』의 게리온은 이제 자랐다. 중년이 된 그는 그저 다닐 카름스를 읽으며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우연히 만난 Sad But Great와 차를 몰고 북쪽으로 향한다.
『빨강의 자서전』보다 조금 덜 반짝이고 조금 더 슬프다. 어쩌면 시간이 닳게 하는 건 표피가 아닌 마음이겠지. 이제 사랑은 없다. 완벽한 아내는 그저 아내일 뿐. 그래도 난 그녀가 좋았지만, G의 북녘행은 멈추지 않는다.
17. 해파리 만개(김초엽. 마음산책. 2026. 204쪽)
: 단편집. 첫번째 작품이 너무 뻔해서, 마치 청소년들에게 해주는 우화 같아서 멈칫했다. 하지만 두번째 작품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에서 이전의 김초엽이 보여서 다시 맘 편하게 읽어 나갔다. 구석에서 조용히 있는, 눈에 띄지 않지만 분명한 존재들에게 주목하는 작가의 시선이 여전히 좋았다. 가장 재밌었던 건 「젤리의 우울」이지만 인상 깊었던 건 피그말리온 효과를 떠올리게 했던 「사모나」.
18. 불필요한 여자(라비 알라메딘, 이다희 역. 뮤진트리. 2026, 436쪽)
: 72세 알리야. 오래전 남편과 이혼하고 그동안 혼자서 삶을 꾸려왔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지만 집안에서 밀어붙인 조혼으로 원하는만큼의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래도 지금 사는 집의 주인이 알리야의 권리를 인정해 주어서, 그리고 (전)남편의 집안과 친했던 한나의 소개로 서점에서 일할 수 있어서 혼자서 잘 살 수 있었다. 알리야는 매년 1월 1일에 새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바로 소설 번역. 지금까지 37권을 번역했지만 이 종이뭉치들은 그저 가정부 방과 그 옆 화장실에 쌓여 있을 뿐이다.
알리야는 평생을 칩거한다, 책과 함께. 사실 난 그게 부러웠다. 너무 철없는 소리일 지 모르지만 알리야에게 삶은 문학이고, 문학으로 그녀 자신의 삶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특히 페소아의 문장들로. 혼자 사는 여성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그저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공간과 혼자만의 시간을 채워줄 무언가. 알리야에게는 그게 책이었고 나에게도 그러하다. 하지만 이렇게 혼자만의 삶을 잘 꾸려가는 그녀에게도 역시 연대는 필요하다. 그래서 난 계단 위의 '세 마녀'가 고마웠다. 그녀들이 그저 막무가내가 아니어서 좋았고, 셋이 다 배경과 직업이 달라서 좋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나이들고 고립된, 괜찮은 척 하지만 사실은 외로웠던 여성이 구원받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좋았다. 세 마녀는 지금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줄 것이고 알리야의 노력은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다. 적당히 담백하고 적절히 따뜻한 게, 그게 가장 좋다.
ps. 레바논에서도 대학원생은 '노예'라니.... 전세계 공통인건가? 웃기면서 슬프다.
19. 2026 소설, 한국을 말하다(성해나,김기태,박연준,박민정,성혜령,김경욱,하성란,윤성희,정한아,김유담,김병운,문지혁,이미상,송호근,정용준,정소현,안톤 허,권김현영,정대건. 은행나무. 2026. 216쪽)
: 한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이야기들. 짧지만 응축된 이야기들 속에서 나와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조금은 외면하고 싶은 모습도 있고 설마 싶은 모습도 있었지만. 물론 내가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소설과 에세이 사이의 어딘가에 있던 안톤 허.
20. 파트타임 여행자(반수연. 문학동네. 2025. 276쪽)
: 디아스포라 단편집. 저자는 10년 동안 글을 못 썼다고 했는데 그렇게 꾹꾹 눌러담은 마음이 진하게 녹아있는, 좋은 작품들이었다. 하나같이 마음 아픈, 길 위의 이야기들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다음 발걸음이 단단할 것임을, 이들의 내일은 오늘보다 밝을 것임을 믿게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들이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21. 다시, 몸으로(김초엽,저우원,김청귤,청징보,천선란,왕칸위. 김이삭 역. 래빗홀. 2025. 308쪽)
: '몸'을 주제로 한국과 중국의 소설가들이 쓴 앤솔러지. 세 가지 주제로 각각 한국 작가 한 명과 중국 작가 한 명이 단편을 실었는데, 주제는 사실 크게 상관 없을 듯. 신체에 대한 이야기지만 사실은 인간 자신의, 어쩌면 정신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인간을 구성하는 건 무엇인지, 인간 존재에서 신체란 어떤 역할인지... 주제나 소재를 생각하지 않고 읽어도 좋기만 한 여섯 작품들이었다. 가장 좋았던 건 어쩌면 '몸'과 가장 관련이 적은 이야기였던 청징보 <난꽃의 역사>.
22. 하우스메이드 2(프리다 맥파든, 황성연 역. 북플라자. 2025. 400쪽)
: 밀리는 여전히 전과 기록 때문에 직장을 얻기 힘들다.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있지만 생활비는 벌어야 했기에 예전처럼 하우스메이드 일을 계속하는데, 이번에도 어이없이 해고당했다. 구직 사이트에 올려두고 연락을 기다리던 밀리는 한 남자로부터 연락을 받고 맨해튼 부촌의 펜트하우스를 방문한다. 보통의 경우처럼 아내가 연락한 게 아니지만, 좋은 인상의 성공한 기업가 더글러스는 바로 일을 시작해 달라고 한다. 다만 아내는 건강이 좋지 않아 손님방에 칩거하고 있다면서 절대 아내를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말도 걸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밀리의 눈에 아내 웬디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손님방에서는 알 수 없는 소리가 나고, 웬디의 식사는 늘 더글러스가 가져다 준다. 게다가 빨래의 검붉은 얼룩과 세면대에 찍혀 있는 피묻은 손자국...
흥미를 유발하는 글솜씨는 여전하지만 전편보다는 재미는 좀 덜하다. 웬디의 이야기는 짐작 못했지만. 그래도 권선징악이라는 면에서는 전편보다 낫지 싶다. 전편보다 더 확실해서. 3권을 읽을지말지 모르겠다.
23. 전혀 다른 열두 세계(이산화. 읻다. 2024. 208쪽)
: 매월 1편씩 연재했던 소설을 묶은 것. 소설집 제목처럼 각 작품의 세계관이 다 다르다. 부담없이 읽기는 했는데 뭔가 조금은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작가가 열두 편의 다른 이야기를 썼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가장 좋았던 건 <이무기 시절도 한때>.
24. 글쓰기에 대하여(찰스 부코스키, 박현주 역. 시공사. 2016. 332쪽)
: 저자가 작가나 편집자 등 문학과 관련있는 사람들에게 쓴 편지들. 약간의 편집(?)도 있는듯 한 게, 어떤 편지는 문학을 언급한 부분만 실려 있기도 하다. 부코스키는 여전히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일관되게 마초스럽고, 자신감있다. 시대상을 감안해도 맨정신으로는 인정해 주기 싫은 젠더 의식에도 불구하고 내가 부코스키를 애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 책에 실린 부코스키의 육성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걸 엮어낸 편집자에게 고맙다.
25. 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이하진. 열림원. 2024. 376쪽)
: 2000년 크리스마스에 뉴욕의 종합병원에서 갑자기 이능력자들의 능력이 폭발한다.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이후, 이능력자들은 별도로 관리된다. 그리고 잠재자들이 이능력자의 피를 수혈받거나 상처에 닿으면 '교란'이 일어나 10여년 동안 신체는 점점 약해지고 종국에는 코마 상태에 빠지게 된다. 열을 다루는 이능력을 가진 고등학생 미르. 학교 주위를 맴도는 이상한 트럭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경찰과 학교측에 알리지만 어른들은 애매한 태도만 보이고, 결국 트럭의 테러를 혼자서 막아내고 쓰러진 미르를 절친 건이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려다 건에게 교란이 일어난다. 10년 후, 미르는 이능력의 무효화를 연구하는 RIMOS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건을 소속 병원에서 최고의 치료를 받게 한다. 하지만 건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미르는 RIMOS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교란 상태에 들어간 서현주 씨의 딸 서해수와 인연이 닿는다.
일반적으로 장르 소설이라 할 때 기대하는 무드의 소설은 아니다. 일단 세계관이 상당히 정교하면서도 깊다. 이는 작가가 이야기 속에서 전개하는 물리학 이론의 깊이와 비례한다. 그래서 이야기 초반에는 살짝 지루했다. 재밌어지는 건 3부부터. 해피엔딩을 믿었지만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그만큼 소설의 분위기는 묵직했기에. 탄탄한 이론과 재난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작가의 시선이 좋았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이유없는 빌런이 없던 것도.